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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로의 원정

(마법사의 링 연작소설 제 1권)

모건 라이스

모건 라이스 작가소개

모건 라이스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젊은 성인 이야기를 다룬 11권의 연작소설 ‘뱀파이어 저널(미완),’ 연작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2권의 스릴러 종말물 ‘생존 3부작(미완),’ 판타지 연작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 ‘마법사의 반지(미완)’ 13권을 집필했다.

모건 작가의 소설은 오디오 북과 인쇄 본으로 출판됐고, 독일어,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일본어, 중국어, 스웨덴어, 네덜란드어, 터키어, 헝가리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로 번역됐다. (이 외 언어 번역본 출판예정)

모건 작가는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www.morganricebooks.com로 방문하셔서 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무료 소설, 증정품, 무료 앱 다운로드의 혜택과 최신 단독 소식을 제공받으실 수 있으며 페이스 북과 트위터를 통한 작가와의 소통이 가능합니다!

모건 라이스 작가에 보내는 찬사

“마법사의 반지는 음모, 대항책, 미스터리, 용맹한 기사들, 실연의 아픔이 가득한 사랑의 결실, 기만, 배신 등 즉각적인 흥행요소를 고루 갖췄다. 읽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하고 연령에 관계없이 누구나 매료된다. 판타지 소설 애독자라면 영구 소장도서로 추천한다.”

--도서 및 영화 평론, 로버트 메토스

“라이스 작가는 배경 설정에 있어 단순한 화법을 뛰어넘는 훌륭한 설명을 통해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잘 쓴 소설이며 순식간에 다 읽게 된다.”

--블랙 라군 리뷰 (‘일변’ 평론)

“어린 독자들에게 이상적인 소설. 모건 라이스 작가는 우여곡절을 훌륭하게 엮어냈다. 신선하고 독특. 연작 소설은 한 소녀......아주 특별한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매우 빠른 속도로 쉽게 읽힌다. 전 연령 구독 가능.”

--더 로맨스 리뷰 (‘일변’ 평론)

“첫 장부터 몰입되어 마지막 장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서론부터 액션이 가득한 빠른 전개를 자랑하는 감탄할만한 모험 소설이다. 지루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

--파라노말 로맨스 길드(‘일변’ 평론)

“액션, 로맨스, 모험, 긴장으로 꽉 찬 소설. 책을 손에 쥐고 다시 한번 사랑에 빠져라.”

--vampirebooksite.com (‘일변’ 평론)

“최고의 구성, 밤에 읽으면 멈추질 못해 큰일나는 그런 책. 극적인 결말 덕에 손에 땀을 쥐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져 바로 다음 책을 구매하고 싶게 만든다. ”

--더 달라스 이그재미너 (‘사랑’ 평론)

“’트와일라잇’과 ‘뱀파이어 다이어리’에 버금가는 책이자 독자로 하여금 마지막 장까지 계속해서 읽고 싶게 만든다. 모험, 사랑, 뱀파이어에 열광한다며 이 소설이 제격이다.”

--Vampirebooksite.com (‘일변’ 평론)

“모건 라이스 작가는 다시 한번 그녀의 뛰어난 작가적 재능을 보여줬다……이 소설은 뱀파이어와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어린 독자를 포함해 다양한 독자층을 아우를 것이다. 예상치도 못하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결말 덕에 독자는 충격에 빠질 것이다.”

--더 로맨스 리뷰 (‘사랑’ 평론)

모건 라이스 저서

마법사의 링 연작소설

전사로의 원정 (제1권)

왕들의 행군 (제 2권)

용의 숙명 (제 3권)

명예의 눈물 (제4권)

영광의 맹세 (제5권)

용맹의 충전 (제6권)

검의 의식 (제7권)

수여된 무기 (제8권)

주술에 사로잡힌 하늘 (제9권)

방패의 바다 (제10권)

강철 집권 (제11권)

화마에 갇힌 땅 (제 12권)

여왕들의 규칙 (제13권)

생존 3부작 연작소설

아레나 원: 슬레이버서너스(제1권)

아레나 투(제2권)

뱀파이어 저널 연작소설

일변 (제1권)

사랑 (제2권)

배신 (제3권)

운명 (제4권)

욕망 (제5권)

약혼 (제6권)

맹세 (제7권)

발견 (제8권)

부활 (제 9권)

갈망 (제10권)

숙명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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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 2012 모건 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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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이름, 등장인물, 사업, 기관 명, 장소 명, 이벤트, 사건 등은 모두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이자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모든 이름과 생존 및 죽음에 대한 유사한 상황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Shutterstock.com.의 허가 아래 사용된 표지 이미지 저작권 RazoomGame 소유.


목차


제 1장

제 2장

제 3장

제 4장

제 5장

제 6장

제 7장

제8장

제 9장

제 10장

제 11장

제 12장

제13장

제 14장

제 15장

제16장

제 17장

제 18장

제 19장

제 20장

제 21장

제 22장

제 23장

제 24장

제 25장

제 26장

제 27장

제 28장


“왕관을 쓴 머리는 편안히 쉴 수 없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 4세, 2부 中에서

제 1장

소년은 링 대륙의 서부왕국에서 지대가 낮은 고장의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 북쪽에서 트는 동을 바라봤다. 보이는 곳마다 구불구불한 푸른 언덕이 펼쳐졌고 일련의 골짜기와 봉우리가 마치 낙타의 등처럼 울퉁불퉁 이어졌다. 첫 태양의 타오르는 주홍 빛 서광은 아침 안개 속에 머물며 반짝반짝 빛났고 그 빛은 마법이 실린 듯 소년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살걸 뻔히 알면서도 오늘처럼 일찍 일어나 이렇게까지 멀리, 또 높이 언덕을 오른 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만은 상관없었다. 오늘만은 14년간 적용된 수많은 규칙과 집안일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특별한 날이었다. 오늘은 소년에게 운명이 찾아오는 날이었다.

서부 왕국의 남부 주에 터를 잡은 맥클리오드 일가의 토르그린은 단순히 토르라고 불리는걸 좋아하며 4형제 중 막내지만 아버지의 총애를 가장 못 받았다. 그는 오늘에 대한 기대감에 뜬눈으로 밤을 셌다.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며 충혈된 눈으로 첫 태양이 솟아오르길 기다렸다. 오늘은 몇 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날이었다. 이런 날을 놓치면 결국 마을에 고립돼 평생 아버지의 양떼나 돌보며 남을 생을 보내는 불행한 운명을 마주할게 뻔했다. 상상만으로도 견딜 수 없었다.

징병 선출일. 오늘은 왕의 군대가 각 주를 돌며 왕의 부대 지원자를 엄선하는 날이었다. 토르가 한평생 꿈꿔온 일이었다. 그에게 삶의 이유는 최상의 갑옷을 입고 엄선된 무기를 소지하는 왕의 최정예 전사, 실버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14세부터 19세로 구성된 왕의 부대에 먼저 가입하지 않고서는 실버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귀족 외 출신이거나 명망 높은 전사의 자식이 아니라면 왕의 부대에 지원할 수조차 없었다.

단, 몇 년에 한번 시행되는 징병제에는 예외가 적용됐다. 왕의 부대에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실버부대가 나서 온 지방을 샅샅이 뒤졌다. 모두가 알다시피 극소수의 서민만이 선출됐으며 이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왕의 부대에 최종적으로 합류했다.

토르는 골똘하게 시야를 살피며 모든 움직임을 주시했다. 실버부대가 마을에 진입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실버부대를 보고 싶었다. 양떼들이 그를 에워싸고 목청껏 울어대며 더 좋은 목초지인 산 아래로 다시 내려가자고 조르고 있었지만 토르는 그 소음과 악취를 떨치기 위해 노력했다. 집중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양떼나 돌보고 아버지와 형제들의 하인 노릇을 하며 가장 하대 받으면서도 제일 큰 짐 덩어리로 여겨졌던 삶을 견디게 해준 건 바로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거라는 다짐 덕분이었다. 그 언젠가, 실버부대가 이곳에 당도하면 지금까지 그를 하찮게 여겼던 모든 이들이 놀라게끔 보란 듯이 선출되리라 다짐했다. 신속하게 실버부대의 마차에 올라 그 동안의 삶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토르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심각하게 토르가 왕의 부대에 지원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토르가 무언가에 지원할 자격도 갖추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토르의 아버지는 토르 외의 세 명의 자식에게 모든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열 아홉 첫째 밑으로 줄줄이 연년생인 형제 셋에 토르만 이들과 세 살 이상 격차가 벌어졌다. 아마도 세 형제의 나이대가 비슷한 연유에서든지 토르와는 현저하게 대비되는 서로 닮은 생김새 때문이라던 지, 이 셋은 서로 붙어 다니며 토르의 존재조차 무시했다.

애석하게도 이들은 토르보다 키와 체격이 크고 힘이 세서, 작지 않은 체구의 토르지만 이들 옆에선 작아지고, 튼실한 그의 허벅지도 형제들의 참나무 통 같은 허벅지와 비교하면 비실해 보였다. 토르의 아버지는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머지 형제들이 훈련을 하는 동안 토르에게는 양떼를 돌보게 하고 무기를 손질하게 하며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 했다. 아무도 언급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토르는 한평생 형제들의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결국엔 그들이 성취하는 업적을 지켜만 보게 될 것을. 아버지와 형제들의 생각대로라면 마을에 꼼짝없이 갇혀 가족들의 요구사항에 따라 잡일이나 하는 것이 바로 토르의 운명이었다.

불행히도 토르의 형제들은 역설적으로 토르에게 위협을 느꼈고 토르도 이를 감지했다. 형제들의 모든 시선에서, 몸짓에서 느껴졌다. 왜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형제들은 토르에게 두려움 혹은 질투심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토르의 생김새나 말투가 형제들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차림새마저 뚜렷이 차이 났다. 아버지는 토르를 제외한 자식들에게 보라색과 진홍색의 최고급 외투와 금으로 도금된 무기를 마련해준 반면 토르에게는 조잡한 넝마만 쥐어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토르는 가진 옷가지를 최대한 잘 활용했다. 허리부분에 장식 띠를 달아 긴 코트를 묶었고 여름이 다가오자 소매 부분을 잘라 양 팔에 통풍이 잘 되도록 손질했다. 그가 걸친 셔츠는 거친 마직 단벌바지와 잘 어울렸고 형편없는 가죽 부츠는 그의 정강이까지 덮어줬다. 형제들의 가죽신에 비하면 토르의 부츠는 가죽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지만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전형적인 목동의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토르의 품행은 목동과 거리가 멀었다. 늠름한 자세와 자신만만해 보이는 하관, 기품이 넘치는 턱과 잿빛 눈동자가 마치 이주한 전사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곧게 뻗은 갈색 머리는 귀 뒤로 구불거리며 흘렀고 머리카락 밑으로 반짝이는 두 눈은 마치 불빛 아래 빛을 뽐내는 잉어 같았다.

징병 참석조차 허락 받지 못한 토르와 달리 나머지 형제들은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푸짐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아버지의 응원 속에 최고의 무기를 갖추고 징병에 지원할 예정이었다. 일전에 이에 대해 아버지께 문제를 제기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토르의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대화를 끝냈고 토르도 다신 언급하지 못했다. 너무 불공평했다.

토르는 더 이상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저 멀리서 왕실의 마차가 보이기 시작하면 집으로 곧장 달려가 아버지에 맞서 좋든 싫든 실버의 눈에 들도록 최선을 다 할 계획이었다. 나머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징병에 보란 듯이 지원할 생각이었다. 그럼 더 이상 아버지도 막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생각만으로도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태양이 하늘높이 떠올라 이제 막 떠오르는 두 번째 태양의 초록빛과 어우러져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 무렵 토르의 눈에 왕실의 마차가 들어왔다.

꼿꼿이 선 몸과 곤두선 머리카락에 짜릿함이 전해졌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말들이 이끄는 마차의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마차의 바퀴가 공중으로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 뒤로 연이어 오는 마차가 보일 때마다 토르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다. 두 개의 태양 아래 어슴푸레 빛나는 황금빛 마차 행렬은 마치 물위로 뛰어오른 물고기의 은빛 등처럼 보였다.

마차를 열 두 대까지 셌을 무렵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심장은 쿵쾅거리며 요동쳤고 난생 처음으로 양떼를 방치하고 뒤돌아 넘어질 듯 언덕 아래로 향했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 줄 때까지 그 무엇도 자신을 막지 못하리라 다짐했다.

*

언덕 아래로 질주하며 가까스로 멈춰 숨을 쉬었고, 나무 사이를 가르다 나뭇가지에 여러 번 긁혔지만 전혀 문제될게 없었다. 숲 속 빈 터에 도달했을 때 시야에 들어온 마을은 백토로 지은 단층 집 초가지붕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고요한 곳이었다. 일찍부터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의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 올랐다. 지극히 전원적인 마을이었다. 왕국에서도 하루 종일 마차를 타야 올 수 있는 곳이었고 너무 외진 곳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링 대륙 변두리에 위치한 농촌이었고 고작해야 서부 왕국에 속한 일개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토르는 마을 광장을 향해 박차를 가했고 그의 뒤로 흙먼지가 일어났다. 놀란 닭들과 마을 개들은 달리는 토르를 비켜섰고, 마당의 끓는 가마솥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본 늙은 아낙이 토르를 다그쳤다.

“천천히 가, 얘!”

아궁이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토르를 향해 늙은 아낙은 소리쳤다.

그러나 토르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집에 당도할 때까지 익숙한 그 길을 이리저리 돌아, 뛰고 또 뛰었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토르네 집도 별다른 장식 없이 앙상한 초가 지붕을 얹은 백토의 단층 주택이었다. 남들처럼 방 하나를 나눠, 아버지는 한쪽 벽면에서, 나머지 세 자식은 반대쪽 벽면에서 잠을 잤다. 다만 남들과 다른 게 있다면, 토르는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밀려나 집 뒤편에 마련된 작은 닭장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토르도 형제들과 함께 방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들의 체격이 커지자 자기네끼리 더욱 똘똘 뭉쳐 토르를 괴롭혔고, 더 이상 함께 잘 수 있는 여유공간이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토르는 크게 상심했지만 그나마 이제는 자신만의 공간이 주어진 것에 만족했고 가능한 한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 떨어져 지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이러한 결정은 집안에서 토르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한번 더 확인시켜줬다.

토르는 대문으로 달려들어갔다.

“아버지!”

벅찬 숨을 멈추며 소리쳤다.

“실버! 그들이 오고 있어요!”

아버지와 세 형제는 제일 좋은 옷을 갖춰 입고 아침 식사자리에 앉아있었다. 토르의 말에 이들은 벌떡 일어났다. 이내 어깨를 부딪히며 토르를 지나쳐 쏜살같이 대문 밖 길가로 뛰어나갔다.

토르도 곧장 이들을 따라 나갔다. 모두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첫째 드레이크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장 떡 벌어진 어깨, 다른 형제들과 같은 짧은 머리에 갈색 눈동자, 얇고 못마땅해 보이는 입술을 가진 그가 여느 때처럼 토르를 노려보았다.

“아무도 없네”

언제나 드레이크의 편을 드는 한 살 터울 아래 둘째 드로스가 동조했다.

“오고 있어요! 맹세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토르에게 몸을 돌려 토르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제가 봤어요.”

“어떻게? 어디서?”

붙잡힌 토르는 주저했다. 토르가 왕의 부대를 볼 수 있는 곳이라 봐야 딱 한곳, 가장 높은 언덕이라는 걸 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가장 높은 언덕에......올라갔어요……”

“양떼를 몰고 말이냐? 양떼를 그렇게 멀리까지 끌고 가면 안된 다는걸 잘 알잖아.”

“그렇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갈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는 성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당장 집으로 가서 네 형들 검을 가져오고 칼집도 깨끗이 닦아놔라. 그래야 왕의 부대가 당도하기 전에 형들이 제대로 갖춰 입지 않겠어.”

더 이상 토르에게 용무가 없어진 아버지는 나머지 자식들에게 가버렸다. 세 형제들은 길가에서 저 멀리 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우리가 뽑힐 수 있을까요?”

토르보다 세 살 많은, 토르의 세 형들 중 막내인 덜스가 물었다.

“안 뽑는 게 어리석은 게지, 올해 부대원이 부족하다 들었다. 충원이 꼭 필요하다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이곳까지 뭐 하러 오겠어. 너희 셋 모두 똑바로 서서 턱을 치켜 세우고 가슴을 쫙 피거라. 실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말되 그렇다고 시선을 피하지도 마. 강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해. 나약해 보여서는 안돼. 왕의 부대에 합류하고 싶다면 스스로 이미 왕의 부대원인 냥 행동하거라.”

“네, 아버지.”

세 형제가 자세를 바로 하며 동시에 대답했다.

아버지는 뒤돌아 토르를 노려봤다.

“아직까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게냐? 어서 들어가!”

토르는 집으로 뛰어가 뒷마당에 있는 무기 창고로 갔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몇 년에 걸쳐 고생스럽게 일해 모은 돈으로 형들에게 선물한 검 세 자루를 꺼냈다. 모두 최상의 은으로 장식한 칼자루에 예술품이나 진배없는 귀한 물건들이었다. 칼 세 자루를 한꺼번에 들어 그 무게에 다시 한번 흠칫 놀래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토르는 재빨리 다시 집 밖 형들에게 뛰어가 각자의 검을 건네주고 아버지를 돌아봤다.

“광을 안 냈잖아?”

드레이크가 불평했다.

아버지는 못마땅해하며 토르를 돌아봤지만 뭐라 말도 꺼내기 전에 토르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부탁 드려요. 아버지께 상의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광을 내라고 했지 않았느냐”

“부탁 드려요, 아버지!”

토르를 나무라며 노려보던 아버지였지만 끝내는 토르에게 용건을 물어봤다.

“뭔데 그러냐?”

토르의 표정에서 간절함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저도 형들과 함께 왕의 부대에 지원하게 허락해주세요.”

형제들이 토르의 뒤에서 박장대소를 터트렸고 덕분에 토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웃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인상을 더 찌푸렸다.

“너도?”

토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이제 열네 살이에요. 지원 연령이 됐다고요.”

“열네 살부터 지원할 수는 있지.”

드레이크가 어깨너머로 얕보며 받아 쳤다.

“네가 뽑힌다는 건, 가장 어린 사람을 뽑는다는 건데. 왕의 부대가 너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나를 놔두고 너를 뽑는다고?”

“무례하기 짝이 없군, 넌 늘 그랬어.”

덜스가 거들었다.

토르는 뒤돌아 형제들을 마주했다.

“형들에게 묻는 게 아니잖아요.”

이내 다시 돌아본 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험악했다.

“아버지, 부탁 드려요. 제게도 기회를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그 뿐이에요. 비록 제가 어리긴 하지만 앞으로 차차 능력을 증명할게요.”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넌 전사가 될 인물이 못돼. 네 형제들과는 달라. 넌 그냥 목동으로 살면 된다. 네 인생은 모두 이곳, 내 옆에 있다. 넌 네 몫을 하고 네 형들은 형들의 몫을 하면 된다. 꿈은 분수에 맞게 꿔야지. 주어진 대로 인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실하도록 하거라.”

토르는 눈 앞에서 모든 꿈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안돼,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시끄럽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분위기가 험해졌다.

“네겐 더 할말 없다. 실버부대가 오고 있다. 저리 비키고, 그들이 당도하면 알아서 행동해.”

아버지는 앞으로 나서더니 토르가 무슨 거슬리는 물건이라도 되는 양 손으로 무심히 밀어버렸다. 아버지의 우람한 손바닥이 토르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마을에 요란한 소음이 일어났고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나와 거리의 양쪽을 메웠다. 뿌연 먼지가 마차의 도래를 알리더니 얼마 후 천둥 소리 같은 엄청난 소음과 함께 여러 대의 마차가 각각 열두 필의 말에 이끌려 당도했다.

마치 불시에 습격하는 군대처럼 나타난 마차들이 정차한 곳은 토르의 집 근처였다. 말들은 주변을 의기양양하게 뛰어다니며 울어댔다. 뿌연 먼지가 가라앉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토르는 애타는 마음으로 실버들의 갑옷과 무기를 보기 위해 애를 썼다. 태어나 처음으로 실버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보게 되자 심장이 요동쳤다.

선두에서 말을 이끌던 실버대원 한 명이 말에서 내렸다. 실버가 왔다. 반짝이는 고리 갑옷에 긴 검을 허리에 찬 저자가, 다름아닌 실버였다. 30대의 나이에 덥수룩한 수염과 뺨에 보이는 여러 흉터, 전장에서 얻은 것 같은 휘어진 코는 진정 사내다운 면모를 자랑했다. 토르는 지금껏 그렇게 큰 체구를 본 적이 없었다. 어깨는 남들보다 두 배나 넓었고 용모로만 보아도 그가 총 책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버 대원은 먼지가 가득한 땅에 발을 내디뎠다. 줄지어 서있는 소년들을 향해 걸을 때마다 그의 신발 뒤축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마을 곳곳에서 모인 소년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차려 자세를 하고 있었다. 실버 대원이 되는 것이야말로 명예와 영예와 영광과 전장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토지, 명성, 재물은 부수적으로 따라왔다. 최고의 신붓감과 최상의 토지, 빛나는 영광이 보장된 삶이었다. 가족 중에 실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실버가 되기 위한 첫 수순은 우선 왕의 부대에 선발되는 것이었다.

토르는 커다란 황금 마차들을 유심히 살폈고 그 안에 탈 수 있는 지원자들의 자리가 이제 몇 남지 않았다는 걸 이내 눈치챘다. 왕국의 영토가 매우 넓었기에 실버부대는 이미 그만큼 많은 마을들을 돌고 오는 길이었다. 징병이 예상보다 더 어렵고 치열할거란 현실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여기 모인 소년들이 모두 경쟁 상대였고 토르의 형들을 비롯한 웬만한 지원자들 모두 상당한 싸움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토르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실버 대원이 가능성이 있을만한 지원자를 찾아 조용히 걷는걸 보고 있자니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대원은 길 끝에서 시작해 천천히 원을 돌며 돌았다. 모두 토르가 잘 알고 있는 소년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에도 불구하고 왕의 부대에 선발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스스로 전사로서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이들에게는 징병이 두려울 뿐이었다.

토르는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이야말로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더 선출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형들이 토르보다 나이가 많고 체구가 크고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토르가 징병에 지원할 권리조차 박탈하는 건 너무도 억울한 일이었다. 순간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실버 대원이 토르의 집 근처로 다가섰을 무렵 토르는 어느새 몸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실버 대원이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토르의 형제들 앞이었다. 대원은 형제들을 위아래로 살펴보고 흡족해 했다. 이내 형제 한 명의 칼집에 손을 뻗더니, 얼마나 단단한지를 시험이나 하듯 확 잡아 당겼다.

그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전장에서 검을 사용해본 경험이 없겠지, 맞는가?”

대원이 질문한 사람은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토르에게는 처음으로 드레이크가 긴장한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없습니다, 주군. 그러나 훈련은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훈련!”

대원은 크게 폭소하며 몸을 뒤로 돌렸고 면전에서 드레이크를 비웃는 나머지 실버대원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드레이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드레이크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주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건 드레이크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난 적군들에게 훈련이나 하며 검을 휘둘러본 자네를 두려워하라고 말해야겠군!”

대원들은 다시 한번 웃어댔다.

실버 대원은 다음으로 토르의 다른 형제를 눈여겨봤다.

“지원자 세 명이 형제였군.”

그는 턱에 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쓸모 있겠군. 모두 체구가 좋고. 검증되진 않았지만 강해 보이고. 선발되려면 훈련이 많이 필요하긴 하겠군.”

대원은 잠시 망설였다.

“자리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대원은 고개를 움직여 마차의 뒤를 가리켰다.

“올라타, 빨리. 마음 바뀌기 전에.”

환희에 가득 찬 세 형제는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토르의 시선에 덩달아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형제들이 선출되는걸 보고만 있자니 침울했다.

대원은 다음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토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주군!”

아버지가 토르를 노려봤다. 그러나 토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원은 가던 길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토르는 앞으로 두 걸음 나섰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저도 한번 봐주십시오, 주군.”

잠시 놀란 대원은 상대해줄 가치도 없다는 듯 토르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안 봤었나?”

대원은 토르에게 반문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대원들도 웃어댔다. 그러나 토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겐 전부였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었다.

“왕의 부대에 선발되고 싶습니다.”

대원은 토르에게 다가갔다.

“지금 나이가?”

대원은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열네 살이 되긴 했나?

“네, 주군. 2주 전에 생일이 지났습니다.”

“2주 전이라고!”

대원은 폭소를 터트렸고 나머지 대원들도 한바탕 웃어댔다.

“그렇다면 우리의 적들은 모두 자네를 보고 벌벌 떨겠군.”

토르는 가슴속에서 모멸감이 차 올랐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결코 이렇게 끝내버릴 수 없었다. 대원이 뒤돌아 걸어갔다. 그러나 토르는 그를 그렇게 보낼 순 없었다.

토르는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주군! 지금 큰 실수를 하시는 겁니다!”

대원이 다시 한번 멈춰 서서 몸을 돌리자, 사람들 속에서 탄성이 퍼져나갔다.

대원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미련한 것, 당장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는 토르의 어깨를 잡고 재촉했다.

“싫어요!”

토르는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의 손을 떨쳐냈다.

대원은 다시 토르에게 다가왔고, 이에 아버지는 뒤로 물러섰다.

“실버를 조롱하면 어떠한 처벌을 받는지 알고 있느냐?”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요동쳤지만 토르는 물러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용서해주십시오 주군,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토르의 아버지가 나섰다.

“네게 묻지 않았다.”

대원은 위화감이 가득한 얼굴로 토르의 아버지가 나서는걸 막았다.

대원은 다시 토르에게 몸을 돌렸다.

“대답해!”

토르는 말을 잃은 채 침을 삼켰다. 그가 예상한 상황은 이런 게 아니었다.

“실버를 모욕하는 일은 왕을 모욕하는 일과 다름없다.”

토르는 기억을 더듬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즉 네게 채찍질 마흔 번의 형벌이 내려질 수 있다는 뜻이지.”

“주군을 모욕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선발되고 싶었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일평생 꿈꿔온 일입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대원은 토르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천천히 인상을 풀었다. 침묵 끝에 대원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젊다. 그리고 당당하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야. 좀 더 성숙해지면 찾아오도록.”

이 말을 남긴 뒤, 대원은 다른 소년들에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고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의기소침해진 토르는 떠나는 마차를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차는 처음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토르의 눈에 들어온 건 마차에 실려가는 세 형들이었다. 마차에 몸을 실은 그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토르에게 조롱을 퍼부었다. 그렇게 토르의 눈앞에서 형제들은 떠나갔다. 이곳에서 멀리, 보장된 삶을 향해.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거리를 꽉 메웠던 마을 사람들은 볼거리가 사라지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네가 얼마나 무모했는지 알기나 하느냐, 머저리 같은 것아”

아버지는 순식간에 토르의 양 어깨를 움켜 쥐었다.

“너로 인해 네 형들마저 잘못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느냐?”

이에 토르는 거칠게 손을 휘저어 아버지의 두 손을 치웠지만, 아버지는 다시 목덜미를 쥐고 손등으로 토르의 얼굴을 때렸다.

따끔함에 순간 토르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가서 양들을 데려와. 지금 당장! 그리고 오늘 식사는 꿈도 꾸지 말거라. 오늘 저녁은 굶어. 대신 오늘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곰곰이 반성하거라.”

“아예 안 돌아오는 게 좋겠네요!”

토르는 집을 나와 재빨리 언덕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토르야!”

아버지가 큰소리로 외치자 거리에 남아있던 마을 사람들이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쳐다봤다.

토르의 빠른 걸음은 점점 속도가 붙어 달리기로 이어졌다. 가능하다면 이 곳에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다. 토르는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단 하나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에 눈물 범벅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제 2장

분노에 잠긴 토르는 몇 시간이 넘도록 이곳 저곳으로 언덕들을 배회했다. 그러다 결국엔 언덕 위에 주저 앉아 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사라지며 남긴 흙먼지가 모두 다 없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지켜봤다.

더 이상 마을에 방문객이 찾아올 리 만무했다. 토르는 또다시 이 작은 마을에서 행여 찾아올지 모를 실버부대를 기다리며 기약 없는 몇 년을 보내야 했다. 그마저도 만에 하나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집에 남겨진 사람은 토르와 아버지, 단 둘뿐이었다. 앞으로 토르에게 노여움을 고스란히 드러낼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또다시 아버지의 종 노릇이나 하며 살다가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토르도 아버지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게 뻔했다. 나머지 형제들이 명예를 얻는 동안, 토르는 작은 마을에 갇혀 초라하고 천한 삶에 안주해야 했다. 갑자기 분노로 피가 솟구쳤다. 이건 토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다.

토르는 이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묘안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짰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삶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다.

몇 시간을 앉아있다 결국 낙담한 채 일어나 익숙한 마을 언덕들을 이리저리 가로질렀다. 어느새 토르는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첫 번째 태양은 이미 하늘 밑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고, 두 번째 태양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솟아 초록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느릿느릿 걸으며, 허리 춤에서 오랜 사용으로 보기 좋게 바랜 가죽 장식 끈을 풀었다. 토르는 다시 손을 뻗어 허리에 연결된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그 동안 좋다 하는 개울가에서 하나하나 수집해둔 매끄러운 작은 돌멩이들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가끔씩 토르는 돌멩이로 새총을 쏴 날아가는 새를 맞췄다. 그러나 보통은 쥐를 겨눴다. 몇 년 동안 거듭하며 몸에 익힌 습관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맞추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움직이는 목표물을 맞췄고 그 이후부턴 뭐든 명중시켰다. 이젠 뗄래야 뗄 수 없는 취미가 돼버렸다. 새총을 쏘며 마음 속 분노도 떨쳐냈다. 형들이 검을 휘둘러 통나무를 벨 수 있을진 몰라도 돌멩이 하나로 날아가는 새를 명중시키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토르는 자신도 모르게 새총에 돌을 채우고 최대한 뒤로 잡아 당긴 뒤 온 힘을 다해 쏘았다. 마음속의 목표물은 아버지였다. 돌은 꽤 멀리 떨어진 나뭇가지를 명중시켰고 덕분에 나뭇가지가 힘없이 꺾여나갔다. 돌을 던져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토르는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를 겨냥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이 오히려 두려웠고 그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목표물은 오로지 나뭇가지뿐 이였다. 단, 양떼 주변에 여우가 접근할 때는 예외였다. 점차 토르의 양떼 주변에는 그 어떤 여우일지라도 얼씬조차 못했고, 덕분에 양떼들은 마을에서 가장 안전하게 방목됐다.

지금쯤 형들이 어디쯤 있을까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왕실에 당도하기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형들의 향후가 눈 앞에 절로 펼쳐졌다. 최대한 옷을 차려 입고 나온 사람들의 대대적인 축하와 환영인사를 받으며 왕궁에 당도하는 형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형들은 전사들의 환영을 받는다. 다름아닌 실버부대 대원들의 환영을. 형제들은 왕의 부대에 최종 선발되고 부대 막사에서 생활하며 왕실 훈련장에서 가장 좋은 무기로 훈련을 받을 것이다. 각자 실버의 후원을 받는 후견부대원이 되고 언젠가는 실버가 되어 전용 말과 갑옷을 하사 받는 대지주가 될 것이다. 그럼 형들은 모든 축제와 왕의 만찬에 빠지지 않고 초대를 받게 된다. 매력적인 삶이 아닐 수 없었다. 토르는 이 모든걸 놓친 것이다.

전신에 고통이 전해졌다. 마음 속으로 꾹꾹 누르려 했으나 맘처럼 되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스스로에게 외쳐댔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진정 자신에게 주어진 삶은 이보다 더 멋지다고. 그 삶이 정확이 어떤 것인지 알 순 없었지만 분명한 건 이곳에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르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언제나 느끼며 살았다. 특별한 존재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 누구에게서도 이해 받지 못하고 과소평가됐다.

가장 높은 언덕에 오른 토르는 양떼를 찾아봤다. 훈련이 잘 된 양들은 다 함께 무리 지어 있었고 그곳에 있는 풀을 닥치는 데로 만족스럽게 뜯어먹고 있었다. 털에 염색해 둔 빨간 표식을 확인하며 양들을 하나하나 셌다. 그러나 토르는 양의 수를 모두 확인하고는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마리가 모자랐다.

반복해서 세고 또 세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한 마리가 없어졌다.

토르는 지금까지 한번도 양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양을 잃어버리면 아버지가 토르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이 황무지에 양 한 마리가 속수무책으로 길을 헤맨다는 생각에 토르는 더욱 속이 상했다. 무고한 생명이 고통 받는 건 그에겐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덕 가장 높은 곳으로 황급히 올라 저 멀리 수평선까지 늘어진 여러 언덕들을 살피며 빨간 표식을 등에 품은, 홀로 된 양을 찾아보았다. 사라진 양은 무리들 중에서 가장 야생성이 강한 놈이었다. 양은 이미 멀리까지 도망친 상태였다. 게다가 수많은 장소 중에서도 다름아닌 서쪽 다쿠우드로 향하고 있었고, 이에 토르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다크우드는 양뿐만 아니라 사람의 출입도 금지된 곳이다. 마을의 경계 너머에 있을뿐더러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때부터 절대 가면 안 되는 곳이란 걸 학습했다. 차마 가볼 엄두도 못 냈다. 전설에 따르면 그곳엔 미로 같은 숲과 사악한 동물들로 가득해 결국 죽어서야 헤어나올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갈등에 휩싸인 토르는 다크우드 위에 펼쳐진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양을 그렇게 죽게 놔둘 수 없었다. 당장 서두른다면 다크우드에 가기 전에 양을 데려올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양의 위치를 살핀 후 어둑한 하늘로 뒤덮인 다크우드를 향해 서쪽으로 재빠르게 뛰었다. 마음은 무겁게 철렁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몸은 달리고 있었다. 이젠 되돌리고 싶어도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마치 아주 무시무시한 악몽을 향해 돌진하는 기분이었다.

*

토르는 쉬지 않고 달려 수많은 언덕을 지나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인 다크우드로 가고 있었다. 산길이 끝난 곳 맞은편에 다크우드 숲길이 펼쳐졌다. 토르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숲 속으로 힘껏 질주해 들어갔다. 발 밑에선 바삭 하고 마른 나뭇잎들이 으스러졌다.

숲 속에 진입하자마자 어둠이 토르를 덮쳤다. 하늘 높이 솟은 소나무들이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숲 속은 매우 추웠다. 들어선 순간부터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어둠이나 한기 외에도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분명 느껴졌다. 관찰 당하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토르는 고개를 올려 자신의 몸통보다 두껍고 울퉁불퉁한 아주 오래된 나뭇가지들을 둘러봤다. 가지들이 산들바람에 흔들거리며 삐걱댔다. 숲 안으로 열 다섯 걸음 정도 걸어갔을 뿐인데 이상한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봤지만 토르가 들어온 숲의 입구는 이미 시야에서 희미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토르는 주저하고 있었다.

마을 주변으로 다크우드가 존재하는 까닭에 토르에겐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어떤 목동도 도망간 양이 다크우드로 간다면 그 뒤를 쫓지 않았다. 설령 토르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다크우드에 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들려왔고 모두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 예외였다. 토르는 깊게 자리잡은 고정관념들을 무시했고 오히려 주위 깊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어딘가에서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 눈 앞에 펼쳐진 인생을 따라가라며 스스로를 한계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숲 속 깊은 곳을 향해 앞으로 걸어갔지만 이내 멈춰 섰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았다. 때마침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도망간 양이 지나가며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토르는 그 흔적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한참 후, 그는 다시 방향을 바꿨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영락없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신세가 됐다. 기억을 더듬어 돌아온 길을 찾으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뼛속부터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내 계속해서 전진해야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길을 재촉했다.

저 멀리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곳으로 몸을 이끌었다. 작은 빈터였다. 이내 토르는 그 곳 가장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눈 앞에는 푸른색 공단을 길게 늘어뜨린 의복을 입은 한 남자가 토르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토르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존재였다. 바로 마법사였다. 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당당하게 서 있는 그는 세상을 초월한 듯 매우 고요해 보였다.

토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의복 위에 정교하게 금빛으로 장식된 표식만 보아도 보통 마법사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왕실의 문양이었다. 토르는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왕실 마법사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영원의 순간이 흘러간 듯 느껴졌을 때 마법사는 천천히 뒤를 돌아 토르를 마주했다. 토르는 그를 바로 알아봤다.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왕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인물 중 하나, 수 세기 동안 서부 왕국 선대 왕들의 고문 역할을 해온 왕의 직속 마법사, 아르곤. 무엇 때문에 그가 왕실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다크우드 한가운데 와있는지 헤아릴 방법이 없었다. 토르는 혹시 환영을 보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눈빛이 너를 말해주는구나.”

아르곤은 토르의 눈을 똑바로 주시했다.

고풍스런 저음이 마치 나무들이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크고 투명한 눈은 마치 토르를 투영하는 듯 보였다. 태양을 마주하는 듯한 강렬한 에너지가 마법사에게서 전해졌다.

토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군, 제가 방해가 됐다면 용서하십시오.”

왕의 고문에게 무례를 범하면 구금되거나 처형된다. 토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속에 새긴 불변의 진리였다.

“일어나거라, 얘야. 무릎 꿇길 바랬다면 이미 명령 했겠지.”

토르는 천천히 일어나 마법사를 바라봤다. 아르곤은 토르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이내 멈춰 토르를 주시했고 토르는 이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네 어머니의 눈을 꼭 빼 닮았구나.”

토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나본 적이 없었으며, 아버지 외에 어머니를 아는 사람 또한 만나본 일이 없다. 토르를 낳다 돌아가셨다고 들었고 이로 인해 토르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가족들에게 미움 받는 이유가 어머니의 사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절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전 어머니가 없습니다.”

“진정 그런가?”

아르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머니 없이 아버지 혼자 널 낳았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 오라, 주군, 제 어머니께서는 저를 낳다 돌아가셨습니다.”

“맥클라우드 가의 토르그린. 4형제 중 막내. 선발되지 못한 소년.”

토르는 놀라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르곤 같이 위상이 높은 존재가 자신을 알고 있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을 사람 외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어떻게 모든걸 알고 계시죠?”

아르곤은 미소를 지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토르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머뭇거리던 토르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제 어머니를 아시죠? 뵌 적이 있나요? 어떤 분인가요?”

아르곤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다시 만난다면 그때 질문하거라.”

어안이 벙벙해진 토르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혼돈스럽고 신비로운 만남이었다. 아르곤을 이렇게 떠나 보낼 순 없었기에 토르는 곧장 아르곤을 쫓아갔다.

“이곳엔 왜 오신 거죠?”

토르는 아르곤을 붙잡기 위해 서둘러 뛰었지만, 수천 년 된 상아색 지팡이를 쥔 아르곤의 움직임은 믿을 수 없이 빨랐다.

“저를 기다리셨던 건 아니죠?”

“그럼 누구였겠나?”

아르곤을 따라잡기 위해 빈 터를 뒤로하고 숲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왜 저를요? 제가 여기 올걸 어떻게 아셨죠? 제게 무얼 원하시는 거죠?”

“끝이 없는 질문 세례군. 질문만 가득해. 자넨 오히려 들어야 하는데.”

토르는 빽빽한 숲 사이로 계속해서 쫓아가며 최대한 질문을 자제하려 애썼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왔구나. 고결한 노력이야. 허나 애석하게 시간만 낭비할거야. 양은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토르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떻게 아시죠?”

“네가 절대 헤아릴 수 없는 세상을 알고 있단다, 얘야, 적어도 지금은 네가 알 수 없는 것들 말이다.”

마법사의 뒤를 쫓는 내내 의문만이 가득했다.

“넌 내 충고를 듣지 않겠지. 그게 네 천성이야. 고집불통. 네 어머니처럼. 양을 구하겠다고 계속해서 찾아 돌아다닐게 뻔하구나.”

아르곤에게 속마음을 들킨 토르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넌 거침없는 소년이란다. 의지가 강해. 당당하고 긍정적이야. 그러나 언젠가는 이로 인해 네가 몰락할 수도 있단다.”

토르는 이끼가 가득한 산등성이로 오르는 아르곤을 계속 뒤쫓았다.

“왕의 부대에 선발되고 싶었지.”

“네! 제게 다시 기회가 올까요? 제게 기회를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아르곤은 웃었다. 저음의 공허한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바람에 토르의 등에 한기가 돋았다.

“원하는 데로 할 수야 있지. 허나 네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모두 네가 내리는 선택이 좌우하지.”

토르는 이해하지 못했다.

산마루 꼭대기에 이르러서야 가던 길을 멈춘 아르곤이 토르는 바라봤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한 걸음 남짓이었고 아르곤이 발산하는 기운이 너무 강해 토르를 태워버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네 운명은 비범해. 절대 저버리지 말거라.”

토르는 눈을 크게 떴다. 운명? 비범? 덕분에 온 몸이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이해하기 어려워요. 알 수 없는 말씀뿐이에요. 좀 더 말해주세요.”

아르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토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온 사방을 둘러보고 주위의 소리를 살피며 주변을 뒤졌다. 꿈을 꾼 것인가? 환영을 본 것인가?

돌아서서 숲 속을 살폈다. 산마루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확실히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 멀리서 움직임이 감지됐다. 소리를 들어보니 잃어버린 양이 분명했다.

이끼가 가득한 산등성이를 내려와 숲 속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내려가는 내내 아르곤을 마주친 일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일어난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수 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이런 곳에 왕의 마법사가 찾아온 것인가? 그는 토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마법사가 언급한 토르의 운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수수께끼를 풀려 하면 할수록 궁금증만 증폭됐다. 아르곤은 토르에게 의문만 잔뜩 심어준 채 질문을 삼가라고 경고했다. 걸어갈수록 뭔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무언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날것만 같았다.

방향을 틀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두 발이 굳어버렸다. 예상했던 악몽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머리끝이 쭈뼛 서며 이곳 다크우드에 오기로 한 결정이 어마어마한 실수라는걸 몸소 깨달았다.

토르의 맞은편, 약 서른 걸음 너머로 시볼드가 보였다. 억센 근육과 흉측한 외모, 말과 비슷한 크기에 네 발로 서있는, 다크우드에서 아니 왕국을 통틀어 가장 무시무시한 짐승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은 없었지만 전설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자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그보다 크고, 진한 홍색 빛 가죽에 이글거리는 노란 눈을 품은 짐승. 전설에 따르면, 시볼드의 심홍 빛은 무고한 아이들의 피로 물든 것이었다.

평생 동안 이 짐승을 봤다는 얘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있었다면 믿을 수가 없는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했다. 시볼드와 마주쳐 살아남은 사람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일부는 시볼드가 숲의 신이자 흉조라고 믿었다. 왜 흉조라고 여겼는지 당시의 토르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한걸음 물러섰다.

시볼드의 거대한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고 양쪽 송곳니에선 침이 뚝뚝 흘러나왔다. 노란 눈동자는 토르를 주시하고 있었다. 입에 문 것은 다름 아닌 토르의 양이었다. 울부짖으며 뒤집힌 채로 송곳니에 몸이 박혀있었다. 거의 죽은 상태였다. 양이 죽을 때까지 서서히 괴롭히며 고문을 즐긴 모양새였다.

토르는 양의 비명소리를 견딜 수 없었다. 양은 꼼지락거리긴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토르는 죄책감이 들었다.

처음엔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시볼드의 속도는 무엇보다 빨랐다. 도망가는 건 이 짐승을 자극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양이 저런 식으로 죽어가는걸 가만히 지켜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려움에 온 몸이 굳어버렸지만 뭐든 해야 했다.

반사신경이 작용했다. 천천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멩이 하나를 집어 새총에 끼웠다. 떨리는 손으로 새총을 감아 올려 앞으로 나아가 힘껏 쏘았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돌멩이는 적중했다. 명중이었다. 양의 눈을 적중한 돌멩이는 그대로 뼛속까지 파고들어 뇌를 격파했다.

양은 축 쳐졌다. 죽어버렸다. 목숨을 끊어 더 이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덜어줬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죽어버리자 시볼드는 분노의 눈길로 토르를 노려보았다. 서서히 큼지막한 입을 벌려 양을 바닥에 떨궜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양은 바닥에 팽개쳐졌다. 이제 시볼드의 눈에 들어온 건 토르였다.

시볼드의 복부에서부터 사악하고 깊은 으르렁 소리가 들려왔다.

시볼드가 토르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토르는 떨리는 마음으로 돌멩이 하나를 새총에 끼워 다시 한번 조준했다.

재빠르게 뛰어올라 돌진하는 시볼드는 지금껏 토르가 보아온 그 무엇보다 빨랐다. 토르는 앞으로 발을 디뎠고 제발 명중하길 바라며 돌을 던졌다. 다시 한번 돌을 던질 기회 따윈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토르가 던진 돌은 짐승의 오른쪽 눈에 명중해 눈알을 파열시켰다. 몸짓이 작은 동물을 충분히 굴복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그러나 시볼드는 작은 짐승이 아니었다.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상처에 비명을 질렀지만 계속해서 질주했다. 한쪽 눈 만으로도, 심지어 돌멩이가 눈을 파고 뇌리에 박혀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거뜬하게 토르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토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잠시 후 시볼드는 토르의 몸에 올라탔다. 거대한 발톱을 휘둘러 단숨에 토르의 어깨를 찢었다.

토르는 비명을 질러댔다. 칼날 세 개가 살을 베어내는 것 같았고 단숨에 뜨거운 피가 분출했다.

시볼드는 네 발로 토르를 눌러 바닥에 고정시켰다. 코끼리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마냥 무게가 상당했다. 갈비뼈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시볼드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입을 벌려 송곳니를 드러냈다.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토르의 목덜미를 노렸다.

토르는 다가오는 시볼드의 목을 움켜쥐었다. 딱딱한 근육 덩어리를 쥔 느낌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티기에는 힘이 부쳤다. 토르의 팔엔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한 반면, 시볼드의 송곳니는 점차 가까워졌다. 시볼드의 뜨거운 입김이 토르의 얼굴에 전해졌고 목에는 시볼드의 침이 떨어져있었다. 시볼드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토르의 귓가를 에워쌌다. 죽음을 예견한 순간이었다.

토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신이시여. 부디 제게 힘을 내려주소서. 이 짐승을 물리치게 해주소서. 부탁 드립니다. 이렇게 애원합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번 한번만 신세를 질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순간 무언가가 달라졌다. 엄청난 열이 핏줄을 타고 토르의 몸 속에서 솟구쳤고 마치 에너지 장이 그의 온 몸을 활보하는 것만 같았다. 눈을 떠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르의 손바닥에선 노란빛이 발사되고 있었고 시볼드의 목을 다시 밀어냈을 땐 놀랍게도 짐승과 힘의 세기가 같아져 시볼드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다.

계속된 저항 끝에 결국 시볼드를 밀쳐낼 수 있었다. 힘은 점점 강해졌고 마침내 포탄처럼 강력한 원기가 느껴졌다. 얼마 후 토르는 시볼드를 3미터 밖으로 던져버렸고 시볼드는 등뒤로 나가 떨어졌다.

얼떨떨해진 토르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볼드도 다시 일어섰고 격분한 채 토르를 향해 돌진했다. 토르는 달라진 무언가를 느꼈다. 그의 몸 안에 흐르는 힘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자신을 느꼈다.

시볼드는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그 틈에 토르는 몸을 낮춰 시볼드의 복부를 움켜쥐고 세차게 던졌다. 날아가는 짐승을 보며 알아서 나가 떨어지도록 내버려뒀다.

시볼드는 숲 속으로 날아가 나무에 세게 부딪힌 뒤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지켜보던 토르는 놀라웠다. 방금 전 던져버린 게 진정 시볼드였던가?

시볼드는 눈을 두 번 깜빡인 뒤 토르를 쳐다봤다. 이내 다시 일어나 토르에게 돌진했다.

시볼드가 토르를 덮쳤고 토르는 시볼드의 목을 잡았다. 땅 위에서 뒹굴다 시볼드가 토르 위를 올라탔다. 토르는 다시 몸을 굴려 시볼드 위에 올라탔다. 토르는 양손으로 몸을 위로 일으켜 송곳니로 공격을 시도하는 시볼드의 목을 졸랐다. 그 순간 새로운 힘이 솟구쳤고 더욱 손을 꽉 쥐어 시볼드를 제압했다. 온몸으로 힘을 퍼트리자, 이내 놀랍게도 토르는 시볼드보다 힘이 강해져 있었다.

시볼드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목을 졸랐고 마침내 시볼드가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약 일분가량 시볼드의 숨통을 놓을 수 없었다.

토르는 가쁜 숨을 쉬었다. 놀란 눈으로 땅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상처 입은 팔을 감싸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진정 토르가 시볼드를 죽였단 말인가?

수 많은 날들 중에서도 바로 오늘, 토르는 무언의 징조를 느꼈다. 방금 전 무언가 중대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왕국에서 가장 악명 높고 무시무시한 시볼드를 이제 막 그의 손으로 제압한 후였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었고 무기도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자신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게 무얼 뜻하고, 자신은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록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이런 힘을 가진 존재는 오직 마법사들뿐이었다. 그러나 토르의 부모들 중 그 누구도 마법사가 아니었다. 때문에 토르도 마법사일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그가 마법사일 수 있을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아르곤이 죽은 시볼드를 내려보며 서 있었다.

“이곳엔 어떻게 오신 거죠?”

아르곤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 보신 건가요?”

토르는 아르곤과의 만남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어요.”

“넌 잘 알고 있단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식하고 있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그건……갑자기 솟구친 힘이었어요. 저도 모르던 그런 기운이요.”

“에너지 장이란다. 어느 날 모든걸 깨닫게 될 거다. 아마 조정하는 방법도 터득하겠지.”

토르는 어깨를 꽉 움켜 쥐었다. 극심한 통증에 고개를 숙여 손을 보니 피가 흥건했다. 지금 당장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찔했다.

아르곤은 세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어 잡은 토르의 반대편 손을 상처 위에 올렸다. 그대로 손은 얹은 뒤 몸을 뒤로 젖히고 두 눈을 감았다.

상처 입은 팔에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몇 초 뒤, 손위로 흐르던 피가 멈췄고 상처의 고통도 사라졌다.

어깨를 내려다본 토르는 의아했다. 몸이 치유되고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시볼드의 발톱에 긁혀 생긴 세 줄의 흉터뿐이었다. 그것마저도 이미 며칠 전 치료된 흉터처럼 살점이 서로 잘 붙어있었다. 더 이상 피도 흐르지 않았다.

경악한 토르는 아르곤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신 거죠?”

아르곤이 미소 지었다.

“내가 한 게 아니란다, 네가 했지. 난 그저 네 힘을 인도했을 뿐이야.”

“제겐 그런 치유의 능력이 없어요.”

토르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진정 없는가?”

“이해할 수 없어요. 이 모든 게 이해되질 않아요. 부탁이에요, 말씀해주세요.”

토르는 점점 더 초조해지는 자신을 자제할 수 없어 아르곤을 재촉했다..

아르곤은 외면할 뿐이었다.

“세월을 보내며 차차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지.”

토르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 말씀은 제가 왕의 부대에 선발될 수 있다는 건가요?”

토르의 어조는 몹시 흥분돼 있었다.

“그렇죠, 시볼드도 제압했으니 저도 이제 다른 선발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요.”

“물로 그렇고말고.”

“그렇지만 선발 된 건 제 형들이에요. 제가 아니라고요.”

토르는 다시 아르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실버는 이미 한번 저를 거절했어요. 어떻게 해야 제가 선발될 수 있죠?”

“언제부터 전사가 누군가의 초대를 기다리게 된 거지?”

아르곤의 대답이 토르의 가슴 깊이 전해졌다. 덕분에 토르의 몸에 활기가 돋았다.

“그럼 제가 언제든 찾아가도 되는 건가요? 허락 없이도?”

아르곤은 미소 지었다.

“네 운명은 스스로만 좌우할 수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토르가 눈을 깜빡이던 그 순간 아르곤은 또다시 자취를 감췄다.

토르는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이쪽이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눈 앞에 큰 바위가 보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따라 토르는 바위를 올라타 위로 향했다.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갔지만 여전히 아르곤이 보이지 않아 토르는 의아했다.

그곳에서 보니 다크우드 나무들의 뾰족한 윗부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다크우드가 끝나는 지점도 보였고, 두 번째 태양이 짙은 녹색빛으로 저무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왕실로 가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저 길에 오르려무나, 그럴만한 용기가 있다면.”

주위를 살펴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울려대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토르는 분명 아르곤이 주변 어딘가에서 그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아르곤의 말에 동조했다.

토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위 밑으로 내려가 저 멀리 있는 길을 찾아 숲 길을 헤쳐나갔다.

그리고는 운명을 찾아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제 3장

맥길 왕의 성품은 완고했다. 이를 보여주듯 왕의 어깨는 두툼하고 떡 벌어져 있었다. 풍성하게 얼굴을 덮은 잿빛 수염은 왕의 긴 머리카락 같은 색을 띠었고 넓은 이마에는 고뇌의 주름이 가득했다. 왕은 왕실 성벽에 서서 점점 완성 되가는 축제준비를 내려다봤고 왕비가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발 밑으로 펼쳐진 영광스런 맥길 왕의 영토는 시야를 따라 보이지 않는 곳까지 뻗어 나갔고 번성한 도시의 외곽은 고대 돌로 만든 요새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왕궁은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수 많은 거리와 서로 연결돼 있었다. 거리에는 갖가지 석조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각 건물은 전사, 관리인, 말, 실버, 왕의 부대, 친위병, 병사, 무기, 병기 등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다. 이 외에도 도시의 성벽 내에 살기를 희망하는 그의 수백 명 백성들이 거리 위에 석조건물로 주거지를 이뤘다. 거리 사이마다 4천 평이 넘는 잔디밭이 펼쳐졌고 그 위로 왕실 정원과 석조광장, 넘치는 분수가 가득했다. 왕실은 수세기 동안 번성해왔다. 맥길 왕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 또 그의 아버지 때부터. 그리고 지금은 그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곳이야말로 링 대륙의 서부왕국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였다.

맥길 왕의 전사들은 지금껏 어느 왕도 누리지 못했던 최고의 기량과 충성심을 자랑했다. 게다가 맥길 왕의 집권 이후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왕국에 침범하지 못했다. 일곱 번째 왕위 계승자 맥길 왕 7세는 32년간 왕국을 통치하며 이롭고 어진 왕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그의 군림 하에 영토는 번성했고 군대의 규모도 두 배로 성장했다. 도시는 번영했고 백성들의 마음엔 인심이 넘쳐났다. 왕에게 불만을 가진 백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맥길 왕은 선대 왕들과 비교해 가장 자비로웠고 그가 왕권을 쥔 이후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평화로워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맥길 왕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은 그의 업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까지 오랜 기간 동안 전쟁 없이 나라를 다스린 적이 없다는 것을. 왕은 머지않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감했다. 그러나 정작 그게 언제이고, 또 누가 침범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가장 큰 위협은 링 대륙 너머에 있었다. 바로 범주 밖의 야만생명체를 다스리고 링 대륙을 에워싸는 협곡 너머의 테두리 땅에서 협곡 밖의 모든 인간을 굴복시킨 미개의 왕국, 와일즈. 지금까지 이어진 맥길 왕족의 집권 동안 야만생명체의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 이는 완벽한 원형을 이루는 캐니언 협곡 안에 위치한 왕국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이었다. 두께만 2000미터가 넘는 협곡 덕분에 왕국은 다른 세계로부터 자유로웠다. 뿐만 아니라 초대 맥길 왕 1세가 왕권을 손에 쥐기 시작한 이후부터 왕국의 에너지 장이 활성화되어 원형의 캐니언 협곡에 보호막을 생성했고 덕분에 선대 왕들에겐 야만생명체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야만생명체들이 침입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수 차례 에너지 장을 뚫고 드넓은 캐니언 협곡을 넘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협곡이 에워싸는 링 대륙 안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외부의 위협은 문제될게 없었다.

그렇다고 대륙 내부에 아무런 위험도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덕분에 맥길 왕은 밤새 뜬눈으로 근심에 사로잡혔다. 오늘 열리는 첫째 공주의 결혼식 축제 또한 참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링 대륙 안에서 서부 왕국과 대립하고 있는 적국, 동부 왕국과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계획된 결혼식이었다.

양국은 링 대륙의 중앙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하이랜드 산맥을 기점으로 각각 무려 800킬로미터가 넘는 대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이랜드 너머에 위치한 동부 왕국이 링 대륙의 나머지 절반을 통치했다. 동부 왕국은 맥길 왕가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맥클라우드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고 맥클라우드 왕가는 늘 맥길 왕가와 맺은 허술한 평화조약을 깨고 싶어했다. 맥클라우드 왕가는 자신들의 영토가 덜 비옥하다는 생각에 끝없이 불만을 품고 만족하지 못했다. 하이랜드 산맥을 두고도 다툼을 벌였다. 산맥 절반이 맥길 왕가의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산맥 전체가 맥클라우드 왕가의 통치하에 있다고 주장했다. 산맥의 경계에서는 끊임없는 접전이 벌어졌고 지속적인 침략의 위협이 가해졌다.

맥길 왕은 이 모든걸 심사숙고 했기에 늘 골치가 아팠다. 서부왕국도 링 대륙 안에서는 캐니언 협곡의 보호를 받아 안전이 보장됐다. 더군다나 협곡의 테두리 안에는 비옥한 토지가 가득했고 다른 위험 요소가 없었다. 왜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만족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맥길 왕의 군대가 전례 없이 막강해졌고 이에 맥클라우드 왕은 감히 전쟁을 벌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맥길 왕은 앞으로 무언가가 곧 일어날것이라는걸 짐작했다. 이 평화도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맥길 왕은 직접 나서 자신의 첫째 공주와 맥클라우드 왕의 첫째 왕자와의 혼례를 주선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이들의 결혼식이었다.

맥길 왕은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저 멀리서 밝은 의복을 입은 수 천명의 시중들이 양쪽 국가에서부터 왕궁 곳곳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광경이 보였다. 링 대륙 안의 모든 사람들이 왕의 요새로 쏟아져 나오는 듯 했다. 왕의 시중들은 몇 달 동안이나 결혼식 준비에 매달려 최대한 모든 것이 번영하고 강해 보이도록 노력했다. 단순한 결혼식이 아니라 맥클라우드 왕가에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맥길 왕은 도로 위 성벽을 따라 전략적으로 배치된 수백 명의 군사들을 살펴봤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군사를 배치시켰고 이에 만족했다. 맥길 왕이 자랑할만한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근심이 앞섰다.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고 사소한 시비가 번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어느 한쪽에서든 술에 취해 격해진 마음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않길 기원했다.

그는 경기장 속 마상장으로 시선을 옮겨 곧 있을 각종 경기와 마상 시합 축제가 한창일 모습을 상상해봤다. 매우 치열한 경기가 될 예정이었다. 맥클라우드 왕은 물론 많은 선수들을 대동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마상 시합과 겨루기 및 경기의 승패에는 엄청난 의미가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약간만 어긋나도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다분했다.

“폐하?”

손끝에서 따스함이 느껴져 돌아보니 왕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왕비 크레아가 있었다. 왕비는 맥길 왕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며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고 지금껏 한번도 왕에게 불평을 해본 일이 없었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의논 상대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맥길 왕은 자신의 왕비가 그 누구보다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자신보다도 말이다.

“오늘은 정치적인 날이에요. 허나 우리 딸의 혼인날이기도 하지요. 생애 한번뿐인 날이에요,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세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을 땐 오히려 걱정이 없었소. 지금은 모든걸 다 가졌고 덕분에 근심만 넘쳐나오. 우리는 안전하지만 내 마음은 불안하오.”

왕비는 크고 자비로운 담갈색 두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두 눈은 마치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담긴 듯 보였다. 두 눈꺼풀은 언제나 아래로 살짝 늘어져 있었다. 아주 조금 생기가 없는 듯 보였지만 탐스럽게 양쪽 얼굴을 감싸며 곧게 늘어진 왕비의 갈색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약간의 흰머리가 보였고 주름이 조금 있었지만 여전히 한창때 모습 그대로 아름다웠다.

“그건 바로 우리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요. 그 어떤 왕도 안전하지 않아요. 폐하께서 상상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첩자들이 성안에 있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왕비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왕에게 입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오늘을 만끽하세요. 우리 딸의 혼례 날이잖아요.”

말을 남기고 왕비는 성벽을 뒤로한 채 자리를 떠났다.

왕은 왕비가 떠나는 걸 지켜본 뒤 고개를 돌려 왕실을 바라봤다. 왕비가 옳았다. 늘 그녀가 옳았다. 왕은 오늘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오늘은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첫째 공주의 혼례 날이었다. 오늘은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여름이 도래하기 전 봄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날이었고, 두 개의 태양 모두 하늘 위를 아름답게 장식했으며 축제의 번잡함도 없었다.

모든 것이 만발했다. 곳곳의 나무들은 분홍빛, 보랏빛, 주황빛, 흰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왕은 당장 내려가 백성들과 함께 딸의 혼례를 축하하고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술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성 밖을 나가려면 끝없이 이어지는 정무를 다 처리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공주의 혼례 당일에는 왕에게도 의무가 주어졌다. 왕은 자문단과의 집회에 참석해야 했고, 자식들의 공식 알현에 응해야 했으며 왕의 알현이 정식으로 허락되는 이날만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선 수많은 탄원자들을 한 명 한 명 만나야 했다. 운이 좋다면 일몰행사 전에 정무를 마치고 왕실 밖을 나설 수 있을 지도 몰랐다.

*

맥길 왕은 자주색 하의에 금장 허리띠를 두르고 최상의 비단으로 지은 자색과 황금빛의 예복을 걸쳤다. 장막은 순백색이었고 반짝이는 가죽 부츠는 종아리까지 위엄을 더했다. 화려한 금테 한가운데 큼지막한 루비가 빛나는 왕관을 쓰고 뒤로는 시중들을 대동한 채 연회실로 활보했다. 왕은 성큼성큼 걸어 하나의 공간을 지나 다음 공간으로 또 다음 공간으로 이동했고 난간에서부터 궁실로, 다시 고대 양식의 색유리로 하늘 높이까지 장식한 아치형의 복도를 지났다. 마침내 그는 고풍스런 참나무로 만든 문 앞에 이르렀다. 왕이 당도하자 시중들이 앞으로 나서 나무만큼 큰 두께를 자랑하는 문을 열었다. 공식 알현실이었다.

맥길 왕이 입장하자 시중들이 정자세로 그를 맞이했고 왕의 뒤로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앉거라.”

왕은 평소보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노곤했다. 특히 오늘같이 끝없는 공식 정무를 돌봐야 할 때는 더욱 그러했다. 빨리 처리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왕은 공식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늘 그가 흡족해하는 곳이었다. 천장은 150미터 높이에 이르렀고 한쪽 벽면은 고대 양식의 색유리로 장식됐다. 바닥과 벽면은 30센티가 넘는 두께의 돌로 마감됐다. 백 명 정도의 고관들을 수용해도 끄덕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같이 자문단이 소집된 날엔 단지 왕과 그의 자문단 만이 휑하게 이곳을 채울 뿐이었다. 방을 차지한 건 크기가 어마어마한 반원형 테이블이었고 그 뒤로 자문단이 서 있었다.

입구를 지나 알현실 한가운데를 거쳐 왕좌로 향했다. 왕은 돌계단을 오르고 좌우로 놓인 황금 사자조각을 지나 황금으로 만든 왕좌를 장식한 붉은색 벨벳 쿠션 위에 자리했다. 왕의 선왕과 그 왕의 선왕을 포함해 맥길 왕가의 모든 왕들이 이 자리를 거쳤다. 맥길 왕은 착석하며 선왕들의 중압감을 느꼈다.

왕은 모든 자문단이 참석했는지 살폈다. 명장이자 총 사령 고문관인 브롬, 왕의 부대 사령관 콜크, 가장 연장자인 학자 겸 사학자에 무려 3대 선왕들의 고문관을 지닌 아버톨, 마르고 작은 체구에 머리는 희고 눈은 초점 없이 흔들리는 왕실 내무총관 펄스. 왕은 펄스를 불신했고 내무총관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펄스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 모두 왕실 내무총관을 수행했기에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펄스를 이 자리에 앉혔다. 왕의 재무관 오웬, 외무총관 브레데이, 세무총관 어난, 대중 고문관 두웨인, 귀족 대표 켈빈.

두말할 것도 없이 왕은 절대 권한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왕국은 자유주의를 추구했고 선대 왕들 또한 모든 정무에 대표단을 대동시켜 그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으로 왕권과 귀족 사이에 놓인 불안한 권력 줄다리기 역할을 했다. 지금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지만 이전에는 귀족과 왕권 사이에 엄청난 권력투쟁이 오갔다. 덕분에 서로가 성장하는 계기가 갖춰졌다.

맥길 왕은 한 명의 불참자를 확인했다. 바로 왕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던 인물, 아르곤이었다. 아르곤의 참석여부는 언제나 미지수였다. 이에 맥길 왕은 격분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엔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왕에게 마법사들이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르곤의 불참에 맥길 왕은 더욱 조급해졌다. 결혼식이 진행되기 전에 눈 앞에 산처럼 쌓인 모든 정무를 빨리 처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문단들은 반원형 탁자에 둘러 앉아 왕을 알현했다. 서로간 약 3미터씩 거리를 두었고 모두 정교하게 조각된 팔걸이가 마련된 고풍스런 참나무 의자에 앉아있었다.

“폐하, 말씀을 허락해 주시지요.”

오웬이 청을 올렸다.

“말하거라. 간략하게. 시간이 없구나.”

“공주님께서는 진귀한 진상 품을 가득 받으실 겁니다, 저희 모두 금고가 가득 차도록 많이 받으시길 염원하고요. 수 천명의 백성들이 찬사를 보내고 개인적으로 진상 품을 올릴 것입니다. 상점과 주점이 백성들로 가득하고 이 덕에 저희들의 금고도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축제를 마련하느라 왕실의 재력이 대폭 감소했습니다. 백성들과 귀족들의 세금을 좀 더 걷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특별 세금을 물려 식을 치르느라 입은 손실을 만회하시길 청하옵니다.”

맥길 왕은 재무총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근심을 읽었다. 감소한 재정을 생각하니 왕의 배가 힘없이 꺼졌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세금부담은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재물이 적은 채로 민심을 살피는 게 바람직하지 않소. 백성들의 행복이 우리의 재물이오. 더 이상의 증세는 없을 것이오.”

“그러나 폐하, 이제 더 이상……”

“이미 결정을 내렸소. 다른 안건은 무엇이오?”

오웬은 침울함에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폐하.”

브롬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오늘 행사를 위해 병력을 총 동원 했습니다. 저희의 군사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전투력이 이곳에 집중돼, 만일 왕국 외부에서 침입이 일어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적들에게 축제의 만찬을 제공하는 한 공격은 없을 것이오.”

브롬은 웃었다.

“하이랜드 산지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소?”

“몇 주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동부왕국은 모든 병력을 혼례 준비에 사용한 것 같습니다. 어쩜 이미 평화로운 관계를 준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맥길 왕은 수긍하기 힘들었다.

“혼례를 주선한 게 효과가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거겠지. 자네 생각도 그러하지?”

맥길 왕은 아버톨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버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하는 순간 목소리가 갈라졌다.

“폐하, 폐하의 선왕, 그리고 선왕의 선왕께서도 맥클라우드 왕가를 신뢰하지 못하셨습니다. 단지 지금 몸을 낮추고 있다 해서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는 장담드릴 수 없습니다.”

맥길 왕은 그의 의견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부대는 어떻게 되어가나?”

왕은 콜크에게 물었다.

“오늘 신병들 환영 식을 열었습니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콜크가 대답했다.

“왕자도 포함됐소?”

“왕자님께서도 선발되셨고 모두에게 귀감이 되고 계십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인 뒤 브레데이에게 말을 건넸다.

“협곡 너머는 상황이 어떻소?”

“폐하, 순찰병에 따르면 최근 몇 주간 협곡 안으로 진입하려는 횟수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아마 야만생물체가 침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징조가 아닌듯싶습니다.”

자문단들 사이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맥길 왕의 복부가 긴장으로 조여 들었다. 에너지 장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러리라는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총력을 다해 침입한다면 어찌되는가?”

“보호막이 활성화되어 있는 한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야만생물체는 지금껏 수세기 동안 한번도 협곡을 뚫은 적이 없습니다. 침입걱정은 놓으셔도 됩니다.”

맥길 왕은 확신할 수 없었다. 외부의 침입은 이미 예정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이 언제 일어날지는 알 수 없었다.

펄스의 콧소리가 들렸다.

“제가 한 말씀 거들자면, 왕실은 이미 맥클라우드 왕국에서 보낸 고관들로 꽉 찼습니다. 적국의 고관들이긴 하나 만약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오히려 폐하를 웃음거리로 삼을 겁니다. 오늘 저녁은 그들을 알현하심이 어떠신지요? 그들은 수많은 수행자를 대동하고 찾아왔습니다. 진상 품을 가장한 염탐꾼들을 데리고요.”

“그 염탐꾼이 이 자리엔 없을 거라 그 누가 장담하오?”

펄스를 바라보는 왕의 마음속엔 혹시 그가 염탐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품어져 있었다.

펄스는 왕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순간 맥길 왕은 한숨을 내 뱉고 팔을 저었다.

“오늘 정무가 이게 끝이라면 짐은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겠소.”

“폐하.”

캘빈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정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첫째 공주님의 혼례 일에 대대로 전해지는 의식을 행하셔야 합니다. 모든 선왕께서는 이날 후계자를 임명하셨습니다. 백성들도 폐하께서 후계자를 임명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궁금해합니다. 그들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더군다나 운명의 검이 여전히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짐이 이렇게 건재한데 후계자를 임명하라고 했소?”

“폐하,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캘빈이 겁에 질려 잔뜩 떨었다.

왕은 고개를 들었다.

“짐도 전통을 잘 알고 있소. 그리고 실은 짐도 오늘 후계자를 선택하려 했소.”

“그렇다면 어느 분을 임명하시려고 하셨습니까?”

펄스가 궁금함을 드러냈다.

심기가 불편해진 왕은 그를 내려다 봤다. 펄스는 뒷말이 많은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왕은 펄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오.”

왕이 일어서자 일제히 모든 신하가 따라 일어섰다. 왕에게 예의를 차린 뒤 서둘러 뒤돌아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한 채 맥길 왕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런 날엔 자신도 왕이 아닌 평범한 백성 이길 바랬다.

*

왕좌에서 내려와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알현실을 가로질렀다. 왕은 직접 고풍의 참나무 문을 열었다. 다시 강철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열고 옆 방에 들어갔다.

맥길 왕은 이곳의 아늑한 공간이 선사하는 평화로움과 고독함을 늘 즐겼다. 아치형의 천장은 높게 뻗어 있었지만 방은 채 스무 걸음도 안될 만큼 작았다. 마감이 전부 돌로 되어있고 한쪽 벽면에 아주 작은 색유리 창문이 나있었다. 노랗고 붉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아무 장식도 없는 방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운명의 검.

운명의 검이 바로 이방에 있었다. 방 한가운데 철로 만든 갈래 위에 수직으로 마치 마음을 현혹하는 요부마냥 누워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그래왔듯이 왕은 검으로 다가가 주위를 돌며 유심히 살폈다. 운명의 검. 힘의 근원지이자 맥길 왕가의 세대를 내려오며 왕국을 지탱해주는 힘의 원천, 전설의 검. 그 누구든 이 검을 들어올릴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선택된 자였다. 선택된 자만이 일평생 왕국을 다스리고 링 대륙 안팎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들어온 아름다운 전설이었다. 오직 맥길 왕가의 왕이 되어야만 검을 뽑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맥길 왕도 왕좌에 오르자마자 즉시 이 검을 뽑는 시도를 단행했다. 선대 왕들 모두 검을 뽑는데 실패했지만 자신은 다를 거라 믿었다. 왕은 자신이 선택된 자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선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맥길 왕도 실패했고 이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왕업에 큰 타격을 느꼈다.

운명의 검을 주시했다. 그 누구도 무엇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신비한 금속으로 이뤄진 긴 칼날을 살폈다. 검의 기원은 더욱 모호했다. 지진 한가운데서 솟아올랐다는 설도 전해졌다.

검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실패의 아픔이 느껴졌다. 맥길 왕은 어진 왕이긴 하나 선택된 자는 아니었다. 백성들을 비롯한 그의 적들까지 알고 있었다. 그가 좋은 왕이긴 하나 무슨 수를 써도 절대 선택된 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만약 그가 선택된 자라면, 아마 왕실 내에 구금과 음모는 덜 했을 거라 확신했다. 백성들은 그를 더욱 절대적으로 지지했을 테고 적들도 감히 꿈에라도 침략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맥길 왕의 마음 한 켠에선 운명의 검이 전설과 함께 아예 사라져버리길 바랬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바로 그 것이 운명의 검에 얽힌 저주였고 또 힘의 근원이었다. 그 어떤 군대보다 강력한 힘이었다.

그 동안 셀 수 없이 여러 번 검을 살펴봤고 그럴수록 선택 받은 자가 과연 누구일지 궁금했다. 맥길 왕가의 후계 중 과연 누군가가 검을 뽑아들 운명을 얻게 될까? 왕은 눈 앞에 놓인 과업을 생각했다. 후계를 정해야 했지만 자식들 중에 혹 선택된 자가 있다 해도 정령 그게 어느 자식일지 알 수 없었다.

“칼 날의 무게가 상상 그 이상이죠.”

작은 방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생각에 놀란 왕이 돌아봤다.

문가에 서있는 건 아르곤이었다. 왕은 이미 목소리를 듣고 그가 누군지 짐작했고, 그의 불참이 다시 한번 상기되며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론 그의 등장이 반가웠다.

“늦었군.”

“폐하의 시간으론 그렇죠.”

“짐이 이 검을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보긴 했는가? 짐이 왕위 계승을 하던 날 말이오.”

“아니요.”

아르곤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맥길이 뒤를 돌아 그를 바라봤다.

“짐이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걸 자네는 알고 있었지. 처음부터 알고 있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왕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네의 직언이 상처가 되는군. 자네답지 않네.”

아르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왕은 더 이상 아르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짐은 오늘 후계를 발표하오. 이런 날 후계를 정하다니 공허할 뿐이요. 자식을 결혼시키는 즐거운 날, 왕의 기쁨을 앗아가 버리는 것과 같소.”

“어떤 기쁨은 그렇게 완급 되기도 하지요.”

“허나 짐은 아직 정정하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왕은 실눈을 뜨며 생각에 잠겼다. 짐에게 전하는 메시지인가?

그러나 아르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식 여섯 중 누굴 골라야 하겠소?”

“왜 제게 여쭈십니까? 이미 정해 두신걸 알고 있습니다.”

왕은 그와 시선을 맞췄다.

“많은걸 알고 있군. 이미 정했소. 그러나 자네 생각이 궁금하군.”

“현명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세요. 땅 속에 묻힌 왕은 더 이상 통치할 수 없죠. 폐하께서 누구를 선택하시든 운명은 아랑곳 않고 제 길을 찾아 가지요.”

“내가 계속 살 수 있겠소, 아르곤?”

맥길 왕이 솔직하게 물었다. 끔직한 악몽을 꾸고 난 뒤부터 쭉 아르곤에게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어젯밤 꿈에서 까마귀를 봤소. 짐에게 날아와 왕관을 뺏어갔소. 곧 다른 까마귀가 날 물고 갔지. 발 밑으로 왕국이 보였고 황무지의 땅, 바렌으로 향하는 짐의 몸이 검게 변했소.”

왕은 촉촉해진 두 눈으로 아르곤을 바라봤다.

“단순한 꿈이오? 아니면 무언가가 더 있소?”

“꿈은 늘 꿈 이상의 것을 말해주지 않던가요, 그렇지 않나요?”

왕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위협은 어디에 도사리고 있는가? 그것만이라도 말해주게.”

아르곤은 가까이 다가가 강렬하게 왕의 눈을 주시했다. 왕의 눈엔 그가 마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 보였다.

아르곤은 몸을 숙여 속삭였다.

“언제나 생각한 것 보다 가까이에 있지요.”

제 4장

토르는 거칠게 시골길을 달리는 마차 뒤편 짚 더미에 숨어 있었다. 어젯밤이 다 되어서야 당도한 길에 줄곧 머무르며 숨어서 타고 갈만한 넉넉한 크기의 마차가 지나가길 침착하게 기다렸다.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천천히 달려오는 커다란 마차가 하나 보였고 토르는 그제서야 힘껏 뛰어 마차에 올랐다. 뛰어오른 마차의 짐칸엔 건초더미가 가득했고 토르는 그 속으로 몸을 묻었다. 운 좋게도 마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토르가 오른 마차가 왕실로 가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이 정도 규모와 마차의 문양을 감안하면 왕실 외에 다른 곳으로 갈 확률은 희박했다.

밤새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뜬 눈으로 지새우며 오늘 대면한 일을 회상했다. 시볼드, 아르곤, 주어진 운명, 진짜 집, 어머니. 마치 우주로부터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 또 다른 소명이 주어졌다는 메시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머리 위로 두 손을 깍지 끼고 누워, 해진 천막 틈으로 하늘을 올려다 봤다. 밤 하늘 위를 붉은 별들이 밝게 수놓고 있었다. 기분이 한껏 들떴다. 생애 처음으로 오른 여정이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이미 몸은 마차에 실려 있었다. 어떻게든 목적지는 왕실이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아침이 밝아 있었다. 빛이 환하게 쏟아졌고, 깨고 나서야 깜빡 잠이 든걸 알았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고 졸음을 못이긴 자신을 꾸짖었다. 좀 더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 했다. 들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달리는 마차의 덜컹거림이 줄어들었다. 어느덧 평평해진 길 덕분이었다. 토르는 고개를 숙여 길이 얼마나 잘 다듬어졌는지 직접 확인했다. 돌멩이나 도랑 하나가 없었다. 반질반질한 조개 껍데기로 이어 만든 길이었다. 길을 보아하니 마차의 목적지가 왕궁인 게 틀림없었다.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마차 밖으로 살펴본 광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세상의 모든 물건들을 실은 듯한 온갖 종류의 수레들이 거리를 빼곡히 메웠다. 한 수레에는 모피가 다른 수레에는 양탄자가 또 다른 수레에는 닭이 한 가득 실려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수백 명의 상인들 중 일부는 왕실로 향했고 그 중 일부는 양 손 가득 물건이 가득 쌓인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길다란 막대기에 잔뜩 매단 비단 꾸러미를 사내 넷이서 나란히 이고 옮겼다. 엄청난 인파였고 모두 같은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생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물건들과 다양한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사는 동안 자그마한 시골마을을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토르가 있는 곳은 다름아닌 어마어마한 인파의 중심부였다.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쇠사슬이 요란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크기의 목조교량이 밑으로 내려오며 땅이 진동했다. 잠시 후 마차를 이끄는 말들이 나무 위를 지나가며 딸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냈다. 밑을 내려다 보니 말들이 지나는 건 목조교량이었다. 말로만 듣던 도개교였다.

고개를 밖으로 쭉 빼고 거대한 돌기둥과 쇠못이 박힌 철문을 올려다봤다. 마차는 왕실의 성문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지금껏 보아온 모든 문을 통틀어 크기가 가장 컸다. 토르는 철문에 난 못을 살폈다. 철문이 내려오면 토르를 반으로 가르고도 남을 정도였다. 경이로웠다. 성문 입구에서 엄호중인 네 명의 실버 대원이 보이자 심장이 더욱 두근거렸다.

마차는 다시 길고 긴 석조터널을 지났고 터널이 끝나고 나서야 머리 위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왕궁 내부였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왕궁 안은 더욱 활기가 넘쳤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보이는 곳마다 무리를 지어 서성거렸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잔디밭이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주변은 온통 만발한 꽃들로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 그 어느 곳보다 드넓은 길이 펼쳐져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상점과 노점 및 석조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건 멋지게 갑옷을 차려 입은 실버였다. 꿈꿔왔던 왕궁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토르는 흥분에 못 이겨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순간 마차가 멈췄고 그 바람에 토르는 중심을 잃고 뒤로 몸이 젖혀져 덤불 위로 넘어졌다. 몸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나무걸쇠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눈앞에 화가 잔뜩 난 넝마 차림의 늙은 사내가 나타났다. 마부는 짐칸으로 들어와 앙상한 손으로 토르의 발목을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거의 날다시피 바닥에 내팽개쳐진 토르의 꼬꾸라진 등 뒤로 흙먼지가 일어났다.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또 내 마차에 타면 쇠고랑을 차게 될 줄 알아! 내가 지금 실버를 호출하지 않는걸 천만다행으로 여기라고!”

마부는 뒤로 돌아 침을 뱉고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 말을 채찍질했다.

창피해진 토르는 천천히 신발을 주워 신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행인 한 두 명이 걸음을 멈추고 킥킥대고 있었다. 그들이 시선을 돌릴 때까지 토르도 똑같이 그들을 비웃었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팔을 문질렀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니 다시 기분이 밝아졌다. 현란한 광경에 눈이 부셨고 마침내 왕궁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게다가 마차 안에서보다 훨씬 자유롭게 왕궁을 구경할 수 있었다. 끝도 없이 시선을 타고 펼쳐지는 왕궁의 모습은 가히 경이로웠다. 중심부에는 으리으리한 석조 궁전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변은 요새처럼 우뚝 솟은 석조성벽이 에워싸고 있었다. 성벽 위 곳곳에서는 근위대가 근무를 서고 있었다. 정성스레 손질된 푸른 들판들이 이곳 저곳 드리워져 있었고 나무 숲과 다수의 석조 광장 및 분수들이 그곳을 조화롭게 꾸미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도시였다. 그리고 이 도시란 곳엔 인파가 넘쳐났다.

온 사방이 상인들, 병사들, 고위 인사들 등 다양한 출신들로 북적거렸고 모두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움직였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뭔가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행사가 마련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의자가 놓이고 제단이 세워졌다. 결혼식 준비 같았다.

저 멀리 마상 경기장 안으로 도로와 경계선이 보이자 토르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다른 구장에서는 병사들이 먼 거리의 목표물을 향해 창을 던지고 있었고, 또 다른 구장에서는 궁수들이 짚으로 만든 목표물을 조준하고 있었다. 사방이 경기와 시합으로 가득했다. 음악소리도 들려왔다. 연주자들이 가득했고, 류트, 플루트, 심벌즈의 선율이 울렸다. 와인과 초대형 케이크, 식사가 옮겨졌고 탁자가 세워졌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에서 연회준비가 한창이었다. 장대한 축제의 한복판에 이제 막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황홀함을 느낄수록 왕의 부대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이 토르를 보챘다. 이미 늦긴 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진가를 알리고 싶었다.

토르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늙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핏물이 베인 옷차림을 보아하니 정육점 주인 같았는데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시간에 쫓기는 모양새였다.

“실례합니다.”

토르가 남자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무슨 일이지, 얘야?”

“왕의 부대를 찾고 있어요. 혹시 그 훈련장이 어딘지 아세요?”

“내가 지도로 보이냐?”

남자는 토르에게 면박만 주고 급하게 가던 길을 재촉했다.

무례함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둘러 다른 사람에게 갔다. 긴 탁자 위에서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는 소녀였다. 탁자 위로 소녀 여러 명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적어도 한 명은 길을 알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왕의 부대 훈련소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킥킥거렸다. 그 중 몇 명은 토르보다 서너 살 나이가 많아 보였다.

가장 나이 많은 소녀가 토르를 쳐다봤다.

“장소를 잘못 찾아왔어. 우린 지금 축제 준비 중이야.”

“그렇지만 왕의 부대는 왕궁 안에서 훈련 받는다고 하던데요?”

토르는 혼란스러웠다.

이들은 다시 한번 싱긋 웃어댔다. 소녀는 허리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생전 처음 왕궁에 와본 사람 같이 굴고 있잖아. 여기가 얼마나 큰지 모른단 말이니?”

토르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들은 하나 둘씩 웃어대다 결국 다 함께 박장대소했다. 놀림 당한 마음에 기분이 언짢았다.

눈 앞엔 열두 갈래의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굽이굽이 난 길은 모두 왕궁을 가로질렀다. 돌로 된 담벼락 사이마다 적어도 12개 이상의 출입문이 들어서 있었다. 왕궁의 크기와 규모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몇 날 며칠을 찾아도 훈련장을 못 찾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순간 묘안이 떠올랐다. 병사들이라면 누구나 훈련장 위치를 알고 있었다. 병사에게 말을 거는 건 긴장됐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다.

뒤돌아 성벽으로 달렸다. 출입구 가장 가까이 근무중인 근위병을 찾아갔다. 행여 메치기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마음을 애써 숨겼다. 눈 앞의 근위병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왕의 부대를 찾고 있습니다.”

토르는 최대한 자신감 있어 보이도록 신경 써서 말을 건넸다.

잠깐의 정적 뒤에 근위병이 냉소를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어디 있는지 말해주시겠어요?”

“무슨 볼일이 있는 거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토르는 애원하듯 대답했고 더 이상 근위병이 캐묻지 않길 바랬다.

근위병은 토르를 무시하고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대답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한참 뒤, 근위병이 입을 열었다.

“동문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쭉 가. 왼쪽에 있는 세 번째 문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빠져.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빠져. 두 번째 석조 원형 구조물을 지나면 그곳으로 가는 문이 있어. 그러나 가봐야 시간 낭비야. 방문객은 받지 않아.”

대답은 충분했다. 일초도 낭비하기 싫어 재빨리 뒤돌아 들은 대로 뛰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길을 반복해 읊었다. 해는 이미 중천이었고 너무 늦기 않게 훈련장에 당도하기만을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

깨끗한 조개 도로 위로 왕궁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사력을 다해 달렸다. 길을 잃고 헤맬까 두려워 가능한 한 일러준 대로 따라갔다. 저 멀리 안뜰 끝에 여러 개의 문이 보였고 그 중 왼쪽 세 번째 문을 통과한 뒤 이어지는 행렬을 따라 한 길 한 길 건너갔다. 토르가 뛰는 방향은 사람들과 정 반대였다. 수천 명이 도시로 몰려든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가 거세졌다. 류트 연주자, 곡예 꾼, 광대 등 온갖 재능을 갖춘 예능인들을 비롯해 한껏 차려 입고 나온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토르가 빠진 채로 진행되는 부대원 심사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훈련장만 생각하며 훈련장처럼 생긴 건물만을 찾아 거리를 뒤졌다. 원형의 석조건물 끝에 또 다른 길이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저 멀리서 훈련장으로 보이는 완벽한 원형의 석조 콜로세움이 조그맣게 보였다. 큼지막한 정문 한가운데는 보초병으로 보이는 병사들이 있었다. 정문 밖으로 울려 퍼진 환호성이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고 덕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왕의 부대 훈련장이 틀림없었다.

전속력으로 달리자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랐다. 정문 앞으로 다가간 순간 보초병 두 명이 나와 창살을 겨누며 길을 막았다. 그리고 또 다른 보초병이 앞으로 걸어나오며 손바닥으로 토르를 막아 섰다.

“멈춰라.”

토르는 숨을 헐떡거리며 멈췄다. 얼굴엔 흥분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이해…… 못 하시……겠지만”

토르는 숨을 고르느라 더듬거렸다.

“저는 꼭 저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늦었습니다.”

“어디에 늦었다는 건가?”

“부대원 심사요.”

짤막한 키에 얼굴엔 곰보자국이 가득한 뚱보 보초병이 뒤로 돌아 냉소적인 눈빛의 나머지 보초병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이내 몸을 돌려 깔보는 눈빛으로 토르를 살폈다.

“이미 몇 시간 전에 왕실 수송실에서 심사가 시작됐다. 선발되지 않은 자는 입장할 수 없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전 꼭.”

보초병이 다가서서 토르의 상의를 움켜쥐었다.

“이해를 못하는군, 건방진 꼬맹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너 따위가 들어가겠다는 거냐? 당장 구금되기 싫으면 돌아가.”

보초병에 밀쳐진 토르는 뒷걸음질 쳤다.

밀쳐진 가슴팍이 따끔했다. 그러나 이보다 출입을 거부당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쓰라렸다. 화가 치밀었다. 고작 보초병에게 밀려 심사도 제대로 못 받고 돌아가려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뚱보 보초병이 동료들에게 돌아가자 토르는 천천히 그곳을 빠져 나와 시계방향으로 콜로세움을 돌았다. 품은 계획이 있었다. 보초병의 시야를 피해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힘껏 뛰어올라 벽을 타고 건물을 넘어갈 생각이었다. 토르는 보초병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전속력을 다해 벽을 뛰어 넘었다. 건물의 절반쯤 진입했을 때 경기장으로 안내하는 또 다른 출입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의 석조 출입문들은 모두 아치형으로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쇠로 된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었지만 단 한곳만은 예외였다. 또 다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토르는 선반 위로 몸을 일으켜 내다봤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어마어마한 원형 경기장 안을 수십 명의 선발대원이 메우고 있었다. 토르의 형들도 보였다. 줄을 맞춰 정렬한 이들 앞엔 실버대원 열 두 명이 서 있었다. 대원들은 이들 사이로 걸어가 선발된 인원을 확인했다.

선발대원 무리 하나는 옆으로 빠져 있었다. 그들은 실버 대원들의 주시 하에 창을 던져 멀리 떨어진 목표물을 맞추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목표물을 놓쳤다.

그 모습에 울화가 터졌다. 토르라면 충분히 목표물을 맞추고도 남았다. 토르는 저들과 비교해 모자랄 게 없었다. 단지 조금 어리고 몸집이 그들보다 아주 조금 작다는 이유만으로 선발되지 못한 건 불공평했다.

난데없이 등뒤로 손길을 느껴졌다. 순간 그대로 낚인 토르는 뒤로 날아가 바닥에 매몰차게 내동댕이 쳐져 숨이 멎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올려다보니 아까 그 보초병이 비꼬는 얼굴로 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꼬맹이?”

토르가 채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보초병은 몸을 쭉 빼 토르에게 거센 발길질을 가했다. 보초병의 발에 맞은 순간 토르는 갈비뼈에 예리한 타격을 느꼈다.

다시 한번 보초병이 발을 들어올렸을 때 토르는 공중에 뜬 보초병의 발을 잡았다. 덕분에 보초병은 중심을 잃고 보기 좋게 넘어졌다.

그사이 재빨리 토르가 몸을 일으켰고, 넘어진 보초병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토르는 자신이 한 짓에 너무 놀란 나머지 보초병의 눈치를 살폈다. 보초병은 눈을 번뜩이며 토르를 마주보고 있었다.

“네가 널 구금만 시키고 끝낼 줄 아나 본데.”

보초병이 씩씩거렸다.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줄게. 감히 폐하의 병사에게 손을 대다니. 왕의 부대에 가입하려는 꿈은 이제 접어라. 지하 감옥에서 썩을 각오나 해둬. 운이 좋아야 다시 세상 구경 하겠지!”

보초병은 족쇄가 달린 쇠사슬을 꺼내 앙갚음을 하겠다는 표정으로 토르에게 다가갔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순간이었다. 구금이라니, 말도 안됐다. 그렇다고 구금을 면하자고 폐하의 병사를 다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지금 당장.

새총이 생각났다. 반사적으로 새총에 돌을 끼워 조준했고 돌멩이가 날아갔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돌멩이는 족쇄에 명중한 뒤 깜짝 놀란 보초병의 손가락을 맞췄다. 족쇄가 땅으로 떨어지자마자 보초병은 손을 뒤로 빼 앞뒤로 흔들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보초병은 살기를 가득 띤 얼굴로 검을 뺐다. 독특한 금속 고리가 가득 박힌 검이었다.

“방금 전 돌멩이는 네 생애 마지막 실수가 될 거다.”

보초병은 무섭게 위협하며 토르에게 돌진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 이상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돌멩이 하나를 다시 새총에 끼우고 던졌다. 신중하게 조준했다. 보초병을 자제시켜야 했지만 죽이고 싶진 않았기에 심장, 코, 눈, 머리가 아닌 그를 멈출 수 있게 해줄 단 한 곳을 겨냥했다.

사타구니.

힘의 세기를 조절해 보초병이 쓰러질 정도의 힘만 가했다.

명중이었다.

보초병은 검을 떨어드리고 무릎을 꿇었다. 사타구니를 붙잡고 쓰러져 몸을 동그랗게 말고 데굴데굴 굴렀다.

“넌 참수 형이야.”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경비! 경비!”

저 멀리서 달려오는 여러 명의 보초병이 보였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문 난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난간으로 몸을 날려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가 주목을 끌어야 했다. 그리고 토르를 막는 모든 사람들과 겨뤄야 했다.

제 5장

맥길 왕은 궁전의 상부에 위치한 아늑한 집회장에 앉아 있었다. 사적인 용무를 처리할 때 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왕은 나무조각이 새겨진 목조 왕좌에 앉아 눈 앞에 서있는 네 명의 자식을 마주했다. 첫째 왕자 캔드릭. 스물 다섯의 나이에 훌륭한 실버 전사이자 진정한 신사. 형제들 중 맥길 왕을 가장 많이 닮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맥길 왕이 오래 전 마음속에서 지운 옛 연인과의 사이에서 둔 자식이었다. 왕은 캔드릭을 나머지 자식들과 함께 키웠다. 처음에는 왕비가 반대하고 나섰지만 캔드릭을 후계에서 배제시키는 조건으로 이내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왕은 늘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맥길 왕이 아는 한 캔드릭이야 말로 왕위에 가장 적합했고 의심의 여지없이 왕위를 넘겨주고픈 자식이었다. 왕국의 후계자로 캔드릭보다 나은 적임자는 없었다.

캔드릭 옆에는 그와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둘째 왕자가 서 있었다. 둘째라고는 하지만 그야말로 왕과 왕비의 혈통을 물려받은 적자들 중에서도 장자였다. 스물 셋. 왜소하고 마른 뺨과 한곳에 시선을 오래 두지 못하는 갈색 눈을 가진 개리스 왕자. 성격 또한 첫째 왕자와 정 반대였다. 캔드릭 왕자가 지니지 않은 천성은 모두 개리스 왕자의 몫이었다. 캔드릭 왕자는 솔직했지만 개리스 왕자는 늘 생각을 숨겼다. 캔드릭 왕자는 훌륭하고 고귀한 품성을 지녔지만 개리스 왕자는 불성실하고 교만했다. 맥길 왕은 자신의 핏줄을 미워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개리스 왕자의 천성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의 소년기를 지켜보며 이마저도 포기했다. 왕은 개리스 왕자의 천성이 그의 운명이라고 판단 내렸다. 안 좋은 의미에서 개리스 왕자는 계략적이었고 권력에 굶주려 하는 만큼 야심이 넘쳤다. 더욱이 개리스 왕자는 여성에게는 애정을 품지 못하고 여럿의 동성 애인을 사귀었다. 맥길 왕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이 일로 왕자를 비난하진 않았다. 오히려 왕이 비난한 건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그의 사악함과 교활한 천성이었다.

개리스 왕자 옆에는 왕의 둘째 여식 그웬돌린 공주가 서 있었다. 이제 막 열여섯이 된 공주는 맥길 왕이 지금껏 본 그 어느 소녀보다 아름다웠고 더욱이 외모보다도 빼어난 천성을 지녔다. 공주는 상냥하고 자비로우며 정직했고 맥길 왕이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숙녀였다. 이련 면에서 공주는 캔드릭 왕자와 닮아 있었다. 공주의 눈빛에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애정이 충만했고 시선에서는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 느껴졌다. 맥길 왕은 그 어느 왕자 보다 그웬돌린 공주가 자랑스러웠다.

공주의 옆은 맥길 왕의 막내 리스 왕자가 지키고 있었다. 얼마 전 열네 살 성인이 됐고, 긍지와 기백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리스 왕자가 왕의 부대에 선출되기까지의 과정을 맥길 왕은 흐뭇하게 지켜봤다. 맥길 왕은 리스 왕자의 앞날을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식들 중 가장 빼어난 아들로서 훗날의 훌륭한 지도자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일렀다. 아직 왕이 되기엔 한참 어리고 배워야 할게 많았다.

눈 앞에 서있는 왕자 셋과 공주 한 명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자니 왕의 마음엔 만감이 교차했다. 자부심과 실망감이 교차했다. 자식 두 명이 이 자리에 불참한 사실에 한편으론 화가 나고 신경 쓰였다. 가장 연장자인 첫째 루안나 공주는 물론 결혼식 준비에 열중해야 했고 서부 왕국으로 시집을 가기 때문에 오늘의 후계자 선임 자리에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열여 덜, 고드프리 왕자는 불참했다. 왕은 이에 대한 모욕감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고드프리 왕자는 어릴 적부터 왕권을 존중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왕자가 후계에도 관심이 없고 왕위 후보감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왕이 제일 실망한 건 바로 고드프리 왕자가 이 모든걸 뒤로하고 술집에서 비열한 친구들과 어울려 술로 인생을 허비하고 이로써 왕족에게 전에 없던 수치심과 불명예를 안겨주는 왕자의 행실이었다. 왕자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이나 술로 보내는 태만한 생활을 즐겼다. 고드프리 왕자의 불참에 왕은 한편으론 안도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허나 실상은 왕도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기에 아침 일찍 술집으로 사람들을 보내 왕자를 데려오라 미리 명해뒀다. 맥길 왕은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들의 당도만을 기다렸다.

순간 왕자들과 공주가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흐트러진 모습의 고드프리 왕자가 고약한 술 냄새를 풍기며 덥수룩한 얼굴에 옷을 반쯤 입은 형상으로 서 있었다. 고드프리 왕자는 형제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방진 모습이었다. 늘 예외 없이.

“아버지, 안녕하세요. 제가 볼거리를 놓쳤나요?”

“형제들 옆으로 가서 조용히 있거라. 그렇지 않으면 하는 수 없이 일반 수용자들과 마찬가지로 널 수용소에 가두는 수밖에 없구나. 삼일 간 식사도 없고 술도 아주 조금만 허락하겠다.”

교만함을 드러내며 고드프리 왕자가 왕을 노려봤다. 왕은 그의 눈빛 속 어딘가에 깊이 내제하고 있는 힘을 감지했다. 고드프리 왕자의 천성을 대변하는 힘. 언젠가 고드프리 왕자를 바르게 이끌어줄 뭐라 설명하기 힘든 광채였다. 만약 왕자가 자신의 인품을 다스릴 수만 있게 된다면 말이다.

반항은 짧게 끝났다. 10초 정도 왕을 주시했던 왕자는 결국 수긍한 채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형제들에게 향했다.

맥길 왕은 눈 앞의 다섯 자식을 살펴봤다. 사생아, 동성애자, 술주정뱅이, 딸, 막내아들. 오묘한 조합이었다. 이들 모두 자신의 혈육이란 게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맥길 왕은 오늘, 첫째 공주의 결혼식 날, 여기 서있는 자식들 중에서 후계를 골라야 하는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부조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전부 쓸모 없는 짓이었다. 맥길 왕은 현재 전성기에 있었고 앞으로도 30년은 족히 왕권을 장악하고도 남았다. 누구를 후계자로 선택하든 적어도 향후 몇 십 년 뒤에서야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후계를 정하는 전통에 맥길 왕은 진절머리가 났다. 선대 왕들에겐 그 시기가 적절하게 맞아떨어졌을지 몰라도 지금은 후계를 임명할만한 시기가 아니었다.

왕은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모두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알다시피 오늘은 내게 후계 선택의 과업이 주어진 첫째 공주의 혼례 날이다. 후계자는 이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 내가 죽는다면 가장 왕국을 잘 다스릴 적임자는 바로 너희들의 어머니다. 그러나 왕국의 법은 오직 왕의 자식만이 왕권을 계승하도록 명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왕은 잠시 숨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메웠고 자식들 각자의 기대감이 전해졌다. 자식들의 눈빛에서 각각 상이한 속마음이 드러났다. 사생아의 눈빛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걸 수긍하듯 침착했다. 반면 동성애자의 눈빛은 마치 당연히 자신이 지목되리라는 기대감과 함께 야망으로 이글거렸다. 술주정뱅이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 창 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공주는 애정 어린 눈으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후계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상황과 상관없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막내 왕자도 공주와 마찬가지였다.

“캔드릭, 난 널 언제나 다른 자식들과 똑같이 여겼다. 그러나 왕국의 법에 따라 적자가 아닌 자식에겐 왕위를 물려줄 수 없구나.”

캔드릭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그렇게 하시길 바라옵니다. 전 지금의 상황에 만족합니다. 이 일로 폐하께 근심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맥길 왕의 마음이 아파왔다. 왕자의 말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고 이에 더더욱 캔드릭 왕자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싶었다.

“이제 네 명이 남았구나. 리스, 넌 이제껏 내가 본 중에 가장 훌륭한 청년이야. 그러나 후계 논의의 대상이 되기엔 아직 너무 어리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리스왕자가 허리를 굽혀 예의를 갖췄다.

“고드프리, 넌 세 명의 적자 중 하나다. 그러나 넌 술집에서 타락을 일삼으며 인생을 낭비하는 삶을 택했지. 넌 가질 수 있는 모든 특권을 다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모든걸 내쳤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실의가 있다면 그건 바로 네가 되겠지.”

고드프리 왕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불편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럼 제 볼일은 더 이상 없는 거죠. 다시 술집이나 가야겠어요, 그래도 되겠죠, 아버지?”

성급히 모욕적인 인사를 건넨 고드프리 왕자가 몸을 돌려 집회실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돌아오거라!”

왕이 호통쳤다.

“당장!”

고드프리 왕자는 맥길 왕을 무시한 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회실 문을 열어보니 문 밖에 경비병 두 명이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경비원들이 노여움에 가득 찬 맥길 왕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러나 고드프리 왕자는 아랑곳 않고 경비원들을 지나 복도로 걸어갔다.

“왕자를 억류하라!”

왕이 소리질렀다.

“잡아서 왕비 눈에 뛰지 않게 가두거라. 공주의 결혼식에 저 녀석까지 제 어미를 신경 쓰게 만드는 꼴은 못 보겠구나.”

“네, 폐하.”

경비병들은 문을 닫고 재빨리 왕자에게 뛰어갔다.

얼굴이 붉어진 왕은 진정하기 위해 애써 숨을 가다듬었다. 수천 번도 넘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고드프리 같은 자식을 얻었는지 의문을 품었다.

왕은 다시 남은 자식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명 모두 침묵 속에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크게 숨을 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두 사람 남았구나. 이 둘 중에서 후계자를 지목하겠다.”

왕은 공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웬돌린, 네가 지목됐다.”

왕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했다. 자식들 모두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웬돌린 공주가 가장 충격 받았다.

“정확하게 말씀하신 건가요, 폐하?”

개리스 왕자가 재차 확인했다.

“그웰돌린이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폐하, 영광스럽습니다.”

그웬돌린 공주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따를 수가 없어요. 전 여자잖아요.”

“그렇긴 하지, 맥길 왕가에서 여자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일은 없었지. 그러나 이제는 전통을 바꿀 때도 됐다는 판단이 섰구나. 그웬돌린, 넌 내가 지금껏 봐온 그 어느 소녀보다 마음과 정신이 훌륭하단다. 아직 왕위에 오르긴 젊지만, 신의 가호가 있다면 이 아비가 그리 빨리 죽진 않을 거다. 그리고 네가 왕위에 오를 즈음이면 충분히 왕국을 다스릴 만큼 현명해져 있을 거다. 왕국은 네 소유가 될 거다.”

“그렇지만 폐하!”

언성을 높인 개리스 왕자의 얼굴은 이미 잿빛이었다.

“저야말로 적자 중 장자입니다! 언제나 맥길 가문에선 장자가 왕권을 물려 받았습니다.”

“왕의 결정이다.”

맥길 왕이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전통도 짐이 좌우한다.”

“그러지만 불공평해요.”

개리스 왕자가 투덜대는 말투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제가 바로 왕이 돼야 한다고요. 제 여동생이 아니라. 여자는 안돼요!”

“입을 다물라!”

결국 왕은 분노에 떨며 고함을 질렀다.

“감히 내 결정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이냐?”

“제가 계집애한테 밀리다니요? 저를 그 정도로 하찮게 보신 겁니까?”

“이미 결정을 내렸다. 존중하도록 하거라. 다른 모든 결정들에 그랬듯이 순순히 수긍하거라. 이제 모두 자리를 떠도 좋다.”

자식들 모두가 왕에게 예의를 차린 뒤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그러나 개리스 왕자만이 나가지 않고 문 앞에서 멈췄다. 도저히 자리를 떠날 수가 없는 모양새였다.

왕자는 다시 돌아와 맥길 왕과 독대했다.

개리스 왕자의 얼굴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분명 오늘 후계자로 지명되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왕자는 절실하게 그 자리를 탐냈다. 맥길 왕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개리스 왕자가 후계자로 지명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였다.

“왜 절 미워하시는 거죠, 폐하?”

“미워하지 않는다. 단지 네가 왕위를 계승할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그것이야 말로 네가 갈망하는 것이니까.”

개리스 왕자의 얼굴이 검붉게 물들었다. 맥길 왕은 개리스 왕자의 천성을 확실하게 일깨워주었다. 왕자의 눈빛에서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증오심이 왕을 향해 이글거리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아무 말도 없이 사력을 다해 문 밖을 나갔고 덕분에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쾅 닫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맥길 왕은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개리스 왕자가 자신을 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한 아들의 증오심이 적들의 증오심보다 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르곤의 암시가 떠올랐다. 가까이에 있는 위협.

그 위협이 이렇게까지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단 말인가?

제 6장

토르는 죽을 힘을 다해 드넓은 훈련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바짝 쫓아오는 보초병들의 발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경비병들은 무더운 날씨 속에서 흙먼지가 가득한 운동장을 달리며 토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토르의 시야에 선발대원들이 들어왔다. 토르보다 약간 더 나이가 많고 힘이 세다는 것 외엔 별다를 게 없는 수십 명의 소년들이었다. 이들은 훈련과 함께 다양한 대형을 이뤄 심사를 받는 중이었다. 일부는 활을 쐈고 일부는 창을 던졌으며 일부는 작살을 잡는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목표물들이 꽤 떨어진 거리에 있었음에도 거의 모두가 완벽하게 명중시켰다. 이들이 바로 토르의 경쟁자들이었고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 사이로 진짜 전사들이 있었다. 실버 대원들이 넓게 반원을 그리며 선발대원의 몸짓을 하나하나 주시했다. 평가가 한창이었다. 최종 선택을 받을 이들과 집으로 돌려보낼 후보들을 엄선중이었다.

토르야말로 자신의 진가를 알려 그들의 눈에 들어야 했다. 곧 보초병들이 눈앞에 닥칠게 뻔했고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실버 대원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초조해진 마음을 안고 운동장 정 중앙으로 황급히 뛰어갔고 절대 집으로 돌려보내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전속력으로 운동장에 돌진하는 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몇몇 선발대원들이 아예 동작을 멈추고 토르에게 시선을 고정했고, 일부 실버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르는 자신에게 주목된 모두의 시선을 느꼈다. 모두들 당황한 얼굴로 도대체 누구길래 보초병 세 명을 달고 운동장 한가운데로 돌진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토르가 실버에게 심어주고 싶은 첫인상과는 정 반대였다. 평생토록 왕의 부대에 선발되기를 꿈꿔 왔지만 이런 상황을 그려본 적은 없었다.

달리는 내내 당장 뭘 할지 고민이 가득했지만 곧 이러한 생각도 의미가 없어졌다. 거구의 한 선발대원이 돋보이고 싶은 욕심에 토르를 제압하려 앞으로 나섰다. 장대 같이 큰 키에 근육으로 똘똘 뭉친 소년은 토르보다 몸짓이 두 배는 족히 더 컸다. 소년은 목검을 치켜들고 토르 앞을 막아 섰다. 토르는 자신을 꺾으려는 소년의 굳은 결심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토르를 제압해 이득을 보려는 속셈이었다.

이에 토르는 분개할 수 밖에 없었다. 토르는 소년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었고 소년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구의 소년은 가산 점을 챙기기 위해 토르에게 싸움을 걸고 있었다.

거구의 소년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체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뚝 서서 토르를 노려보는 얼굴 위로는 두껍고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까지 덮여 있었고 그 누구보다 크고 뚜렷한 사각 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때려봐야 작은 상처 하나 생기지 않을 것 같은 몸이었다.

목검을 쥔 거구의 소년이 토르에게 돌진했고 당장 수를 쓰지 않으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반사적으로 새총을 꺼내 돌을 넣고 잡아당겨 소년의 손을 조준했다. 하늘 위로 높이 치켜든 검으로 토르를 내리치려는 순간 던져진 돌멩이가 목검을 쥔 손을 정확히 명중했다. 목검은 공중으로 날아갔고 소년은 손을 안절부절하며 비명을 질렀다.

토르는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이 틈을 타 공격에 나섰다. 공중으로 뛰어올라 두 발로 그의 가슴을 타격했다. 하지만 떡갈나무를 찬 건지 헷갈릴 정도로 소년의 가슴은 단단했다. 토르가 소년 앞에 착지하는 동안 소년은 겨우 한두 걸음 뒷걸음친 게 전부였다.

‘조짐이 좋이 않아,’ 귓가에 맴도는 소리를 들으며 토르는 쿵 하고 착지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소년의 그새 선제 공격을 가했다. 허리를 아래로 굽힌 소년은 토르의 등을 잡아 던져버렸고 덕분에 토르는 바닥에 얼굴을 박으며 나가떨어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 주위를 에워싼 소년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토르는 굴욕감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토르가 다시 일어서려 몸을 뒤집었지만 거구의 소년이 또 한발 빨랐다. 이미 토르의 몸에 올라타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한 후였다. 토르가 의식하기도 전에 싸움은 이미 레슬링으로 번져있었고 사지를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무게에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나머지 소년들도 주위로 모여들었다. 토르의 귓가에 그들의 환호성이 나지막이 들렸다. 모두가 열광적으로 혈투를 외쳐댔다. 소년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토르를 내려봤고 치켜세운 양쪽 엄지손가락을 토르의 두 눈 위로 서서히 내렸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구의 소년은 정말 토르를 헤치려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선발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인 걸까?

토르는 막판에 가까스로 얼굴을 돌려 손가락을 피했고 소년의 두 엄지 손가락은 그대로 땅 위에 내리 꽂혔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토르는 소년의 몸을 빠져 나왔다.

토르는 몸을 일으켜 세웠고, 거구의 소년도 마찬가지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소년이 있는 힘껏 토르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다행히 찰나의 순간으로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토르의 얼굴에 바람이 지나갔고 그 강도로 보아 아마 얼굴을 맞았으면 턱이 아작 나고도 남았을 것이 뻔했다. 토르는 가까이 다가가 소년의 복부를 주먹으로 강타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무를 향해 주먹질을 한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토르가 주먹을 떼기도 전에 소년이 팔꿈치로 토르의 얼굴을 내리쳤다.

엄청난 타격에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쳤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귀가 윙윙 울려댔다.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는 동안 소년은 발로 토르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토르는 뒤로 날아갔고 바닥에 등뒤로 쓰러졌다. 지켜보던 소년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빙빙 돌았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거구의 소년이 다시 한번 토르를 발로 차고 얼굴에 주먹을 날려 토르는 바닥에 그대로 죽은 듯이 쓰러졌다.

그렇게 누운 채로 나지막이 귓가를 스치는 소년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코에서 흐르는 짭짤한 피비린내와 얼굴에 전해지는 타격을 있는 그대로 느꼈다. 고통으로 흐느꼈다. 시선을 올려보니 거구의 소년은 이미 등을 돌린 후였다. 소년은 승리를 만끽하며 그들의 무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소년의 등치가 너무 커서 싸워봐야 승산이 없었고 더 이상 처벌당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한곳에서 토르를 다그쳤다. 이렇게 질 수 없다고. 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무너질 수 없다고.

‘포기하지마. 일어나. 일어나!’

어찌된 영문인지 토르는 기운을 차렸다. 신음을 참으며 상체를 일으킨 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에 체중을 실어 천천히 두 발로 일어섰다. 토르는 다시 소년과 얼굴을 마주했다. 피가 흘렀고 부어터진 두 눈 덕에 앞을 보기 힘들었지만 거친 숨을 가누며 주먹을 들여 올렸다.

거구의 소년이 뒤를 돌아 토르를 노려봤다.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죽은 듯이 쓰러져 있지 그랬어, 꼬맹아.”

소년이 토르를 위협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만!”

어디선가 누군가가 소리쳤다.

“엘덴, 물러서!”

실버 전사 한 명이 그 둘 사이에 나섰다. 전사는 엘덴의 팔꿈치를 잡아 토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전사가 나서자 군중이 조용해졌다. 한눈에 봐도 신분이 꽤 높아 보였다.

전사의 등장에 놀란 토르가 고개를 들었다. 20대 정도의 나이에 떡 벌어진 어깨, 각진 턱, 깔끔하게 손질된 갈색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두말한 여지도 없이 그의 등장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그가 입은 최고급 갑옷은 반짝반짝 광이 나는 은사슬로 이어져있었고 그 위를 덮은 것은 다름아닌 왕실의 문양이었다. 맥길 왕가의 상징, 매의 문양 이였다. 순간 왕족과 마주 서있다는 생각에 토르의 입이 바짝 말랐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을 해명해보겠나. 초대장도 없이 경기장에 들어온 연유가 어떻게 되지?”

토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보초병 세 명이 인파를 뚫고 나타났다. 일전의 뚱보 보초병이 숨을 가쁘게 쉬며 토르를 지목했다.

“저자가 저희의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제가 체포해서 지하 감옥에 구금시키겠습니다.”

“전 잘못한 게 없어요.”

“지금은?”

보초병이 고함쳤다.

“폐하의 영토에 허락도 없이 침입한 건?”

“단지 기회를 얻고 싶었다고요!”

토르가 다시 왕족 전사에게 몸을 돌려 애원했다.

“제가 바란 건 왕의 부대에 선발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훈련장은 선발된 소년들을 위한 곳이다.”

멀리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실버 전사 한 명이 원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50대 정도의 나이에 가슴이 넓고 몸집이 딴딴했다. 짧게 다듬은 수염위로 흉터가 가득했다. 일생을 전사로써 살아온 게 틀림 없었다. 갑옷 위 가슴에 붙어있는 황금배지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바로 이곳의 사령관임이 틀림 없었다. 사령관을 직접 본 토르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저는 선발되지 못했습니다, 주군. 그건 사실이죠. 그렇지만 전 평생 이곳에 오길 꿈꿨습니다. 제가 바란 건 오직 저의 진면목을 보여드릴 기회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기 모인 모든 선발대원만큼 뛰어납니다. 증명할 기회를 한번만 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지금껏 왕의 부대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이 전장은 꿈을 이뤄주는 곳이 아니다.”

걸걸한 목소리로 사령관이 대답했다.

“전사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예외는 없다. 선발된 사람만이 선발부대에서 심사를 받는다.”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초병들이 족쇄를 채우기 위해 토르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왕족 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손을 들어올려 보초병을 제지했다.

“때론 예외를 두는 경우도 있겠지.”

놀란 보초병들이 왕족 전사를 올려다봤다. 반박하고 싶은 모양새였지만 왕족에 대한 경의를 표하느라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네 기상이 대견하구나.”

전사가 말을 이었다.

“구금되기 전에 네 능력을 한번 보고 싶은데.”

“캔드릭 왕자, 규정을 어겨서는 안됩니다.”

사령관이 불쾌함을 드러냈다.

“규정은 왕족이 만든다.”

캔드릭 왕자의 어조가 단호했다.

“그리고 부대는 이에 따른다.”

“부대는 왕자님의 아버지인 폐하를 따릅니다. 왕자님이 아니라.”

사령관이 반박했다. 왕자만큼이나 단호했다.

주변이 긴장으로 가득 차 이내 삭막해졌다. 토르는 자신 때문에 벌어진 눈 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폐하는 내가 잘 안다. 폐하께서 어떻게 하실지도 잘 알지. 아마 이 소년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하셨을 거야. 그게 바로 우리가 할 일이고”

사령관은 몇 번의 신경전을 치르고 나서야 물러섰다.

캔드릭 왕자는 몸을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갈색 눈동자에 강렬한 눈빛이었다. 왕자다운 용모 속에 전사의 기질도 함께 품고 있었다.

“네게 기회를 주마. 네가 저 표식을 명중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왕자는 경기장 너머에 쌓여있는 건초더미의 정 중앙, 빨간 표식을 가리켰다. 건초 주변으로 여러 창이 박혀 있었지만 정 중앙에 박힌 창은 없었다.

“여기 모인 소년들 중 아무도 할 수 없는걸 해 낸다면, 즉 네가 저 표식을 명중한다면 왕의 부대에 합류할 수 있게 해주마.”

캔드릭 왕자는 옆으로 비켜섰다. 토르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걸 부정할 수 없었다.

창이 진열된 선반으로 가 주의 깊게 창들을 살폈다. 견고한 참나무 재질에 몸통은 최고급 가죽으로 둘러싼, 토르가 여태껏 본 적 없는 품질이 좋은 물건들이었다. 앞으로 좀 더 나서자 가슴이 떨렸다. 손등으로 흐르는 코피를 닦고 보니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자신의 모습이 느껴졌다. 분명한 건 거의 불가능한 임무가 주어졌단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토르는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창 하나를 집어 들고 손으로 창의 무게를 가늠했다. 상당한 무게였다. 그 동안 던져봤던 창들과는 크게 달랐다. 그러나 그럼에도 확신이 들었다. 토르는 이 창이라면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표식을 명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찌됐든 창 던지기는 토르가 돌 던지기 다음으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더군다나 오랜 기간 동안 양을 친 덕분에 이곳 저곳을 돌며 다양한 목표물을 명중시킨 경험도 있었다. 형들이 놓친 표적들도 토르는 늘 명중이었다.

토르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쉬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보초병들에게 끌려가 감옥살이를 할 게 뻔했다. 그리고 평생토록 왕의 부대엔 지원할 수 없게 된다. 이 한번의 기회로 토르가 꿈꿔온 모든 것이 좌우되는 것이다.

토르는 모든 걸 다 걸고 신에게 기원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두 눈을 떴다. 앞으로 두 걸음 나가 상체를 뒤로 뻗어 창을 던졌다.

날아가는 창을 보는 내내 숨도 쉬지 못했다.

‘제발, 신이시여, 제발.’

무거운 침묵 속에서 오직 토르가 던진 창만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갔고 토르는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된걸 느낄 수 있었다.

정적이 끝나고 소리가 들렸다. 창이 건초더미를 뚫는 소리였다.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느낌이 왔다. 확실한 느낌이 왔다. 흠 잡을 데 없는 명중이었다. 던진 창에서 손을 떼는 그 찰나에 느껴지는 손목의 각도로 토르는 이미 명중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토르는 결과를 보기 위해 눈을 떴고 확신이 사실로 확인되자 크게 안도했다. 창은 빨간 표식 정 중앙에 꽂혀 있었고, 그곳에 있는 유일한 창이었다. 다른 선발대원들이 못 해낸 일을 토르는 해냈다.

놀라움이 빚어낸 침묵이 주위를 감쌌다. 모든 선발대원과 실버들이 토르를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결국 캔드릭 왕자가 앞으로 나서 만족스러운 듯 손바닥으로 힘차게 토르의 등을 쳤다. 왕자는 크게 방긋 웃었다.

“내 결정이 옳았어, 넌 합격이야!”

“뭐라고요, 주군!”

보초병이 거세게 악을 썼다.

“불공정해요. 저 녀석은 불청객이라고요!”

“표식을 명중시켰다.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다.”

“다른 후보들보다 어리고 작습니다. 꼬맹이 부대가 될 순 없죠.”

사령관도 반격하고 나섰다.

“나라면 저 표식도 못 맞추는 거인이 되기보단, 표식을 맞출 수 있는 작은 병사가 되고 싶을 테네.”

“운이 좋았을 뿐이죠!”

토르와 겨뤘던 거구의 소년이 외쳤다.

“우리도 기회만 더 주어지면 맞힐 수 있다고요!”

왕자는 뒤를 돌아 거구의 소년을 주시했다.

“맞힐 수 있다고? 그렇다면 한번 볼까? 네 최종선발여부를 두고 내기하겠나?”

거구의 소년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왕자의 제안을 차마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어쨌든 이 아이는 불청객입니다.”

사령관이 다시 말을 꺼냈다.

“어디 출생인지 신분도 알지 못합니다.”

“로우랜즈 출신입니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뒤를 보며 목소리의 출처를 찾았지만 토르만은 달랐다.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줄 곳 자신을 괴롭혀온 목소리의 주인공, 첫째 형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는 나머지 두 형제들과 같이 앞으로 나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토르를 노려보았다.

“저 녀석은 서부 왕국의 남부 주 출신 맥클리오드 가의 일족 토르그린입니다. 우리 형제들 중 막내고, 우리 모두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양을 돌보는 게 저 녀석 일이었습니다.”

모든 소년들과 실버 대원들이 웃어댔다.

토르는 얼굴이 빨개졌고 그 순간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순간은 없었다. 전형적인 형의 행동이었다. 토르의 영광을 모두 빼앗고 토르를 우습게 만들기 위해선 뭐든지 감행하는.

“목동이었다고, 이 아이가?”

사령관이 쫓아 물었다.

“그렇다면 적군들은 저 녀석을 피해 다녀야겠군요.”

다른 소년이 외쳤다.

또다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토르의 모욕감은 한층 더해졌다.

“충분히 했네!”

캔드릭 왕자가 단호하게 잘랐다.

서서히 웃음이 가라앉았다.

“나라면 지금 이렇게 웃어대기만 하는 자네들보다 저 표식을 명중시킨 목동을 선택하겠네.”

왕자의 말이 끝나자 모든 웃음이 멈추고 소년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토르는 왕자에게 더 없이 감사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왕자는 적어도 토르가 겪은 모든 일에 개의치 않고 토르의 자존심을 세워줬다.

“자네는 진정한 전사라면 친구를 고자질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가? 하물며 자신의 가족과 혈육은 더더욱 말이지.”

왕자가 드레이크를 꾸짖었다.

드레이크는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드레이크가 당황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내 드레이크의 동생, 드로스가 앞으로 나와 항의했다.

“토르는 선발되지도 못했습니다. 선발된 건 저희입니다. 맹목적으로 저희를 따라온 겁니다.”

“따라오지 않았어.”

끝내 입을 연 토르가 반박했다.

“왕의 부대 때문에 온 거지 형들을 따라온 게 아니야.”

“왜 여기 왔는지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령관이 짜증이 난 듯 앞으로 나섰다.

“저 아이 때문에 모두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요. 창을 잘 던진 건 사실이지만 왕의 부대엔 들일 수 없습니다. 저 아이를 후원해줄 실버도 없을뿐더러 그와 짝을 이루고 싶어할 전속 동료도 없을 겁니다.”

“제가 전속 동료가 될게요.”

저 멀리서 누군가 대답했다.

토르는 깜짝 놀랐다. 다른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걸음 너머에 토르의 또래로 보이는, 금발 머리와 초롱초롱한 녹색 눈빛을 제외하면 토르와 생김새까지 비슷한 한 소년이 쇠사슬로 제작된 홍색과 검은색 표식의 최고급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또 다른 왕족이었다.

“말도 안됩니다. 왕족은 평민과 전속 동료가 되지 않습니다.”

사령관이 반박했다.

“행여 이를 허가한다 하더라도, 역시 저 아이는 자격이 안됩니다. 그를 후원할 실버가 없습니다.”

“제가 후원하겠어요.”

누군가가 외쳤다.

모두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을 돌렸고 다들 숨이 막힐 듯 놀랐다.

토르도 돌아보니 말을 탄 전사 한 명이 보였다. 눈이 부시게 반짝반짝 빛나는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온갖 종류의 무기들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태양을 마주하는 것처럼 전사에게서 강한 빛이 느껴졌다. 한눈에 봐도 그의 품행과 태도에서 그리고 그가 쓴 투구로 보아 그가 보통의 실버 전사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최정예 명장이었다.

토르는 명장을 알아봤다. 명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고 그와 관련한 전설도 들었다. 에레크였다. 토르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링 대륙의 모든 전사를 통틀어 단연 최고라 불리는 최정예 명장이었다.

“그러나 주군께선, 이미 후원자가 있습니다”

사령관이 항의했다.

“그렇다면 두 명을 후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차분한 저음의 에레크 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들 사이에선 당혹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제 더 할말은 없는 거겠군.”

캔드릭 왕자가 상황을 정리했다.

“토르그린은 후원자도 있고 전속 동료도 생겼네. 모든 게 해결됐으니 이제 그는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됐네.”

“그렇지만 저희 일은 잊으셨습니다!”

뚱보 보초병이 앞으로 나오며 크게 외쳤다.

“어찌됐든 저 녀석이 폐하의 병사를 쓰러뜨린 건 사실입니다. 이는 반드시 처벌 되야 합니다. 정의를 구현해야지요!”

“정의는 구현돼야지. 그러나 나의 지시에 따라서지 자네의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야.”

캔드릭 왕자의 어조가 단호했다.

“그러나 주군, 저 녀석은 반드시 감옥에 갇혀야 합니다! 모두의 앞에서 본보기를 보이셔야 합니다.”

“계속 네 의견을 고집한다면 결국 네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캔드릭 왕자가 보초병을 노려보며 겁을 줬다.

결국 보초병이 물러섰다. 마지못해 돌아섰고 붉어진 얼굴로 토르를 노려봤다.

“이제 공식적으로 임명해야겠군,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된걸 환영하네, 토르그린!”

캔드릭 왕자가 소리 높여 외쳤다.

소년들과 기사들이 환호했다. 그리고 이내 제 자리로 돌아가 다시 훈련에 집중했다.

토르는 너무 놀라 아무 감각이 없었다. 자신조차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 왕의 부대 부대원으로 최종선발 된 것이다. 됐다. 꿈만 같았다.

토르는 캔드릭 왕자를 바라봤고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깊은 감사를 느꼈다. 일평생 그 누구도 토르를 돌봐주거나, 늦은 귀가가 염려돼 찾으러 나선다거나, 보호해준 적이 없었다. 우습게도 토르는 이미 자기 아버지보다 캔드릭 왕자에게 더한 친밀함을 느꼈다.

“어떻게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큰 빚을 졌습니다.”

캔드릭 왕자가 토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캔드릭이다. 외워두렴. 난 폐하의 첫째 아들이야. 네 용기에 감탄했다. 부대에 큰 보탬이 될 거야 믿는다.”

왕자는 서둘러 돌아갔고, 그 사이 토르와 싸운 거구의 소년 엘덴이 토르 옆을 지나갔다.

“등 뒤를 조심해. 우리가 너랑 같은 막사에서 자는 거 알지. 일초라도 네가 안전할거란 생각은 접어둬.”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엘덴은 자리를 떴다. 토르에겐 벌써 적이 한 명 생겨 버렸다.

토르는 앞으로 이곳에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그때 왕의 막내아들이 토르에게 뛰어왔다.

“신경 쓰지마, 엘덴을 늘 저렇게 싸움을 걸어. 난 리스라고 해.”

“전속 동료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와주시지 않으셨으면 난처할 뻔 했어요.”

리스 왕자가 건넨 악수에 응하며 토르가 대답했다.

“저런 괴물 같은 녀석에게 맞선 소년과 동료가 돼서 나야말로 기뻐, 꽤 멋진 싸움이었어.”

리스 왕자가 즐거운 듯 대답했다.

“농담이시죠? 엘덴 손에 죽을 뻔 했다고요.”

얼굴에 말라붙은 피딱지를 닦아내며 토르가 대답했다. 맞은 곳이 부어 오른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싸웠잖아. 감탄했어. 우리들 중 누구라도 그대로 누워서 꼼작 안 했을 거야. 그리고 창 던지기는 최고였어. 그렇게 던지는 건 어디서 배웠어? 우리 평생 전속 동료하자!”

리스 왕자는 토르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토르와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친구하자. 평생 좋은 친구가 될 것 같단 말이야.”

왕자와 악수하며 토르는 그에게 한평생 함께 우정을 나눌 진실한 친구가 생겼다는 걸 느꼈다.

순간 누군가가 토르의 옆구리를 찔렀다.

돌아보니 토르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길다란 얼굴엔 곰보자국이 가득했다.

“난 패스골드야, 에레크 명장님의 후원대상. 넌 명장님의 두 번째 후원대상이고. 따라서 넌 내 명령에 따라야 해. 그리고 곧 토너먼트가 시작돼. 방금 전 왕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명장님의 후원자로 선택 받았는데 이렇게 가만히 서있기만 할거야? 따라와! 빨리!”

리스 왕자는 이미 돌아서서 가버린 뒤였다. 토르도 재빨리 패스골드를 따라 운동장을 뛰어갔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걸 뒤로하고 토르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외치고 있었다.

이제 토르도 꿈꿔왔던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됐다.

제 7장

개리스 왕자는 서둘러 왕궁을 걸어갔다. 왕실의 예를 갖춘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든 인파를 헤치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맥길 왕과 독대를 나눴던 여파로 현기증이 났다. 어떻게 그가 후계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단 말인가? 개리스 왕자에게 왕은 절대 왕위를 넘기지 않으려는 것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적자들 중 장자였다. 늘 장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개리스 왕자는 지금껏 늘, 태어나면서부터 줄 곳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거라 확신해왔다. 달리 생각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불합리한 처사였다. 왕자를 제치고 그보다 어린 자식을 택하다니. 그것도 계집아이를. 최악이었다.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개리스 왕자는 왕국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게 불 보듯 뻔했다. 발걸음을 옮기던 개리스 왕자는 순간 세상의 모든 바람이 멈춘 것만 같아 숨을 쉬기 힘들었다.

왕자는 결혼식에 참석한 군중들 속에서 비틀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만 가지 색상의 예복을 입은 인파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고 모두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각계각층의 사람들이었다. 평민들과 이렇게까지 가까이 서 있다는 사실에 진절머리가 났다. 오늘은 예외적으로 미천한 출신들이 귀족들과 함께하도록 허락된 날이었고, 저 멀리 산악지대를 넘어온 동부 왕국의 미개인들이 왕궁에 입장할 수 있는 날이었다. 개리스 왕자는 여전히 자신의 누나가 이런 미개인들 중 하나랑 혼인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행사는 아버지가 주선한 한낱 정치적인 행보에 불과했다. 두 왕국간의 평화를 조성하려는 한심한 시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슨 연유에선지 그의 누나가 결혼 상대자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개리스 왕자는 어렵게 그 이유를 알아냈다. 왕자가 아는 공주는 그를 남편감으로써 좋아하기보다 왕자의 지위를 갖은 자의 아내가 되는 것에 흡족해했던 것이다. 누나에겐 일국의 왕비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개리스 왕자의 예상대로 누나는 원하는 걸 누릴 게 분명했다. 저 멀리 산악지대 너머 사는 모든 동부 왕국 사람들은 한낮 미개인에 불과했다. 왕자는 동부왕국이 덜 문명적이고 덜 정제되고 덜 세련됐다고 여겼다. 누나가 좋으면 결혼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길에 걸림돌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실상은, 누나가 멀리 가버리면 갈수록 왕자에겐 더 이득이었다.

허나 이 모든 건 더 이상 왕자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왕자는 왕이 될 기회를 영영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왕국에서 이름없는 왕자로 잊혀질게 뻔했다. 이제 왕자가 쥔 모든 권력이 사라질 것이다. 평범해진 삶으로 불우하게 전락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늘 그래왔다. 맥길 왕은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통찰력이 깊다고 여겼다. 그러나 개리스 왕자야말로 아버지보다 통찰력이 깊었다. 언제나 그래왔다. 일례로 루안다 공주와 맥클라우드 왕가의 혼례를 주선한 아버지는 스스로를 정통한 정치인으로 여겼지만 개리스 왕자는 아버지보다 더 멀리 내다봤다. 왕자는 앞으로의 파급효과까지 예상할 수 있었고 이미 아버지보다 한 수 앞섰다. 왕자는 이 결혼이 초래할 비극을 이미 예상했다. 궁극적으로 맥클라우드 왕가는 이 결혼을 통해 잠잠해지기 보단 대범해질 것이다. 그들은 야수다. 따라서 이러한 평화의 손길을 대담한 관용으로 보기보다 나약함으로 여길 것이다. 그들은 가족간의 결속에 개의치 않는다. 누나가 혼인 후 왕국으로 돌아가면 분명 공격을 가할 것이다. 이 결혼도 결국엔 책략이다. 왕자는 맥길 왕에게 이를 알리려 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이 또한 더 이상 개리스 왕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왕국의 하찮은 왕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생각만해도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고 순간 그도 상상 못한 엄청난 증오심이 아버지를 향해 솟구쳤다. 다시 어깨를 부딪히며 대중들 틈에 끼어들었다. 왕자는 걸어가는 내내 복수할 방법을 강구했다.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절대 손 놓고 상황을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절대 여동생이 왕위를 물려받게 놔둘 수 없었다.

“여기 있었네”

누군가 말을 걸었다.

펄스였다. 가지런한 이가 다 드러나도록 명랑하게 미소를 지으며 왕자 옆에 쫓아왔다. 열여 덜 나이에 키가 크고 늘씬했다. 목소리가 고음이었고 매끈한 피부에 두 볼은 붉게 빛났다. 왕자의 현재 애인이었다. 개리스 왕자는 평소 펄스를 만나면 기분이 좋았지만 지금은 펄스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나 피해 다녔지.”

펄스가 왕자에게 팔짱을 끼었다.

개리스 왕자는 즉시 팔을 쳐내며 주위에 본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바보야? 사람들 있는 곳에선 절대 다시 팔짱 끼지마. 절대.”

왕자가 펄스를 꾸짖었다.

펄스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맞아, 넌 생각이 짧아. 한번만 더 해봐, 다신 안 만날 줄 알아.”

왕자가 다그쳤다.

펄스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듯 대답했다.

“잘못했어.”

왕자는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고 본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도했다. 그제서야 기분이 나아졌다.

“요즘 떠도는 소문은 뭐야?”

화제를 돌리기 위해 왕자가 펄스에게 말을 걸었다.

펄스는 즉시 기운을 차려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기대감으로 궁금해해. 다들 네가 후계자로 지목됐다는 공표를 기다리고 있어.”

왕자가 고개를 떨구자 펄스가 왕자를 살폈다.

“네가 아니야?”

펄스의 어조엔 의심이 가득했다.

왕자는 빨개진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고 펄스의 시선을 피했다.

“말도 안돼.”

펄스가 놀라움을 토로했다.

“아버지가 날 제외했어. 상상이 가? 공주 때문에. 내 어린 여동생 때문에.”

경악한 펄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건 불가능해. 장자는 너잖아. 공주는 여자잖아. 불가능하잖아.”

왕자가 펄스에게 고개를 돌려 얼음처럼 차갑게 대답했다.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둘은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며 걸었다. 인파가 더욱 거세지자 왕자는 주변을 살피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고 수많은 인파가 한자리에 모여있는 광경을 둘러봤다. 왕실은 사람들로 빈틈없이 메워졌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성문이란 성문을 모두 이용해 떼를 지어 모여든 게 분명했다. 그들은 모두 정성스럽게 만든 결혼식 무대로 향했고 무대 주위로는 적어도 천 석 이상의 최고급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좌석 하나하나 붉은 색 두꺼운 벨벳 쿠션을 놓았고 나머지는 모두 금으로 장식해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했다. 시중들은 그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자리를 안내하고 음료를 날랐다.

끝도 없이 길게 늘어진 좌석들 사이로 꽃잎이 흩뿌려져 있었고, 양쪽에 맥길 왕가와 맥클라우드 왕가가 자리했다. 두 가문의 경계가 뚜렷했다. 각각 수백 명의 맥길 왕가와 맥클라우드 왕가의 왕족들이 가장 좋은 예복을 입고 하객으로 참석했다. 맥길 왕족은 맥길 왕가의 상징인 짙은 보라색 예복을, 맥클라우드 왕족은 어두운 주황색 예복으로 구분됐다. 개리스 왕자의 눈엔 두 가문의 차이가 뚜렷이 보였다. 맥길 왕족이 훨씬 기품 있다고 여겼고 맥클라우드 왕족들은 겨우 왕족 행색이나 하는 거라 치부했다. 격식에 맞춰 한껏 차려 입었지만 실상은 야수들에 불과했다. 왕자는 그들의 표정에서, 서로를 밀어대는 몸짓에서, 시끄럽게 웃어대는 매무새에서 야수의 흔적을 감지했다. 기품을 갖춘 차림으로도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에게 깊게 내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결혼식이 이곳 왕궁에서 치러진다는 결정에 왕자는 몹시 분개했었다. 왕자는 이 모든 결혼식 자체에 분개했다. 이는 모두 그의 아버지가 내리는 어리석은 결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개리스 왕자였다면 분명 전혀 다른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맥길 왕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주선하긴 했겠지만 왕자는 늦은 밤, 동부 왕국 출신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잠들 때를 노렸을 것이다. 그들이 골아 떨어진 연회장 문을 잠근 뒤 크게 불을 질러 완벽한 급습을 감행하면 그만이었다.

“야수들, 왜 폐하께서 저들을 이곳까지 들이셨는지 이해할 수 없어.”

펄스가 반대쪽 연회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 덕에 곧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질 거야, 아버지께서는 적을 집안으로 들이셨고 결혼식을 가장한 군사력 경쟁을 벌이고 있지. 충돌이 발생하기에 완벽한 조건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해? 전쟁? 여기서? 여기 모인 병사들하고? 공주님의 결혼식 날?”

왕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맥클라우드 왕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었다.

“결혼식의 신성함 같은 건 저들에겐 안중에도 없어.”

“그렇지만 우리 쪽 병사들이 수천 명이나 된다고.”

“저들도 마찬가지야.”

왕자는 고개를 돌려 길게 늘어진 병사들을 주시했다. 맥길 왕가와 맥클라우드 왕가의 병사들이 양쪽으로 배치돼 있었다. 왕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충돌을 예상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병사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을. 특별한 행사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풍족하게 넘쳐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불어 끝없이 등장하는 연회 음식이 있는데도, 낮이 가장 긴 하지임에도, 꽃이 만발했음에도 여전히 모든 곳에서 긴장감이 감지됐다. 모두가 벼랑 끝에 서있었다. 왕자는 팔꿈치가 밖으로 향하도록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를 느꼈다. 서로가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왕자는 오히려 자신에겐 행운일수 있다고 판단했다. 저들 중 하나가 아버지의 가슴에 칼이라도 꽂는다면 그가 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우리 같이 앉는 건 안 되겠지.”

자리로 향하는 펄스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역력했다.

왕자가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

“얼마나 멍청한 거야?”

왕자의 목소리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왕자는 자신에게 맹목적인 펄스를 애인으로 삼은 게 과연 잘 한 일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감상적인 펄스를 하루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결국 그로 인해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날 게 뻔했다.

무안해진 펄스는 고개를 땅으로 떨궜다.

“그럼 이따가 안가에서 봐. 지금은 사라져 줄게.”

펄스는 남몰래 왕자의 몸을 살짝 건드리고는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누군가 왕자의 팔을 차갑게 꽉 쥐었다. 순간 왕자의 심장이 멈춘 듯 했다. 펄스와의 관계가 들통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내 팔에서 느껴지는 얇은 손가락과 긴 손톱을 감지하고 팔을 잡은 사람이 자신의 아내, 헬레나 공주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오늘 같은 날 절 망신주지 마세요.”

증오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가 야유했다.

왕자는 고개를 돌려 부인을 살펴봤다. 아름다웠다. 완벽하게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순백의 공단 정복을 갖춰 입고 머리를 곱게 올려 핀으로 고정했다. 최고급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한 그녀는 아름답게 화장까지 마친 상태였다. 왕자는 그녀의 빼어난 미모를 객관적으로 인지했다. 처음 결혼식을 올리던 그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매력을 느낀 건 아니었다. 왕자의 타고난 성적 취향을 배제한 채 여성과의 결혼을 권한 사람도 역시 그의 아버지 맥길 왕이었다. 이 덕에 개리스 왕자는 일평생 비틀린 관계를 감수하며 살아야 했다. 이러한 왕의 결정은 왕자의 취향에 대한 왕실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오늘은 당신 누나의 결혼식이라고요, 그래도 한번은 우리가 멀쩡한 부부인양 행색 해야죠.”

그녀는 왕자의 팔짱을 끼고 접근을 막아 논 예약석으로 걸어갔다. 왕실 병사 두 명이 줄을 걷어 이들을 안내했고 나머지 왕족들과 함께 식장 입구에서 곧 있을 왕족 행렬을 치르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트럼펫이 울렸고 서서히 군중이 조용해졌다. 하프시코드의 선율이 울렸고 더 많은 꽃들이 통로를 장식했다. 왕족의 행렬이 시작됐고 왕족부부들은 팔짱을 끼고 차례대로 줄을 지어 재단으로 행진했다. 개리스 왕자는 헬레나 공주에게 끌려 가는 행색이었다.

왕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어색함에 어쩔 줄 몰랐다. 어떻게 해야 금실 좋은 부부처럼 보여질지 난감했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 함께 자신만을 주시하며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길이 너무 길었다. 왕자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통로를 지나 재단 위 누이 옆에 서서 이 부부행색을 마무리 하고 싶었다. 그런데다 재단 위에서 맥길 왕을 마주할 걸 생각하니 끔찍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행여라도 후계 소식을 들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안 좋은 소식이 있소.”

왕자가 헬레나 공주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들은 재단 위로 올라갔고 드디어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해요?”

왕자는 놀란 눈으로 공주를 바라봤다.

그녀는 경멸스럽게 왕자를 봤다.

“첩자들을 심어 뒀다고요.”

왕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 것인가?

“내가 왕이 못되면 당신도 왕비가 못되오.”

“왕비가 될 생각 추에도 없었어요.”

왕자는 더욱 뜻밖이었다.

“폐하께서 당신을 후계로 삼을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 안 했어요, 폐하께서 왜 그러시겠어요? 당신은 지도자감이 못돼요. 당신은 난봉꾼이에요. 그렇지만 내겐 해당사항이 없죠.”

왕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당신도 날 사랑하진 않잖소.”

왕자가 맞받아쳤다.

이번엔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도 왕자의 눈을 피해 애인을 두고 있었다. 왕자 또한 공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첩자가 있었다. 왕자는 공주의 사생활을 내버려뒀다.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왕자를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요. 한 평생 외롭게 살길 바래요?”

“내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잖소. 그런데도 나와 결혼했소. 권력을 택했지. 사랑이 아니라. 모르는 척 하지 마오.”

“이건 정략결혼이었어요. 제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고요.”

“그러나 거부해보지도 않았잖소.”

왕자는 오늘 더 이상 헬레나 공주와 다툴 기력이 남지 않았다. 공주는 그런대로 꽤 유용한 꼭두각시 부인이었다. 때때로 헬레나 공주가 필요했기에 그녀가 왕자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지 않는 한 왕자는 그녀의 모든 행동을 참아냈다.

모두의 시선이 맥길 왕과 함께 신부 입장을 하는 루안나 공주에게로 집중됐다. 개리스 왕자 또한 뒤틀린 심사로 입장하는 그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제 딸을 인도하며 눈물을 닦는 저자는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뼛속까지 가식이 가득했다. 왕자의 눈에 맥길 왕은 그저 무능한 멍청이였다. 왕자는 맥길 왕이 소중한 딸을 늑대 같은 맥클라우드 왕가에 보내며 감수해야 하는 깊은 슬픔을 차마 알지 못했다. 개리스 왕자는 결혼을 흡족해하는 루안다 공주를 향해서도 같은 경멸을 느꼈다. 루안다 공주는 자신이 미개한 인간과 혼인한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그녀 또한 권력을 갈망했다. 냉정하고 계산적이었다. 이런 면에서 그녀는 형제들 중 개리스 왕자와 가장 많이 닮아있었다. 이들이 다정한 남매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리스 왕자는 때때로 그녀의 존재에 알 수 없는 위로를 느꼈다.

왕자는 불안함에 발을 가만두지 못했다. 빨리 결혼식이 끝나버리길 바랬다.

아르곤이 축복의 주문을 외우는 차례였다. 식이 진행되는 내내 왕자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이 모든 게 가식적이고 역겨웠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두 가문의 조합에 불과했다. 왜 있는 그대로 지금의 행사를 정치적 허세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인가?

다행히도 식이 오래 진행되진 않았다. 오늘의 주인공이 입맞춤을 나눴고 일제히 일어난 군중들이 환호했다. 요란한 경적소리가 울렸고 결혼식 식순이 완벽하게 끝나자 식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혼잡이 더해졌다. 왕족들은 모두 통로 끝에 마련된 연회장에 모였다.

냉소적으로 일관했던 개리스 왕자 또한 이 광경에는 감탄했다. 맥길 왕이 돈을 아끼지 않고 야심 차게 마련한 연회였다. 연회장에는 각종 테이블과 만찬, 와인 통, 끝도 없이 이어진 통돼지구이, 양 구이가 장관을 이뤘다.

그 뒤로 주요 행사가 준비 중이었다. 경연이었다. 돌 던지기, 창던지기, 활 쏘기를 위한 과녁이 세워졌고 그 뒤로는 마상 시합을 위한 경계선이 마련되고 있었다. 벌써부터 사람들이 이곳을 에워쌌다.

군중들은 이미 마상 경기장에서 자신들이 속한 왕국에 따라 양 갈래로 나뉘어 무리 지어 있었다. 맥길 왕가의 첫 주자는 역시 캔드릭 왕자였다. 갑옷을 멋지게 차려 입고 말에 올라 뒤로는 수십 명의 실버 대원들을 대동했다. 그 뒤로 조금 떨어져서 백마를 탄 에레크 명장이 등장했고 모든 군중들이 경외심에 숨을 죽였다. 명장은 마치 자석처럼 주위의 모든 시선을 끌어당겼다. 헬레나 공주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명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개리스 왕자가 이를 목격했다.

“벌써 스물 다섯이 코앞인데 미혼이에요. 왕국의 모든 여자들이 에레크 명장과 결혼하고 싶어 안달하죠. 그런데 왜 아직 결혼을 안 하는 걸까요?”

“그걸 당신이 왜 상관해?”

여자에겐 흥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왕자는 질투가 났다. 그도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마상경기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전사가 아니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공주가 오만하게 손을 저으며 왕자를 무시했다.

“당신은 사내도 아니에요, 당신은 이런 거 이해 못해요.”

우롱 섞인 말투였다

왕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공주의 드센 기를 꺾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왕자는 사람들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는 공주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엉망이 되는 하루였다. 왕자는 벌써부터 속이 불편했다. 아주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끝도 없는 기사도 정신과 겉치레, 허식이 눈앞에서 벌어질 것이다. 서로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전사들의 마상 경기, 개리스 왕자는 철저히 배제되는 날이었다. 왕자가 싫어하는 모든 것이 한자리에 펼쳐지는 날이었다.

왕자는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남몰래 이 경기가 커다란 전쟁으로 발발하길 빌었다. 눈앞에서 유혈이 난무하고 경기장이 완벽히 무너져 산산조각 나길 바랬다.

언젠가는 원하는 걸 얻으리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왕위에 오르리라.

언젠가는.

제8장

토르는 패스골드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패스골드는 인파 속에서 토르에게 서두르라며 손짓했다. 경기장 이후로 모든 것이 정신 없이 돌아갔다. 토르는 지금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이 얼떨떨했다. 머릿속이 혼미했고, 왕의 부대에 합류했다는 게 여전이 믿기지 않았다. 에레크 명장의 후원도 실감이 안 났다.

“내가 말했잖아, 꼬맹아, 빨리 오라고!”

패스골드가 재촉했다.

“꼬맹이”라는 말이 언짢았다. 패스골드는 고작해야 토르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였다. 토르가 자신을 놓치기라도 바라는 듯 패스골드는 군중 속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이곳은 항상 이렇게 북적거려?”

패스골드의 뒤를 쫓아가며 토르가 물었다.

“물론 아니지! 오늘은 낮이 가장 긴 하지인데다가 공주님의 결혼식 날이잖아. 뿐만 아니라 맥길 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유일하게 맥클라우드 왕족들에게 성문을 개방한 날이라고. 이렇게 붐빈 적은 한번도 없었어. 유례없는 일이야. 나도 이정도 일 줄은 몰랐어. 늦을 까봐 걱정이다.”

패스골드가 인파를 가르며 서둘러 대답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리는 개념 있는 후원부대원이라면 모두 하는 일을 하러 가는 거야. 명장님을 도우러 가야지!”

“뭘 도와?”

숨이 찬 토르가 헉헉대며 물었다. 날이 더욱 더워졌고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닦아냈다.

“왕실 마상경기!”

인파를 모두 헤치고 나와 당도한 곳에는 병사 한 명이 있었다. 패스골드를 본 병사는 다른 병사들에게 손짓해 출입을 허락했다.

밧줄 아래로 몸을 숙여 안쪽으로 들어가니 인파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내 토르는 두 눈을 의심했다. 토르가 들어간 곳은 마상 경기장이었다. 긴 선 뒤로 관중들이 빽빽이 보였고 모든 마상도로엔 경주마가 서 있었다. 말들의 체격이 어마어마하게 컸고 그 큰 말들 위로 완벽히 무장한 전사들이 앉아있었다. 실버 뿐만 아니라 양쪽 왕국의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전사들이 경기에 참여했다. 일부는 검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고 나머지는 흰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갖가지 모양의 투구를 착용하고 각종 무기들로 무장했다. 세상의 모든 이목이 마상장에 집중된 것만 같았다.

몇몇 경기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토르가 알지도 못하는 출신의 전사들이 서로에게 돌격해 창과 방패를 부딪혔고 그때마다 군중들 속에서 짤막한 환호성이 들렸다. 가까이서 보니 말들이 보통 빠른 게 아닌데다가 힘까지 넘쳐났다. 무기가 부딪히며 울리는 소리도 굉장했다. 치명적인 예술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건 단순한 운동경기 이상인 것 같은데!”

패스골드를 따라 마상도로 주변을 걸어가며 토르가 말했다.

“그냥 운동경기가 아니니까 그렇지.”

무기가 부딪히는 마찰음 속에서 패스골드가 소리쳤다.

“경기를 가장한 사생결단이야. 매일 여기서 사람들이 죽어나가. 전쟁이야. 여기서 상처 없이 걸어나간다며 운이 좋은 거지. 근데 그런 사람들은 극히 일부야.”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전사 두 명이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충돌하는 모습이 보였다. 금속끼리 부딪히며 끔찍한 소리가 들렸고 그 중 한 명이 말에서 떨어졌다. 등을 대고 바닥에 누운 전사로부터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토르가 서 있었다.

관중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떨어진 전사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의 갑옷 위에 꽂힌 목검 조각이 토르의 시야에 들어왔다. 전사는 이내 고통으로 울부짖었고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후원부대원들이 뛰어나가 그를 살피더니 마상장 밖으로 끌어냈다. 승리한 전사는 천천히 행진했고 관중들의 환호에 맞춰 창을 들어올렸다.

토르는 경악했다. 마상 경기가 이렇게까지 치명적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방금 저 부대원들이 했던 게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이야. 너도 이제 후원을 받잖아. 정확히 말하면, 2인자지만.”

패스골드가 설명을 멈추고 토르의 얼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 지독한 입 냄새가 전해졌다.

“그리고 절대 잊지마. 난 에레크 명장님을 따르고, 넌 나를 따르는 거야. 네 일은 날 보좌하는 거야. 알겠어?”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애썼다. 토르가 예상했던 상황과는 모든 것이 딴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토르의 등장에 패스골드가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게 여실히 보였다. 토르에게 적이 한 명 더 생겨버렸다.

“일부러 너와 에레크 명장님 사이에 끼어들려고 한 게 아니야.”

패스골드가 아주 짧게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

“넌 명장님과 내 사이에 끼어들 수 없어, 꼬맹아. 앞으로 내 앞길 막지 말고 뭐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패스골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경계선 밖 구불구불한 통로로 가버렸다. 토르도 최선을 다해 따라갔지만 미궁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좁은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주변에선 말들이 울어댔고 일부 후원부대원들이 겁에 질린 채로 우는 말들을 달래고 있었다. 패스골드는 또다시 길을 우회해서 방향을 튼 뒤에서야 멈췄다. 그의 앞엔 아주 덩치가 크고 골격이 아름다운 말 한 필이 서 있었다. 토르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나무 울타리 하나로 가둬둘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전쟁에 나설 것 같은 기백이었다.

“왈핀이야, 에레크 명장님의 말이야. 여러 말 중 하나지. 에레크 명장님이 마상 시합에 주로 데리고 가는 녀석이야. 길들이는 게 보통이 아냐. 그렇지만 명장님은 잘 길들이셨지. 마문 좀 열어봐.”

토르는 영문을 몰라 패스골드를 쳐다보고 다시 문을 쳐다봤다.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리는지 살펴봤다. 앞으로 다가가 널빤지 사이에 놓인 말뚝에 힘을 줬다. 허나 쉽게 뽑히지가 않았다. 다시 힘을 주자 말뚝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나무 문이 열렸다.

토르가 재차 힘을 주니 왈핀이 힘차게 울며 몸을 쭉 빼 나무에 발길질을 했고 그 덕에 토르의 손가락 끝부분이 살짝 뜯겨나갔다. 잽싸게 손을 뺐지만 손끝이 아려왔다.

패스골드가 웃어댔다.

“이것 때문에 너한테 문 열라고 한 거야. 다음부턴 더 빨리 열어, 꼬맹아. 왈핀은 누굴 기다려주지 않아. 특히 너 따위는.”

토르는 발끈했다. 이미 패스골드가 거슬리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막막했다.

토르는 빠르게 문을 열었다. 이번엔 문을 열며 날렵하게 말의 옆으로 몸을 비켜섰다.

“말을 내보낼까?”

겁이 난 토르가 물었다. 이리저리 흔들며 발길질을 해대는 왈핀의 고삐를 잡아야 하는 게 무서웠다.

“물론 꺼내선 안돼, 그건 내 일이야. 넌 먹이를 주면 돼. 내가 주라고 할 때. 그리고 삽으로 배설물을 치우면 돼.”

고삐를 잡은 패스골드는 말을 마구간까지 인도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토르는 침을 꿀꺽 넘겼다. 그가 예상했던 부대 생활의 첫 시작은 이런 게 아니었다. 물론 어떻게든 부대 생활은 이미 시작됐고 토르는 이에 적응해야 했지만 너무 굴욕적이었다. 토르가 꿈꾼 건 전쟁과 영광과 격투였고 부대원들과의 경쟁과 수련이었다. 시종일을 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 마구간을 나섰고 다시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마상경기장으로 돌아갔다. 마상장의 분위기 덕에 토르는 기분이 전환됐다. 찰나였지만 수천 명 관중들의 환호 소리와 격돌하는 전사들의 싸움 소리에 압도당했다. 어마어마하게 대립하는 금속 소리뿐만 아니라, 달리는 말들이 빚어내는 육중한 땅의 진동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사방으로 전사들이 있었고 후견부대원들이 그들의 곁에서 출전을 돕고 있었다. 후견부대원들은 전사들의 검에 광을 내고 무기에 기름칠을 했다. 또 안장과 끈을 확인했고 호명을 기다리며 말에 오르는 전사들의 무기를 재정비했다.

“엘말킨!”

경기 진행자가 호명했다.

토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지방 출신 전사였다. 큰 체구에 붉은 갑옷을 입은 엘말킨은 문이 열리자 마상장 안으로 질주했다. 토르는 때맞춰 급히 뒤로 물러서서 출전하는 엘말킨의 길을 비켜줬다. 엘말킨은 좁은 입구에서부터 돌진했고 그가 던진 창은 상대편 전사의 방패를 빗겨 맞췄다. 팽팽한 대립 끝에 상대 전사의 창에 가격당한 엘말킨은 뒤로 나가떨어졌다. 관중들이 열광했다.

엘말킨은 급히 점프해 몸을 일으켰다. 이리저리 돌며 그의 후견부대원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토르는 후견 부대원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철퇴를 다오!”

엘말킨이 소리쳤다.

후견부대원은 바로 몸을 움직였다. 무기 선반에서 철퇴를 집어 마상장 안으로 질주했다. 엘말킨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지만 주위를 뱅뱅 돌던 상대편 전사가 다시 돌진했다. 후견부대원이 엘말킨에게 철퇴를 전달하기도 전에 상대편 전사가 그들을 덮쳤다. 부대원이 너무 늦어버렸다. 상대편 전사가 창을 내리 꽂았고 부대원의 머리를 스쳤다. 창에 스친 충격으로 이리저리 돌던 부대원은 얼굴을 땅으로 박고 쓰러졌다.

미동도 없었다. 꽤나 먼 거리였는데도 흙을 뒤집어 쓴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지, 그렇지?”

토르는 나란히 서서 자신을 쳐다보는 패스골드를 봤다.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고, 꼬맹아. 이건 전쟁이야. 그리고 우린 그 한가운데 있다고.”

오늘의 주요 대결을 앞두고 관중들이 조용해졌다. 토르는 주변이 기대감으로 가득한 걸 실감했다. 모든 마상 선수들이 이번 대결을 기다렸다. 한쪽 입구에서 캔드릭 왕자가 말을 이끌며 손에 창을 쥐고 걸어 나왔다.

맞은편 입구에서 맥클라우드 왕가의 독특한 갑옷을 입은 전사가 그를 마주하며 걸어 나왔다.

“맥길 왕족 대 맥클라우드 왕족.”

패스골드가 토르에게 속삭였다.

“맥클라우드 왕가는 수백 년 동안 맥길 왕가와 전쟁을 해왔어. 분명 저쪽은 이번 대결로 그 승패를 가늠하려 할 거야.”

출전한 전사 모두 챙을 내리자 경적이 울렸다. 전사들은 기합소리와 함께 서로에게 돌진했다.

그들의 민첩함에 토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금속이 세차게 부딪히며 팽팽하게 대립했고 찢어질 듯 울리는 소리에 토르는 양 손을 올려 귀를 막을 뻔 했다. 결국 두 전사가 같이 말에서 떨어지자 관중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전사들은 각각 몸을 일으켜 투구를 벗어 던졌고, 각자의 후견부대원들이 그들에게 달려가 단검을 건넸다. 두 전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단검을 휘둘러 상대를 공격하는 캔드릭 왕자의 모습에 토르는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왕자의 모든 동작은 기품과 힘이 넘쳐났다. 맥클라우드 왕가 쪽도 기량이 좋은 전사였다. 앞 뒤로 뒹굴며 겨루느라 두 전사 모두 진이 빠졌지만 그 누구도 쓰러지지 않았다.

결국 서로의 검이 정면으로 부딪혔고 부딪힌 두 검이 모두 부러져 나갔다. 후견부대원들이 철퇴를 건네주기 위해 재빨리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캔드릭 왕자가 철퇴를 잡으려 손을 뻗은 순간 맥클라우드 쪽 후견부대원이 왕자의 뒤로 달려들어 철퇴로 왕자의 등을 내리쳤다. 습격을 받은 왕자는 땅 위에 쓰러졌고 관중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대편 전사가 검을 집어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 캔드릭 왕자를 발로 누르고 목을 겨눴다. 왕자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패배를 인정하네!”

캔드릭 왕자가 외쳤다.

맥클라우드 왕가 쪽 관중들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고 맥길 왕가의 관중들은 분노의 야유를 보냈다.

“부정행위야!”

맥길 왕가의 관중들이 외쳐댔다.

“속임수를 썼어! 부정행위야!”

분노의 야유가 울려 퍼졌다.

군중들은 점점 더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내 서로를 향한 야유가 퍼져 나갔고 관중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대립했다.

“이거 왠지 불길한데.”

패스골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토르와 나란히 서서 관중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관중들이 일어섰다. 주먹이 오갔고 결국 총력전으로 번졌다. 대혼란이었다. 사내들은 격하게 주먹을 날리고 서로의 머리채를 잡으며 땅 위에 굴렀다. 점점 더 많은 관중들이 뛰어들어 싸움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경적 소리가 울렸고 양쪽 병사들이 나서서 관중들을 뜯어놓으려 사력을 다했다. 아까보다 더 큰 경적소리가 한번 더 울려 퍼지고 맥길 왕이 왕좌에서 기립하자 그제서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오늘은 그 어떤 충돌도 있어선 안되오!”

왕의 위엄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마상장에 울렸다.

“오늘은 축제의 날이오! 그리고 이곳은 내 왕국이오!”

관중들이 점차 냉정을 찾았다.

“만약 이 경합이 양쪽 왕국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각각 최고의 전사를 선별해 판가름 하는 게 어떻겠소.”

맥길 왕은 저 멀리 맡은 편에 수행원을 대동하고 자리 한 맥클라우드 왕을 바라봤다.

“동의하오?”

맥길 왕이 소리쳤다.

맥클라우드 왕은 엄숙하게 서 있었다.

“동의하오!”

맥클라우드 왕이 대답했다.

양쪽에서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그쪽의 전사를 선택하시오!”

“이미 선택 했소.”

맥클라우드 왕이 대답했다.

맥클라우드 왕가 쪽에서 가공할 만한 외모의 전사가 서서히 등장했다. 토르가 지금껏 보지 못한 엄청난 거구의 전사가 말을 타고 서 있었다. 육중한 바위산 같은 형상이었다. 한번도 인상을 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얼굴에는 수염이 길게 자라 있었다.

토르의 옆에서도 움직임이 감지됐다. 옆을 보니 에레크 명장이 서 있었다. 명장은 왈핀 위에 올라타 앞으로 걸어갔다. 토르는 침을 꿀꺽 넘겼다. 이 모든 게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에레크 명장의 등장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걱정이 앞섰다.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토르는 바로 에레크 명장의 후원부대원이었고 명장은 이제 막 마상 경기에 출전했다.

“이제 뭘 해야 해?”

마음이 급해진 토르가 패스골드에게 질문했다.

“뒤로 물러서서 내가 하란 대로만 해.”

에레크 명장이 경기장 안으로 나섰다. 선택 받은 두 명의 전사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대립하고 있었다. 각자의 말이 팽팽한 신경전을 못 이기고 발을 굴러댔다. 토르는 주어질 임무를 기다리며 시합을 지켜봤고 점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경적이 울리자 두 전사가 돌격했다.

왈핀은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마치 물고기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것 같은 질주였다. 상대편 전사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러나 에레크 명장은 기품 있고 세련된 전사였다. 명장은 몸을 낮춰 바람을 가로 질렀고 그의 은빛 갑옷이 물결쳤다. 세상에 그보다 더 반짝이는 갑옷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전사가 팽팽히 맞섰다. 에레크 명장은 목표물을 정확히 겨냥해 창을 쥐고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명장은 상대편 전사의 일격을 피하는 동시에 상대편 전사의 갑옷 정 중앙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산처럼 큰 거구의 전사가 뒷걸음질 치며 땅에 떨어졌다.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떨어지는 형상이었다.

맥길 왕가의 관중들이 환호했다. 에레크 명장은 상대편 전사 옆을 지나 다시 방향을 틀어 원을 그리며 돌았다. 명장은 상대편 전사 투구의 챙을 올렸고 창 끝을 그의 목에 겨눴다.

“항복하라!”

에레크 명장이 소리쳤다.

상대편 전사가 침을 뱉었다.

“절대!”

넘어진 전사는 허리춤에 숨긴 주머니 속에서 잿더미를 한줌 꺼내 에레크 명장이 차마 피할 새도 없이 명장의 얼굴에 뿌렸다.

당황한 명장은 눈을 감싸며 창을 놓쳤고 말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명장이 눈에서 손을 떼지 못하자 맥길 왕가의 관중들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거구의 전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으로 명장의 명치를 가격했다.

명장이 몸을 웅크리자 상대편 전사는 큰 바위덩어리를 머리위로 높이 쳐들어 에레크 명장의 머리를 조준했다.

“안돼!”

토르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괴성을 질렀다.

토르는 두려움에 떨며 상대편 전사가 내리꽂은 바위를 지켜봤다. 에레크 명장은 찰나의 순간에 간신히 몸을 굴려 바위를 피할 수 있었다. 명장의 머리가 놓였던 자리에 바위가 깊게 박혔다.

에레크 명장의 민첩함이 가히 놀라웠다. 벌써 일어나 편법을 쓴 거구의 전사를 마주하고 있었다.

“단검으로 승부하라!”

양쪽에서 왕들이 외쳤다.

패스골드는 뛸 준비를 하며 눈을 크게 뜨고 토르를 주시했다.

“빨리 단검을 줘!”

긴장한 토르의 심장이 요동쳤다. 토르는 에레크 명장의 무기 진열대로 가 필사적으로 단검을 찾았다. 눈 앞엔 아찔할 정도로 많은 무기들이 놓여있었다. 토르는 손을 뻗어 단검을 찾아 패스골드의 손에 건넸다.

“멍청아! 이건 중검이야!”

패스골드가 고함쳤다.

토르의 목이 타 들어갔다. 모든 관중이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초조함에 눈 앞이 막막해졌다. 어떤 검을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어 긴장감이 온 몸을 휩쓸었다.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패스골드가 나서 토르를 밀쳐내고 직접 단검을 찾았다. 그리고는 전속력을 다해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뛰어가는 패스골드를 바라보던 토르는 스스로가 쓸모 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만일 자신이 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저곳으로 뛰어가고 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봤다. 생각만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상대편 전사의 부대원이 한발 빨랐다. 이내 상대편 전사가 에레크 명장에게 단검을 휘둘렀고 명장은 단검을 기다리며 공격을 피했다. 드디어 패스골드가 명장의 손에 단검을 쥐어줬고 때마침 상대편 전사가 명장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명장은 빼어나게 영리했다. 전사가 돌진하도록 몸을 피하지 않고 기다리다 막판에 옆으로 비켜섰다.

상대편 전사는 멈추지 못하고 계속 뛰었고 그곳에는 운 없게도 패스골드가 자리해 있었다. 명장을 놓친 전사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 돌진해 두 손으로 패스골드의 머리를 움켜쥐고 그대로 박치기했다.

패스골드의 코뼈가 부러지고 코피가 흘렀다. 패스골드는 그 상태로 기절한 채 쓰러졌다.

경악한 토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야유와 욕설을 퍼붓던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에레크 명장이 단검을 휘둘렀지만 상대편 전사가 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고 둘은 다시 서로를 마주 봤다.

순간 토르는 이제 그가 명장의 유일한 후원부대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무얼 해야 하는 것일까? 토르는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왕국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두 사람은 일격에 일격을 가하며 서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힘에서는 맥클라우드 쪽 전사가 에레크 명장보다 훨씬 앞섰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명장의 기량을 넘지 못했다. 명장의 움직임이 더 빠르고 민첩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단검을 휘두르고 찌르고 피했다. 막상막하가 따로 없었다.

결국 맥길 왕이 자리에서 기립했다.

“긴 창으로 승부하라!”

토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토르에게 방금 임무가 주어졌다.

무기 진열대를 살폈다. 무기 중에서 가장 긴 창다워 보이는걸 골라냈다. 창의 가죽 손잡이를 움켜쥐며 제발 자신이 고른 게 긴 창 이길 기도했다.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간 토르는 관중들의 시선을 느꼈다. 온 사력을 다해 달렸다. 최대한 빨리 에레크 명장에게 긴 창을 쥐어주고 싶었다. 자신이 상대 부대원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창을 건네 받은 에레크 명장은 손으로 창을 돌리며 상대 전사와의 대결을 준비했다. 명예로운 명장답게 그는 상대편 전사가 무기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토르는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상대편 전사의 길을 막지 않도록 자리를 비켰다. 패스골드와 같은 실수를 범할까 두려웠다. 자리를 비켜난 토르는 기절해있는 패스골드를 싸움터 밖으로 끌고 나왔다.

경기를 지켜보던 토르는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상대편 전사가 창을 건네 받자마자 수직으로 높이 들어 땅에 창을 거꾸로 내리꽂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상황을 주시하던 토르의 눈엔 주변이 점차 흐려지고 오직 상대편 전사의 움직임만 세세하게 한 장면씩 들어왔다. 불길했다. 상대편 전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창이 느슨하게 풀려있는 게 보였다. 창의 칼날만을 분리해 수리 검으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마침내 거구의 전사가 창을 던져버렸고 분리된 칼날은 에레크 명장의 심장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갑옷도 충분히 관통할 수 있는 톱날이 박힌 칼날이었다.

순간 토르의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퍼져나갔다. 전신이 따끔따끔했다. 다크우드에서 시볼드와 혈전을 벌였을 때 받았던 느낌과 일치했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게 느려졌다. 날아가는 칼날도 속도가 더뎌졌다. 온 몸이 달아올랐고 몸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퍼져나갔다. 자신에게 이런 열기가 있었는지 토르도 의아했다.

앞으로 발을 내밀었고 칼날의 속도보다 몸이 빨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직 칼날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날아가는 칼날을 멈춰야 했다. 에레크 명장이 다치는걸 보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런 비열한 짓거리에 말이다.

“안돼!”

토르가 비명을 질렀다.

또다시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 칼날 쪽으로 손바닥을 쭉 뻗었다.

이제 막 에레크 명장의 가슴을 파고들려던 칼날이 찰나의 순간에 공중에 그대로 멈췄다.

멈춰진 칼날은 이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각각의 왕국을 대표하는 두 전사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관중들 또한 일제히 토르에게 시선이 멈췄다. 마치 전 세계가 토르를 주시하는 것만 같았고 그제서야 이 모든 사람들이 방금 전 벌어진 일을 모두 목격했다는 걸 깨달았다. 관중들은 토르의 비범함을 눈 앞에서 확인했다. 의도치 않게 토르가 경기에 개입돼버리고 말았다. 에레크 명장을 구해내며 패배를 눈앞에 뒀던 왕국의 운명을 바꿔놨다.

토르는 그 자리에 굳은 채 방금 벌어진 상황을 납득하려 애썼다.

부정의 여지도 없이 토르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다른 존재였다. 그는 달랐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제 9장

정신을 차리고 보니 토르는 왕의 막내 아들이자 토르의 전속 동료인 리스 왕자의 손에 이끌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마상 경기 이후 모든 것이 멍해졌다. 토르가 한 모든 행동이, 에레크 명장을 구하기 위해 발휘된 힘이, 왕국 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꼴이 됐다. 경기는 바로 종료됐다. 양국의 왕이 철수를 원했고 휴전이 선언됐다. 전사들이 경기장 밖으로 나오고 관중들은 충격에 동요되어 자리를 떴다. 토르는 리스 왕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토르는 왕의 수행부대에 둘러 쌓여 있었고 이들과 함께 인파를 뚫고 있었다. 리스 왕자가 토르의 팔을 잡고 계속해서 그를 인도했다. 토르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마상장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건지 납득하기 힘들었고 그 일로 무슨 일이 초래될지 막막했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왕의 부대원 중 하나였기 바랬다. 모든 이목의 중심에 놓이길 바란 게 아니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토르가 지금 어디로 이끌려 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경기를 방해한 대가로 처벌을 받으러 가는 것인가? 물론 그가 에레크 명장의 목숨을 구한 건 사실이지만 후견부대원으로선 금기사항인 전사들의 승부에 개입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포상이 내려질지 문책이 내려질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리스 왕자가 토르를 이끌며 질문했다. 속수무책으로 왕자를 따라가던 토르는 아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토르가 지나가는 내내 사람들은 괴물이라도 보는 냥 넋을 놓고 그를 주시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명장님을 돕고 싶었어요. 그리고……도왔고요.”

리스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에레크 명장의 목숨을 구했어. 그게 어떤 건지 모르겠어? 그 분은 가장 명망 높은 명장이야. 네가 그런 분을 구한 거야.”

리스 왕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토르의 기분이 좋아졌고 마음이 안정됐다. 리스 왕자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왕자에겐 상대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토르는 지금 처벌을 받으러 가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토르를 영웅 비슷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뭔가를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명장님이 죽지 않길 바랬을 뿐이에요. 그리고 자연스레 그렇게 됐어요. 별거 없었어요.”

“별거 없었다고?”

리스 왕자가 놀랐다.

“난 그런 거 못하잖아. 그런 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모퉁이를 돌자 눈 앞에 하늘높이 뻗어있는 왕궁이 보였다. 기념비 같았다. 도개교 진입로 앞에서는 병사들이 줄지어 차려 자세를 취하고 군중들을 차단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몸을 옆으로 비켜 리스 왕자와 토르가 지나가도록 길을 내줬다.

두 사람은 양 옆으로 서 있는 병사들을 지나 철 못이 덮인 커다란 아치형 문을 향해 걸었다. 병사 네 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옆으로 비켜서서 차려 자세를 취했다. 이런 대우를 받고 있자니 황송할 뿐이었다. 마치 토르가 왕족이라도 된 것 같았다.

궁궐로 들어섰고 등 뒤로 문이 닫혔다. 토르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왕실 내부는 엄청나게 넓었고 어마어마하게 높은 벽을 둘러싼 돌의 두께와 너비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수백 명의 왕실 구성원들이 고조된 움직임으로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왕궁 내부는 사람들의 즐겁고 들뜬 마음으로 분위기가 고조돼있었다. 토르가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아봤다. 사람들의 시선에 토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두가 무리를 지어 넋을 놓고 복도를 내려가는 토르와 리스 왕자를 바라봤다. 좋은 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한자리에 모여있다는 게 신기했다. 보이는 여자들의 나이대가 다양했다. 모두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서로 팔짱을 꼈고, 지나가는 토르를 보고 귓속말을 나누며 킥킥거렸다. 토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맘에 들어서 그러는지 자신을 놀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이목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특히나 이곳은 왕궁이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따름이었다.

“왜 절 비웃는 거죠?”

왕자가 돌아서서 빙긋 웃었다.

“비웃는 게 아니야. 네가 좋아서 그래. 넌 유명인사라고.”

“유명인사요? 무슨 말씀이세요? 전 방금 여기 왔는데요.”

왕자가 웃으며 토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토르 덕에 즐거워 보였다.

“왕실에선 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소문이 빨라. 특히 너 같은 새로운 인물은. 음, 사실 오늘이 좀 더 유난스럽긴 해.”

“어디로 가는 거죠?”

토르는 자신이 어디로 안내 받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널 보고 싶어하셔.”

왕자는 또 다른 복도로 방향을 틀며 대답했다.

토르는 침을 삼켰다.

“왕자님 아버지시라면? 그러니까……폐하? 왜 폐하께서 절 만나고 싶어하시죠? 진짠가요?”

왕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야. 긴장 풀어. 그냥 내 아버지를 만나는 거야.”

“그냥 아버지요? 그분은 왕이시라고요!”

토르의 목소리는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께선 좋은 분이셔. 아마 즐거운 자리가 될 거야. 넌 에레크 명장님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잖아.”

토르는 계속해서 침을 넘겼고 손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두 사람은 커다란 문을 열고 웅장한 연회실로 들어섰다. 토르는 순간 경이로움에 취한 채 머리위로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드리워진 천장을 바라봤다. 끝도 없이 높은데다 정교한 장식이 그 화려함을 더했다. 벽으로는 아치형 창문에 색색의 유리가 수 놓여 있었다. 대략 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연회실을 채우고 있었지만 필요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장소였다. 연회 테이블이 끝도 없이 길게 줄지어 이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만찬을 나누고 있었다. 양쪽 테이블 사이로 좁은 길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깔린 붉은색 카펫은 왕좌가 들어선 연단까지 펼쳐져 있었다. 리스 왕자와 토르가 카펫에 올라 왕에게 걸어가자 양 갈래로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네가 지금 저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알기나 해?”

난데없이 적개심이 가득한 콧소리가 들렸다.

토르는 고개를 들어 눈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토르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고 귀한 차림새를 보니 왕자임이 분명했다. 남자는 인상을 가득 쓴 채 토르와 리스 왕자의 길 앞을 막아 섰다.

“폐하의 분부셔, 폐하의 분부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면 비켜줘.”

리스 왕자가 재빨리 대답했다.

길을 막아선 왕자는 그 자리에 서서 인상을 구긴 채 마치 썩은 음식이라도 문 것 같은 표정으로 토르를 관찰하고 있었다. 토르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굽은 몸과 무례한 행동, 쉬지 않고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니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평민은 입장할 수 없는 연회장이야, 당장 이 미천한걸 밖으로 내보내. 원래 있던 곳으로.”

숨이 막혔다. 분명 이 자는 토르를 싫어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방금 내가 들은 대로 아버지께 전해 드릴까?”

리스 왕자가 반격했다.

마지못한 왕자는 뒤를 돌아 순식간에 자리를 떴다.

“누구시죠?”

앞으로 걸어가며 토르가 물었다.

“마음에 두지 마, 내 형이야. 첫째 형, 개리스 왕자. 음, 실제로는 맏형이 아니지. 적자 중에서는 맏형이지만. 오늘 네가 훈련장에서 만난 캔드릭 형이 진짜 맏형이야.”

“개리스 왕자는 왜 절 싫어하죠? 전 왕자님을 알지도 못하는데.”

“괜찮아. 형이 너만 싫어하는 게 아니니까. 형은 누구든지 다 싫어해. 왕족과 친분을 유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협이라고 여겨. 형은 상관 하지마. 그냥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야.”

걸어가는 내내 토르는 리스 왕자에게 더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리스 왕자야말로 토르를 진정한 벗으로 대해줬다.

“왜 저를 위해 형과 맞섰죠?”

토르가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리스 왕자는 어깨를 들썩였다.

“아버지께 너를 데려오라고 분부 받았어. 또 넌 내 전속 동료잖아. 하나 더 추가하자면, 나와 또래가 비슷한 맘에 드는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그렇지만 제가 왜 마음에 드세요?”

“네겐 전사의 기상이 있어. 그건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토르는 혹시 그 동안 자신이 리스 왕자를 쭉 알고 지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이상한 착각이었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선 리스 왕자가 친형제 같았다. 처음으로 느낀 형제애였다. 친형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좋은 느낌이었다.

“나머지 형들은 개리스 형하고는 달라, 걱정 마.”

토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두 사람 주변에 무리 지어 모여들었다.

“오늘 네가 만난 캔드릭 형이 제일 사람이 좋아. 우리 어머니 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겐 한 배에서 나온 형이나 다름없어. 개리스 형하고 비교도 안될 만큼. 캔드릭 형은 내게 제2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야. 네게도 분명 그런 존재가 돼줄 거야. 형은 날 위해 뭐든지 다 해줘.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고. 형은 백성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어. 형이 왕이 될 수 없다는 건 정말 큰 손실이지.”

“형들 이라고 하셨죠. 또 다른 왕자님께서 계세요?”

리스 왕자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형이 한 명 더 있지. 그렇고말고. 많이 친하지는 않아. 고드프리 형은 애석하게도 평민들과 술집을 다니며 세월을 허비해. 전사도 아니고. 전사 따윈 관심도 없어. 아무데도 관심이 없어. 술과 여자 외엔.”

갑자기 한 소녀가 나타나 두 사람 앞을 막아 섰다. 순간 토르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토르보다 한두 살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아름다운 두 눈동자는 푸른 빛을 띠었고 윤이 나는 매끈한 피부에 기다랗게 늘어뜨린 빨간 머리가 매혹적이었다. 레이스로 장식된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는, 기쁨과 장난기 속에서 춤을 추는듯한 생기 넘치는 두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 토르는 시선을 마주한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버렸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녀에게 완전히 매료 당했다.

소녀가 웃었다. 새하얀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토르가 이미 첫 눈에 반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미소 하나만으로도 토르는 완전히 소녀에게 사로잡혀버렸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가슴이 두근거려본 적이 없었다.

소녀 앞에 선 토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내 소개 안 해줄 거니?”

소녀가 왕자에게 물었다. 소녀의 목소리가 토르의 귀에 맴돌았다. 상상했던 목소리보다 훨씬 더 감미로웠다.

리스 왕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이 내 누이.”

왕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웬 누나, 이쪽은 토르. 토르, 이쪽은 그웬.”

그웬 공주가 인사를 건넸다.

“이곳은 마음에 드니?”

공주가 웃으며 물었다.

토르는 얼어붙은 채 서 있기만 했다. 결국 공주가 킥킥 웃었다.

“과묵한 성격인가 봐.”

공주가 웃으며 얘기했다.

얼굴이 빨개진 토르가 목을 가다듬었다.

“아……저……죄송……해요. 저는 토르에요.”

공주가 킥킥 웃었다.

“이미 알고 있어”

그웬 공주는 리스 왕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리스야, 네 친구가 드디어 말을 했어.”

“아버지께서 토르를 빨리 보고 싶어하셔. 너무 지체했어.”

왕자의 목소리게 초조함이 묻어났다.

토르는 공주와 계속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공주를 만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공주가 길을 막아 서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꿀 먹은 벙어리가 따로 없었다. 이렇게까지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뱉은 말은 고작 이거였다.

“감사합니다.”

공주가 킥킥거리다 결국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감사하다는 거니?”

공주의 눈이 반짝였다. 이 상황을 재미있어했다.

토르는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음……잘 모르겠어요.”

토르가 얼버무렸다.

공주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고 토르는 창피했다. 리스 왕자는 토르의 팔꿈치를 잡아 재촉하며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뒤 토르는 어깨 넘어 공주를 돌아봤고 공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토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토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벙어리처럼 말이 안 나온 게 너무 민망했다. 토르는 한번도 또래 여자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는 또래 여자애들이 없었다. 더군다나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토르는 여자 앞에서 어떻게 얘기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누나는 수다쟁이야, 신경 쓰지마.”

“그분의 이름이 뭐죠?”

왕자의 표정이 우스꽝스러워졌다.

“누나가 아까 말해줬잖아!”

리스 왕자는 웃어버렸다.

“죄송해요……저……까먹었어요.”

“그웬돌린. 다들 그웬 공주라고 불러.”

그웬돌린. 토르는 마음속으로 이름을 반복해 외쳤다. 그웬돌린. 그웬.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세기고 싶은 이름이었다. 혹시 다시 볼 기회가 있을지 궁금했다. 허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평민인 토르의 신분 때문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속이 상했다.

어느덧 주변이 조용해진 까닭에 고개를 들어 보니 왕좌가 눈앞에 가까이 있었다. 그 위로는 맥길 왕이 자리해 있었다. 왕실의 보라색 장막을 두르고 왕관을 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리스 왕자는 왕 앞에 무릎을 꿇었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토르도 왕자를 따라 무릎을 꿇자 연회실에 정적이 흘렀다.

왕은 목을 한번 가다듬은 뒤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왕의 목소리가 연회실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서부 왕국 남부 주, 로우랜드 출신 토르그린. 네가 오늘 왕실의 마상경기에 개입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침이 바짝 말랐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폐하의 첫 질문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처벌을 받게 될까 두려웠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의도한 게 아니었습니다.”

왕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한쪽 눈을 치켜세웠다.

“의도한 게 아니라고? 에레크 장군을 구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는 말인가?”

토르는 당황했다. 왕이 그를 궁지로 모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폐하. 의도한 거였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왕실의 경기에 개입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인가?”

토르는 너무 떨렸다.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그저…… 돕고 싶었습니다.”

“돕고 싶었다?”

왕이 되받아 치며 몸을 젖히고 호탕하게 웃어댔다.

“돕고 싶었다니! 에레크 명장을! 제일 뛰어나고 제일 명망 높은 전사를!”

연회실이 웃음으로 넘쳐났다. 토르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렇게 얼굴이 여러 번 달아오른 하루는 처음이었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앉아 놀림만 당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일어나 가까이 오거라, 젊은 친구”

왕이 명령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왕이 웃으며 쳐다보는 모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르는 서둘러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왕은 토르를 유심히 살폈다.

“얼굴에 고귀함을 품었구나. 보통의 소년과는 다르구나. 확실하게 달라……”

왕이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었다.

“에레크 명장은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전사이다. 오늘 아주 훌륭한 일을 해 주었어. 우리 모두에게 말이야.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오늘부터 너를 가족으로 삼겠다. 나의 왕자들과 똑같이 존경 받고 똑같은 영예를 누리게 될 거다.”

왕이 앞으로 몸을 일으켜 크게 외쳤다.

“이를 공표하라!”

연회실이 엄청난 환호성으로 가득 울렸다.

토르는 주위를 둘러봤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왕족이 된다니. 토르가 꿈꿔온 것에 비해 분에 넘쳤다. 그가 원했던 건 그저 왕의 부대에 선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그 이상이었다. 감사함과 기쁨만이 가득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했다.

차마 대답도 올리기 전에 연회장에 음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토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수라장 같았다. 왕을 올려다본 토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왕의 시선에서 애정과 흠모와 포용을 느꼈다. 살면서 부성애란 걸 느껴본 적이 없는 토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토르는 왕이 아닌 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 하루 만에 토르의 세상이 바뀌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

그웬돌린 공주는 토르가 궁궐 밖으로 나가기 전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 틈에서 인파를 가르고 있었다. 토르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고 마음 속에서 토르의 이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토르를 본 이후부터 계속 토르만 생각날 뿐이었다. 공주보다 어리긴 했지만 그래 봤자 겨우 두 살 차이였고 게다가 토르에게 선 성숙함이 풍겼다. 또래보다 의젓했고 깊이 있는 사내였다. 공주는 첫눈에 이미 토르에게서 오랜 친숙함을 느꼈다. 토르와의 만남을 곱씹다가 빨개진 토르의 얼굴이 떠오를 땐 공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공주는 토르의 눈빛을 통해 토르도 공주와 같은 마음일거라 짐작했다.

토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공주도 마상장에서 벌어졌던 일을 목격했고 동생 리스 왕자가 토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는 알고 있었다. 토르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줄곧 토르를 주의 깊게 살펴봤다. 분명 토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보였다. 게다가 토르와의 만남 후 공주는 확신이 들었다. 토르는 확실히 이곳 왕실에서 태어나 자란 모든 왕족과는 달랐다. 그는 외지인이었다. 또 평민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의 행동에선 고귀함이 묻어났다. 마치 토르 스스로 자신에게 큰 자부심을 가진 것 같았다.

공주는 위층 발코니 끝으로 자리를 옮겨 아래를 내려다봤다. 눈 밑에 펼쳐진 왕궁의 전경 속에 떠나는 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리스 왕자가 토르의 옆에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나머지 부대원들처럼 훈련을 받기 위해 막사로 가고 있었다. 급격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벌써 머릿속으로 토르를 다시 만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공주는 토르라는 아이가 몹시 궁금했고 이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실의 모든 일과 모든 사람들을 다 알고 있는 한 사람과의 대화가 절실했다. 바로 공주의 어머니.

공주는 다시 뒤돌아 인파 속을 헤쳤다. 궁전 뒤 복도를 지나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걸음을 재촉했다. 현기증이 났다. 어지러운 하루였다. 우선 왕과의 접견에서 왕국을 통치하라는 생각지도 못한 결정을 들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을 무방비 상태로 접해버렸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뿐이었다. 어떻게 공주가 왕국을 다스린단 말인가?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며 생각을 접으려고 애썼다. 여전히 아버지는 건강했고 기력 또한 좋았다. 공주는 그 누구보다 아버지가 오래 살길 바랬다. 그녀의 곁에서, 행복하게 말이다.

여전히 오늘 아침 집회실 일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의 결정은 미래를 기다리며 조용히 잠복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공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만들게 뻔했다. 아버지의 후계를 잇게 되는 것이다. 공주의 오빠들 중 하나가 아닌, 바로 공주 자신이. 두려움이 몰려오는 한편 스스로가 중요하게 느껴졌고 그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자신감도 생겨났다. 왕의 판단으론 공주가 나라를 다스리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형제들 중 가장 현명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공주는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덕에 걱정이 앞섰다. 여자의 몸으로 왕위를 계승하면 어마어마한 원한과 시샘을 불러 일으킬게 뻔했다. 이미 개리스 왕자의 질투가 시작됐다. 공주는 바로 그 사실이 무서웠다. 공주는 개리스 왕자가 끔찍하게 교묘하고 완벽하게 관용이 없는 인물이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게 뻔했고 결국 이 일로 개리스 왕자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사실에 공주는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개리스 왕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왕자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선형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돌 계단을 디딜 때마다 발소리가 울렸다. 또 다른 복도를 지나 예배당 뒤를 가로질러 또 다시 문을 통과했다. 여러 경비병을 지나쳐 궁궐의 비공개 회의실로 들어갔다. 왕비는 대외적인 공무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언제나 그런 자리를 일찌감치 피하고 개인 회의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공주는 경비병을 지나 또 다른 복도로 내려가 왕비의 드레스 룸에 도착했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내 멈췄다. 문 밖으로 나지막이 들려온 언성 덕에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왕비가 언쟁 중이었다. 공주가 귀를 기울이자 왕의 목소리가 들었다. 부모님께서 다투고 계셨다. 그런데 대체 왜?

자신이 엿들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궁금함을 견딜 수 없었다. 손을 뻗어 철 손잡이를 잡고 묵직한 참나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주 약간의 틈만 만들어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그 아이를 절대 궁궐에 들일 수 없어요.”

왕비가 왕을 향해 톡 쏘아댔다.

“상황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성급하게 반대부터 하는군.”

“다 알고 있어요. 넘칠 만큼 잘 알고 있어요.”

왕비의 말투에 독기가 가득해 공주는 깜짝 놀랐다. 부모님이 다투는 일은 거의 일이 없었다. 평생 손에 꼽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이토록 격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궁금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막사에서 지내게 하세요. 궁으로 들어오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아시겠어요?”

“궁은 매우 넓잖소, 당신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오.”

“제 눈에 띄든 아니든 상관 없어요. 그 아이가 이곳에 머무는 게 싫어요. 폐하가 저지른 일이에요. 폐하께서 그 아이를 이곳에 들이도록 허락하셨잖아요.”

“당신도 다 잘하는 건 아니오.”

왕이 맞받아쳤다.

발소리가 들렸고 왕이 방을 가로질러 반대쪽 문으로 나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며 어마어마한 소리에 방 전체가 울렸다. 왕비는 방 한가운데 홀로 남겨져 눈물을 떨궜다.

공주는 괴로웠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자리를 뜨는 게 제일 좋았겠지만 왕비가 우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무엇 때문에 부모님께서 서로 언성을 높이셨는지 궁금했다. 토르 때문일 거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께서 왜 신경을 쓰시는 건가? 왕궁에 사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은데.

역시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두고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어머니를 위로해드려야 했다. 공주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삐걱하는 문소리에 무방비 상태로 있던 왕비가 돌아봤다. 공주임을 확인하자 인상이 찌그러졌다.

“노크 할 줄 모르니?”

왕비의 어조에 노여움이 가득해 공주는 속상했다.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말씀 나누시는 걸 들었어요.”

“그래, 엿들어선 안됐어.”

왕비가 쏘아붙였다.

공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는 가끔씩 다가가기 힘들었지만 이 정도인 적은 없었다. 왕비의 노여움에 가까이 가려던 공주는 그 자리에 멈췄다.

“새로 온 아이 토르 때문인가요?”

왕비는 뒤돌아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아냈다.

“왜 그러시는 모르겠어요, 그 아이가 머무는 곳이 왜 신경 쓰이시는 거죠?”

“내 일에 상관하려 들지 말거라.”

왕비의 말투가 차가웠다.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용건이 뭐지? 여긴 왜 온 거니?”

공주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에게 토르에 대한 모든 걸 말해달라고 왔지만 때를 잘못 맞춰 온 꼴이었다. 망설이던 공주는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은……어머니께 토르에 대해 여쭤보러 왔어요. 그 아이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요?”

공주를 돌아본 왕비는 커다란 의구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물어보는 왕비의 어조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공주는 왕비가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왕비가 가진 초자연적인 직관력을 발휘해 공주의 눈을 들여다보며 토르를 좋아하는 공주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토르에 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냥 호기심이에요.”

공주의 대답이 설득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순간 왕비가 공주에게 다가가 거칠게 공주의 팔을 잡고 얼굴을 주시했다.

“잘 들어둬.”

왕비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두 번 얘기하는 일 없을 거야. 그 아이를 가까이 하지 말거라. 알아듣겠니? 어떤 상황에서도 그 아이와 가까이하는 건 용납 못한다.”

공주는 겁에 질렸다.

“도대체 왜요? 그 아이는 영웅이에요.”

“그 아이는 우리와 달라.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던 난 네가 그 아이와 거리를 두길 원해. 알겠니? 맹세하렴. 지금 당장 맹세해.”

“맹세하지 않을 거예요.”

공주는 있는 힘껏 몸부림 쳐 왕비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 아이는 평민이야, 넌 공주고. 공주라는 사실을 기억해라. 알아 듣겠니? 그 아이 근처에 얼씬이라도 하는 날엔 두 번 다신 그 아이가 이곳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거다. 알겠니?”

공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왕비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제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마세요, 어머니.”

공주는 최대한 용기 있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음 속으론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토르에 대한 궁금증에 이곳에 왔지만 이젠 그게 겁이 났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그러나 그 아이의 운명은 네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달렸다. 명심하렴.”

제 10장

맥길 왕은 연회장에 앉아 신하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맡은 편에는 맥클라우드 왕이 앉아 있었고 그 사이로 양쪽 가문을 대표하는 수백 명의 신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혼식 축제의 환락은 몇 시간이나 계속 이어졌고 두 왕국 사이의 긴장감도 마상경기 이후 수그러들었다. 맥길 왕이 예상했듯이 모두에게 필요했던 건 술과 만찬과 유흥이었고 이로써 각국 백성들이 서로에 대한 견제를 완전히 풀었다. 이들은 모두 같은 테이블에 앉아 형제라도 되는 냥 어깨동무를 나눴다. 이들을 내려다보는 맥길 왕 조차 눈 앞의 신하들이 다른 왕국 출신이라는 걸 구분할 수 없었다.

맥길 왕은 오명을 벗은 듯 개운했다. 결국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 벌써부터 두 국가의 관계가 긴밀하게 느껴졌다. 선대 왕들이 그 동안 풀지 못한 난제를 왕이 해결했다. 선대 맥길 왕들은 모두 링 대륙의 두 국가를 단결시키려 애썼다. 동반자 관계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서로에게 평화로운 이웃국가가 되길 바랬다. 맥길 왕의 첫째 딸 루안다 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맥클라우드 왕의 장자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맥길 왕의 죄책감이 한층 덜렸다. 비록 루안다 공주를 맥클라우드 왕가에 시집 보냈지만 적어도 왕은 공주가 원하던 여왕의 지위를 얻을 수 있게 해줬다.

맥길 왕은 그 동안 벌였던 자문단과의 언쟁을 회상했다. 두 왕국의 결속을 이루기 위해 왕은 모든 자문단의 의견을 거스르고 뜻대로 일을 진행했다. 이렇듯 두 왕국의 평화는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니었다. 그나마도 언젠가 때가 되면 맥클라우드 왕은 하이랜드 산악지대의 경계선에 이이를 제기할 것이고 이 결혼의 의미도 금새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낼 게 뻔했다. 이 모든걸 생각 못할 정도로 맥길 왕이 순진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두 왕족 사이에 가족의 연이 생겼다. 특히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가 갖는 의미를 쉽게 간과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두 왕족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가 장성해 왕이 된다면 언젠가 양국이 통일 될 가능성도 있었고 더불어 하이랜드 경계선도 더 이상 의미가 무색해질 것이다. 또한 영토는 단일 국가의 통치하에 더욱 번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맥길 왕의 염원이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모든 후손들을 위한 염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링 안의 대륙이 강하게 결속해 링 대륙 가장자리에 있는 무리들에 맞서 캐니언 협곡이 건재하도록 방어해야 했다. 두 왕국이 결속하지 않는다면 링 대륙 내부의 취약점만 드러내는 꼴 이였다.

“건배.”

맥길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수백 명의 시중들이 일제히 쫓아 일어나 포도주 잔을 들어 올렸다.

“첫 째 공주의 혼례를 위해! 서부 왕국과 동부 왕국의 결속을 위해! 링 대륙의 평화를 위해!”

“옳소, 옳소!”

모두가 입을 모아 합창했다. 모두가 잔을 비웠고 연회장은 또다시 웃음과 축제의 즐거움으로 활기가 돌았다.

맥길 왕은 다시 착석해 나머지 자식들을 찾아 연회실을 둘러봤다. 예상대로 고드프리 왕자는 양 손에 술잔을 쥐고, 양 팔에 한 명씩 여자를 끼고, 사기꾼 같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오늘의 피로연은 고드프리 왕자가 자진해서 참석한 몇 안 되는 왕실 행사였다. 개리스 왕자는 펄스 가까이에 앉아 그와 귓속말을 나눴다. 개리스 왕자의 눈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걸로 보아 뭔가 음모를 꾸미는 게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왕은 속이 불편해져 고개를 돌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 가장 어린 리스 왕자가 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 토르와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왕은 이미 토르가 자식처럼 여겨졌다. 덕분에 막내 왕자가 토르와 빠르게 가까워지는 걸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그웬돌린 공주를 찾아봤다. 공주는 한쪽에서 시녀들과 둘러앉아 웃어대고 있었다. 왕은 공주의 시선을 쫓았고 공주가 주시하는 사람이 토르임을 확인했다. 꽤 오랫동안 공주를 관찰한 결과 왕은 공주가 토르에게 푹 빠진걸 알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불길했다. 왕비를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요.”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돌아보니 아르곤이 피로연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소? 왕국의 평화는 지속되겠소?”

“평화는 절대 한곳에 머무르지 않죠. 썰물처럼 빠지고 파도처럼 출렁이죠. 눈 앞에 보이는 건 평화의 겉모습일 뿐이죠. 평화의 한 단면에 불가해요. 폐하께서는 수백 년간 이어진 대립관계를 억지 평화로 덮으려 하고 계시죠. 수백 년 동안 흘려온 피를 잊지 마세요. 영혼들이 복수를 울부짖고 있어요. 결혼식 하나로 달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오?”

맥길 왕은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불안했다. 아르곤과 함께 있을 때 종종 드는 감정이었다.

아르곤이 고개를 돌려 왕의 눈을 주시했다. 너무나 강력한 눈빛에 왕은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전쟁이 곧 닥쳐요. 동부왕국이 공격해올 겁니다. 대비해두세요. 눈 앞에 앉아있는 동부왕국의 신하들은 머지않아 사력을 다해 폐하의 식솔들을 죽이려 할 거에요.”

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들에게 공주를 보낸 게 잘못된 결정이란 말인가?”

아르곤은 잠시 침묵에 잠겨있다 입을 열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르곤이 고개를 돌리자 맥길 왕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마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묻고 싶은 질문이 수천 개가 넘었지만 왕은 자신이 답을 들을 준비가 되기 전엔 마법사로부터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하리란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대신에 왕은 아르곤의 시선을 살펴 그가 그웬돌린 공주와 토르를 주시하는 걸 확인했다.

“저 두 사람이 맺어지는가?”

“아마도요. 허나 아직도 많은 것들이 결정되지 않은 채로 있군요.”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하는군.”

아르곤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왕은 그가 더 이상은 얘기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오늘 마상장에서 일어난 일을 보았소? 저 아이의 일을?”

“이미 오래 전에 예상했던 일이지요.”

“어떻게 생각하오? 저 아이가 가진 힘은 무엇이오? 자네와 같은 존재인가?”

아르곤은 다시 고개를 돌려 왕의 눈을 주시했다. 역시나 너무 강렬해 맥길 왕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해버렸다.

“저 아이는 저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놀란 왕이 다시 아르곤의 눈을 쳐다봤다. 아르곤이 이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훨씬 강하다고? 자네보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네는 왕의 마법사야. 이 땅에 자네보다 강한 존재는 없지 않나.”

아르곤이 또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힘이란 일관적인 모습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지요. 저 아이는 폐하께서 상상하시는 것 이상의 힘을 지녔어요. 저 아이조차 상상도 못하는 힘이죠. 저 아이는 자신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죠. 어디서 왔는지 조차요.”

아르곤이 고개를 돌려 왕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죠.”

왕이 영문을 모른 채 아르곤을 바라봤다.

“짐이? 말을 해주게, 알아야겠네.”

아르곤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느끼는 감정을 따르세요. 그 감정이 진실입니다.”

“저 아이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겁니다. 또 훌륭한 전사도 되겠지요. 혼자 힘으로 왕국들을 이끌 겁니다. 폐하의 왕국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훌륭하게요. 또한 폐하보다 훨씬 훌륭한 왕이 될 거에요. 그게 저 아이의 운명이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왕은 통제할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왕은 시선을 옮겨 토르를 관찰했다. 토르는 왕의 부대 테이블에서 리스 왕자와 나란히 앉아 순진하게 웃고 있었다. 도대체 아르곤의 말이 가능하긴 한 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토르는 이제서야 겨우 왕의 부대에 합류한 어린 사내였다. 혹시 아르곤이 틀린 게 아닌가 왕은 잠시 의구심을 품었다.

“왜 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오?”

아르곤이 왕의 두 눈을 주시했다.

“이젠 폐하께서 준비하실 차례이기 때문이죠. 저 아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모든 게 최고로 갖춰줘야 해요. 그건 폐하의 몫입니다.”

“짐의 몫? 저 아이의 아비는 무얼 하고?”

“아비라고 하셨나요?” 아르곤이 되물었다.

제 11장

어지러운 상태로 눈을 뜬 토르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바닥 위에 짚 더미를 깔고 누워있었고 얼굴은 옆으로 눌린 채 양 팔은 머리 위로 아무렇게나 뻗어있었다. 몸을 조금 일으켜 흘린 침을 닦은 순간 눈 뒤에서부터 극심한 두통이 급습했다. 이렇게 끔찍한 두통은 처음이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폐하가 베푼 연회와 생애 첫 음주가 생각났다. 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갈증으로 목이 바짝 탔고 두 번 다신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디에 있는 건지 알고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이 사람들로 가득했고 모두 쌓아 올린 짚 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반대편을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리스 왕자가 골아 떨어져 있었다. 토르가 있는 곳은 막사였다. 왕의 부대 부대원들을 위해 마련된 막사였다. 주변엔 모두 토르 또래의 부대원들이었다. 대략 50명은 족히 돼 보였다.

새벽에 리스 왕자가 토르를 이곳으로 데려온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오자마자 짚 더미 위로 쓰러졌던 것이다. 이른 아침이었고 햇살이 창으로 쏟아져 내렸다. 깨어나 있는 사람은 토르 뿐이었다. 옷을 입은 채로 잠들었었다. 토르는 손을 뻗어 기름진 머리를 쓸었다. 몸을 씻고 싶었지만 샤워장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당장 물 한잔만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났다. 허기가 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막사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쯤인지도 알 수 없었고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궁금했으며 부대원이 정확히 무얼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행복했다. 휘황찬란한 하루를 보냈고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리스 왕자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 것도 모자라 자신을 주시하는 그웬돌린 공주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공주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용기가 사라졌다. 생각하니 후회가 막심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만약 단 둘만 있었다면 충분히 용기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긴 한 것일까?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누군가 막사 문을 세차게 두드렸고 얼마 있지 않아 나무문이 쾅 하고 열리며 빛이 들어왔다.

“기립하라, 부대원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12명의 실버 대원들이 막사 안으로 행군했다. 입고 있는 갑옷에서 찰랑찰랑 소리가 날 정도로 나무 벽을 금속 막대기로 두드려댔다. 토르를 비롯한 모든 부대원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사령관은 화가 잔뜩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젯밤 원형경기장에서 토르와 마주했던 사령관이었다. 땅딸막한 체구에 코 위에 흉터가 있는 대머리. 리스 왕자가 사령관의 이름이 콜크라고 살짝 일어줬다.

콜크 사령관은 토르에게 화가 잔뜩 난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은 토르를 지목하고 있었다.

“거기, 부대원!”

사령관이 소리쳤다.

“기립하라고 했다!”

토르는 혼란스러웠다. 이미 기립해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하신 대로 기립했습니다, 주군,”

사령관은 가까이 다가서더니 손가락 하나로 토르의 얼굴을 쭉 밀었다. 모두가 토르를 쳐다보는 가운데 토르는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 다신 상관에게 말대꾸하지 말라!”

사령관이 꾸짖었다.

토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사령관은 토르를 지나쳤다. 방안을 지나다니며 부대원들을 한 명씩 훈계했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부대원들은 사령관의 발에 갈비뼈를 사정없이 채였다.

“걱정 안 해도 돼.”

안심하라는 말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리스 왕자가 옆에 서 있었다.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원래 이런 식이야. 우릴 길들이는 거야.”

“그렇지만 왕자님껜 안 그러잖아요.”

“물론 그렇긴 해, 내게 손을 못 대지. 난 왕자잖아. 그렇지만 내게도 다른 부대원들 대하듯 함부로 대해. 군기를 잡는 거야. 이렇게 하면 군기가 바짝 들거라 생각하나 봐.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

토르와 리스 왕자를 비롯한 모든 부대원들이 막사 밖으로 행군했다. 밖으로 나서자 거침없는 땡볕이 토르를 덮쳤다. 얼굴이 일그러진 토르는 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순간 현기증이 밀려와 몸을 가눌 수 없었고 곧장 뒤돌아 허리를 숙이고 구역질을 했다.

주변에 있던 부대원들이 히죽히죽 비웃었다. 실버 대원이 토르를 거침없이 밀었고 토르는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시 대열에 합류했다. 토르는 손으로 입을 닦았다. 이렇게 거북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토르의 옆에서 리스 왕자가 미소를 지었다.

“어제 저녁 힘들었지, 안 그래?”

왕자는 미소를 가득 짓고선 팔꿈치로 토르의 갈비뼈를 살짝 건드렸다.

“두 잔째 이후론 내가 마시지 말라고 말렸잖아.”

땡볕에 눈이 부시자 토르는 더욱 메스꺼웠다. 오늘따라 유난히 햇볕이 강했다. 벌써부터 무더웠고 가죽옷 안으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리스 왕자가 말렸던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토르는 어젯밤 일이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 절 말리신 기억이 없어요.”

왕자는 더욱 크게 미소를 지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네가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계속 마셔댔으니까 기억이 안 나는 거야. 게다가 내 누나한테 말을 걸어 보겠다는 어설픈 시도도 그렇고. 정말 엄청 측은했어. 내 생에 여자 앞에서 그렇게 겁을 집어먹은 사람은 처음이었다니까.”

얼굴이 빨개진 토르는 어젯밤 일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모든 게 희미하고 어렴풋한 기억뿐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으셨기 바래요, 공주님 일이요.”

“기분 나쁘지 않아. 만약 누나가 널 선택한다면 난 정말 기쁠 거야.”

부대원들을 언덕 위로 행군을 이어갔다. 덕분에 토르와 리스 왕자도 속도를 높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태양은 더욱 강렬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충고는 해 줘야겠어. 왕국의 모든 남자들이 누나를 마음에 두고 있어. 누나가 널 선택할 확률은…… 음, 희박하다고 해 두자.”

왕실의 푸른 언덕 위로 행군이 이어졌다. 토르는 마음이 놓였다. 리스 왕자로부터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이상하게도 토르는 계속해서 리스 왕자에게 형제애를 느꼈다. 계속되는 행군 속에서 토르의 친형들이 토르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그 중 한 명이 몸을 돌려 토르를 노려보고 다른 형제를 쿡 찔렀다. 이번엔 그 형이 토르를 돌아보며 조롱의 미소를 보냈다. 이들은 토르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토르에게 친절한 말 한마디 건넬 의사가 없었다. 토르 또한 형들로부터 일말의 따뜻함도 기대하지 않았다.

“열을 맞춰라, 부대원들! 당장!”

고개를 들어보니 몇몇 실버 대원들이 50여명의 부대원들을 이열 종대로 세우고 있었다. 대원 한 명이 앞으로 다가와 대나무로 토르 앞 부대원의 등을 세게 내리쳤고 부대원은 훌쩍거리며 좀 더 안쪽으로 줄을 섰다. 얼마 후 부대원들은 모두 반듯한 두 줄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전장으로 행군할 때는 모두 하나의 움직임이 돼야 한다!”

콜크 사령관이 행군 대열 옆으로 발을 맞추며 외쳤다.

“이곳은 너희들 고향 땅이 아니다. 너희들은 전장에 나서는 길이다!”

토르는 왕자 옆에서 행군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제 마신 술로 속이 좋지 않았고 아침 식사는 언제쯤인지, 물은 언제쯤 마실 수 있을지 애만 태웠다. 다시 한번 어젯밤 술을 마신 자신이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언덕의 정상에 도착한 뒤 다시 하강해 석조 원형 입구를 지나 마침내 원형 경기장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원형 석조 문을 지나고 나서야 부대원들은 원형 경기장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왕의 부대 훈련장이었다.

눈 앞엔 창 던지기, 활 쏘기, 돌 던지기 연습을 위한 온갖 종류의 과녁이 마련돼 있었고 검 연습용 짚 더미도 보였다. 눈 앞의 장면에 토르는 설렜다. 어서 달려가 무기들을 다뤄보고 훈련을 받고 싶었다.

훈련장을 향해 걸어가는 토르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뒤에서 팔꿈치로 찔렀다. 돌아보니 토르 또래이거나 토르보다 어려 보이는 여섯 명의 부대원들이 행렬 대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토르는 리스 왕자와 떨어져 훈련장 반대쪽 운동장으로 향해야 했다.

“훈련을 받을 거라 생각했나?”

콜크 사령관이 조롱하듯 말을 건넸다. 토르의 무리는 행렬 대열과 분리되어 과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오늘 네 할 일은 말을 돌보는 것이다.”

토르는 고개를 들어 어디로 가는지 살폈다. 저 멀리에서 말 몇 마리가 뛰고 있었다. 사령관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토르를 내려봤다.

“다른 부대원들이 창을 던지고 검을 휘두르는 동안, 너희들은 말을 돌보고 배설물을 치워라. 이것이 이제 막 들어온 너희들을 위한 일이다.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된 걸 환영한다.”

토르는 낙담했다.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네가 특별한 것 같지?”

사령관이 뒤에서 쫓아와 그의 얼굴을 토르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토르는 사령관이 자신을 길들이려 한다는 것 알 수 있었다.

“폐하와 왕자님께서 널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해서 내가 눈 하나 깜빡 할 줄 알아. 넌 내 담당이야. 알겠어? 네가 마상장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건 상관없어. 넌 그저 다른 부대원들하고 똑같아. 내 말 알아 듣겠나?”

꿀꺽하고 침을 넘겼다. 토르는 이제 막 길고도 험한 훈련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사령관이 다른 부대원을 괴롭히려 자리를 뜨자 토르 앞에 있던 납작한 코에 키가 작은 부대원이 토르를 비웃어댔다.

“넌 여기 있을 자격 없어.”

작은 부대원이 말을 건넸다.

“넌 부정행위로 여기 들어온 거야. 선발되지도 못했잖아. 넌 우리랑 달라. 우리 모두 다 네가 못마땅하다고.”

그 옆에 서 있던 부대원도 토르를 비웃었다.

“네가 여기서 제 발로 나가도록 최선을 다해줄게. 들어오는 건 쉬웠지만 머무는 건 그렇지 않을 거야.”

이들의 적대감에 토르는 흠칫 놀랐다. 벌써부터 이렇게 많은 적이 생겼다는 게 믿기 힘들었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미움을 받는지 궁금했다. 토르가 원한 건 단지 왕의 부대에 합류하는 것뿐이었다.

“너희들이나 잘 해.”

누군가가 부대원들에게 말을 건넸다.

쳐다보니 큰 키에 삐쩍 마른 빨간 머리 소년이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에 초록 눈을 작게 뜬 소년이 토르의 편을 들어줬다.

“어서 이리 와서 너희들 삽질이나 해. 너희들도 특별한 거 없잖아. 다른데 가서 시비 걸어.”

“남의 일에 신경 꺼, 종놈아. 아니면 너도 괴롭힘 당할 줄 알아.”

토르를 비난하던 부대원 한 명이 맞받아쳤다.

“해봐.”

빨간 머리 소년은 끄떡도 안 했다.

“내 허락 없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콜크 사령관이 저 멀리서 부대원 한 명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그 덕에 토르 앞에 서있던 두 부대원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토르는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도움을 준 빨간 머리 소년이 너무 고마웠다.

“고마워.”

빨간 머리 소년은 토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난 오코너야. 악수라도 나누고 싶은데 그러면 사령관님이 쥐어박을지도 몰라. 악수 대신 이걸로 대신하자.”

오코너가 입을 크게 벌리고 미소를 지었고 토르는 그런 오코너가 마음에 들었다.

“쟤들 신경 쓰지마, 쟤들도 단지 겁먹어서 그런 거야. 여기 있는 다른 애들처럼.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앞으로 우리한테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정확히 모르거든.”

토르의 무리는 운동장 끝에 도착했다. 뛰어다니는 말을 세어보니 총 여섯 필이었다.

“고삐를 잡아라!”

사령관이 명령했다.

“고삐를 꽉 잡고 말들이 멈출 때까지 경기장을 돌아. 당장 실시한다!”

토르는 앞으로 나서 말의 고삐를 잡았고 순간 말이 뒤로 물러서며 발을 굴렀다. 자칫하면 말에 채일뻔한 상황이었다. 깜짝 놀란 토르는 뒤로 비틀거렸고 나머지 부대원들이 그를 보고 웃어댔다. 콜크 사령관이 뒤에서 토르를 세게 쥐어박았다. 토르는 사령관을 똑같이 때려주고 싶었다.

“넌 왕의 부대 부대원이다. 절대 후퇴란 없다. 누구로부터도.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그 어떤 짐승으로부터도. 당장 고삐를 잡아라!”

토르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말에게 다가가 날뛰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이번에는 말의 고삐를 놓치지 않고 잘 쥐었고 각자 말을 끌고 가는 부대원의 대열에 합류해 경기장을 돌기 시작했다. 말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저항했지만 토르도 고삐를 잡고 포기하지 않았다.

“점차 나아질 거야, 믿어봐.”

토르의 뒤로 오코너가 웃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말들이 오히려 우릴 길들이려 하는 거야, 알지?”

난데없이 토르의 말이 갑자기 멈춰 섰다. 아무리 세게 고삐를 잡아 끌어도 꿈쩍도 안 했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 말은 도저히 믿기 힘들 만큼 많은 배설물이 배출하고 있었다. 끝도 없이 계속 나왔다.

누군가 토르의 옆구리에 작은 삽을 내밀었다. 돌아보니 콜크 사령관이 웃으면서 토르를 내려보고 있었다.

“치워라!”

제 12장

개리스 왕자는 붐비는 시장에 서 있었다. 한낮의 태양 볕에도 불구하고 외투를 착용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신분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왕자는 왕국 내부에서도 특별히 이곳을 꺼려했다. 복잡한 골목길에 사람냄새와 하층민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왕자의 주변에서는 사람들의 흥정이 오갔고, 거래가 이어졌으며, 서로 이득을 보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왕자는 골목 노점 앞에서 과일을 고르는 모양새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펄스가 서 있었다. 어두운 골몰길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펄스는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중이었다.

개리스 왕자는 등을 돌려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한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펄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펄스는 왕자에게 독약을 파는 장사치 이야기를 귀띔해주었다. 개리스 왕자가 세운 계략을 위해서는 강하고 확실한 독약이 절실했다. 한번에 끝낼 수 있는 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왕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릴게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독은 일반 약품 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왕자는 펄스에게 이 임무를 맡겼고 펄스는 암시장을 알아본 뒤 왕자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곳까지 이리저리 길을 안내한 펄스는 골목길 끝자락에서 행실이 의심쩍은 한 사내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사실 직접 나서 거래하길 원했다. 직접 나서 순조롭게 일을 진행하고, 행여 사기를 당하거나 가짜 독약을 거래하는 일이 없게끔 하고 싶었다. 게다가 왕자는 아직 펄스의 능력을 완전히 신임하지 못했다. 이런 일들은 직접 나서 해결하는 게 최선이었다.

30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장사치가 나타났다. 개리스 왕자는 북적거리는 시장 통에서 사람들 속에 몸을 숨기고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만약 들통난다면 눈앞의 길을 따라 골목길로 빠질 계획이었다. 그렇게 유유히 사라진다면 아무도 그를 쫓아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약병은 어디 있어?”

왕자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펄스가 장사꾼에게 물었다.

왕자는 몸을 약간 돌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조심하며 외투 사이로 몰래 훔쳐봤다. 펄스의 맞은편에 선 남자는 악마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단정하지 못한 매무새에 삐쩍 마른 몸, 움푹 페인 양 볼과 크고 검은 눈이 마치 쥐를 보는 것 같았다. 그자의 눈은 미동도 없이 펄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돈은 어디 있소?”

펄스는 주로 일을 망치는 데 능했기에 왕자는 이번만은 펄스가 실수 없이 이 일을 잘 처리하길 바랬다.

“약병을 주면 돈을 줄게.”

펄스가 굽히지 않았다.

‘좋아,’ 왕자는 펄스의 대답에 흡족했다.

“우선 약속한 금액의 절반을 주시오, 그럼 약병이 이디 있는지 말해 드리지.”

“어디 있는지?”

놀란 펄스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약을 준다고 했잖아.”

“약을 준다고 했소, 암 그랬지. 그렇지만 내가 약병을 가지고 올 거라고는 안 했잖소. 날 바보로 아시오? 주변이 온통 첩자인데. 당신 의도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큰 일을 꾸미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왜 독이 든 약병을 사려 하겠소?”

펄스가 멈칫했다. 왕자의 눈에 당황한 펄스가 보였다.

왕자는 이내 동전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펄스가 지갑에서 금화를 꺼내 남자의 손에 쥐어줘 버렸다.

왕자는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남자에게 속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점점 커졌다.

“블랙우드로 가시오.”

드디어 남자가 입을 열었다.

“5000미터 정도 간 후에 갈림길이 나오면 언덕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시오. 언덕 위에 또 다른 갈림길이 있소. 왼쪽 길을 따르시오. 아주 어두운 길을 계속해서 가다 보면 작은 빈터에 도착할 것이오. 거기 마녀의 오두막이 있소. 당신이 원하는 약병을 들고 마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모자 밑으로 지켜보던 왕자의 눈에 자리를 뜨려는 펄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손을 뻗어 펄스의 상의를 움켜 쥐었다.

“돈.”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나머지 돈을 주시오.”

펄스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를 본 왕자는 펄스에게 이 일을 맡긴 걸 끝내 후회했다. 겁에 질린 펄스의 모습에 남자는 좀 더 이득을 챙기려 들게 불 보듯 뻔했다. 펄스는 이런 일에 능숙하지 않았다.

“달라는 데로 돈을 다 줬잖아.”

펄스가 고조된 목소리로 항의했다. 여자 같은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더 대담해졌다.

남자가 씩 웃었다, 악마가 따로 없었다.

“더 줘야겠는걸.”

겁에 질려 불안한 펄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려 왕자를 쳐다봤다.

왕자는 성급히 몸을 돌렸다. 때맞춰 시선을 피했기를 바랬다. 남자가 자신을 보지 못했기를 기도했다. 펄스는 어쩜 저리 어리석은 것인가? 왕자는 이 일로 펄스를 버리게 되진 않을까 스스로 염려했다.

기다리는 내내 왕자의 심장이 요동쳤다. 초초한 손으로는 과일을 만지며 한창 과일을 고르는 척 했다. 등 뒤로는 계속 침묵이 이어졌기에 왕자로서는 일이 완전히 어긋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절대 그 남자를 이쪽으로 오게 해선 안돼,’ 왕자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뭐든지 할게. 계획을 철수할게.’

누군가가 뒤에서 왕자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이에 왕자는 뒤를 돌아봤다.

장사꾼의 커다랗고 영혼 없는 검은 눈동자가 왕자를 마주했다.

“일행이 있다는 말은 안 했잖소, 첩자인가?”

남자의 어조가 사나웠다.

왕자가 막을 새도 없이 남자는 팔을 뻗어 왕자의 모자를 벗겼다. 왕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남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왕자님.”

남자가 비틀거렸다.

“여기서 무얼 하시는 거죠?”

이내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를 짐작하는 듯 했다. 남자의 질문에 남자는 스스로 답을 찾은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살짝 지었다. 남자는 왕자의 계략을 한 순간에 꿰뚫었다. 왕자의 바램과 다르게 남자는 너무 영리했다.

“이제 알겠어요, 이 약은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거죠, 그렇죠? 누군가를 독살하시려고 하는 군요, 그렇죠? 근데 누구를? 음, 이게 관건이군요……”

불안해진 왕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자의 눈치가 너무 빨랐다. 그리고 상황은 이미 너무 멀리까지 갔다. 왕자의 모든 음모가 이 남자 앞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려던 참이었다. 펄스가 모든 것을 망쳐놨다. 만약 이 남자가 왕자를 밀고한다면, 왕자는 처형될 것이다.

왕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다가가 외투에서 단검을 꺼내 남자의 가슴에 꽂았다. 남자의 숨통이 막혔다.

지나가는 그 누구도 이 장면을 목격하게 해선 안됐다. 왕자는 남자의 옷을 잡고 가까이 잡아 당겼다. 얼굴이 거의 맞닿았고 덕분에 악취가 가득한 남자의 숨을 참아야 했다. 왕자는 나머지 손으로 남자의 입을 막아 비명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신경 썼다. 남자의 뜨거운 피가 왕자의 손바닥에 뚝뚝 흘러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가까이 다가온 펄스가 두려움에 울부짖었다.

왕자는 거의 일분 가까이 남자를 붙들고 있었고 마침내 남자의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왕자는 그제서야 손을 놨고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목격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그 누구도 시장의 어두운 골목길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왕자는 남자의 옷을 벗겨 얼굴을 덮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펄스가 여자아이처럼 말을 반복하며 병적으로 울부짖었고 벌벌 떨며 왕자에게 다가갔다.

“입 닥치고 빨리 여길 떠나.”

펄스가 뒤를 돌아 뛰어갔다.

왕자도 자리를 피하려다 다시 멈춰 뒤를 돌아봤다. 한가지 더 할 일이 있었다. 왕자는 손을 뻗어 죽은 남자의 손에서 금화를 빼내 자신의 허리 춤에 금화를 챙겨 넣었다.

남자에겐 더 이상 금화가 쓸모 없었다.

제13장

개리스 왕자는 신속히 숲길을 걸었다. 뒤로는 펄스가 쫓아오고 있었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옷에 붙은 모자를 머리 위로 뒤집어 썼다. 자신이 가장 우려했던 상황에 처해진 걸 용납하기 힘들었다. 한 남자가 죽었다. 단서가 남은 것이다. 죽은 남자는 자신이 거래한 사람이 왕자라는걸 알았다. 죽은 남자와의 거래에 펄스는 더욱 신중했어야 했다. 단서의 끈을 추적해나가면 개리스 왕자가 들통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안해.”

펄스가 왕자를 따라잡기 위해 속도를 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자는 두 배 더 빠른 걸음으로 펄스를 무시했다.

“정말 멍청하고 나약해 빠졌어, 내가 있는 곳을 쳐다보면 어떻게 해.”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돈을 더 달라고 나오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펄스의 말이 옳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그 남자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돼지에 불과했고 거래의 규칙을 마음대로 바꿨으니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왕자는 그 남자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살해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길 기도했다. 최종적으로 필요한 건 알리바이였다. 왕의 암살되면 대대적인 사인규명이 벌어질 게 뻔했다. 왕자는 아주 작은 단서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의심의 여지를 심어 줄만한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블랙우드 숲에 당도했다. 한여름 태양이 내리쬐는데도 불구하고 숲 속은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높게 뻗은 유칼립투스 나무가 빈틈없이 빛을 차단했고 캄캄한 어둠이 왕자의 심경을 대변했다. 숲이 영 내키진 않았지만 죽은 남자가 가르쳐준 대로 구불구불한 길을 쭉 따라 내려갔다. 죽은 남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길 바랬다. 이 모든 게 그저 속임수일수도 있었다. 또는 죽은 남자의 함정에 빠져 그가 미리 심어 둔 일행들에게 돈을 더 뜯기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왕자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펄스를 믿는 게 아니었다. 직접 나섰어야 했다. 평소처럼 말이다.

“이 길 끝에 마녀가 있길 바래야 할거야. 마녀한테 독약이 없기만 해봐.”

왕자가 빈정거렸다.

남자가 일러준 대로 갈림길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좁은 길을 따라 갔다. 다행히 남자의 말대로 갈림길이 나왔고 이에 왕자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갈림길의 오른쪽을 따라 언덕을 오르니 또 다른 갈림길이 보였다.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다. 두 사람 앞에는 상상을 초월한 암흑의 나무숲이 있었다. 숲 속 나무들은 모두 믿을 수 없을 만큼 두꺼웠고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왕자는 나무숲으로 걸어 들어갔고 발을 들인 순간부터 등에서 한기를 느꼈다. 숨을 쉴 때마다 악마의 기운이 전해졌다. 아직 오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차라리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찰나, 길이 끝나고 작은 공터가 보였다. 공터 위로 아주 희미한 햇살이 나무그늘 사이로 내리쬐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돌로 지은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마녀의 오두막이었다.

왕자는 심장이 떨렸다. 공터로 몸을 이끌며 주변을 살폈다. 그 누구의 목격도 원치 않았고 혹시 함정이 아닌가 확인했다.

“봐봐, 그 남자가 거짓말 한 게 아니야.”

흥분된 어조로 펄스가 말을 건넸다.

“그래서 어쩌라고.”

왕자가 꾸짖었다.

“밖에서 망을 봐. 누구라도 얼씬거리면 문을 두르려. 그리고 입도 뻥끗하지 말고 있어.”

왕자는 눈 앞의 작은 원형 나무 문을 두드리는 대신 철 손잡이를 밀어 문을 열었다. 고개를 쭉 내밀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오두막 안은 어두웠다. 집 안을 밝혀주는 건 양초 잔해들뿐이었다. 내부는 방 하나가 전부였다. 창문이라고는 없었고 무거운 기운이 집안을 메웠다. 그곳의 고요함이 너무 무거워 숨이 막혔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악마와 한 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소름이 돋았다.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내 소리가 들렸다.

왕자의 눈앞에 절름거리며 나타난 건 늙은 마녀였다. 주름이 자글자글 했고 등이 굽어있었다. 마녀는 초를 위로 올렸다. 마녀의 얼굴을 뒤덮은 주름과 검버섯이 선명해졌다. 마녀는 수백 살은 더 들어 보였다. 오두막을 에워싸고 있는 구불구불한 나무들보다 더 오래 산 것 같았다.

“암흑 속에서도 모자를 뒤집어 썼구나. 의도가 불순해.”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마녀가 입을 열었다. 나무가 갈라지는듯한 소리였다.

“독약을 가지러 왔소.”

왕자가 서둘러 말했다. 침착하고 당당해 보이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셀드레이크 뿌리,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오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낄낄거리는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작은 방안 가득 울렸다.

“내가 그걸 가지고 있던 말던 그게 문제가 아니지. 문제는 바로 왜 당신이 그걸 찾느냐는 거겠지?”

변명거리를 찾던 왕자의 심장이 빨라졌다.

“당신이 왜 그걸 알아야 하는데?”

“네가 누굴 죽일지 알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당신은 신경 꺼. 돈은 여기 가져왔어.”

왕자는 허리띠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를 하나 꺼낸 뒤 다시 남자를 죽이고 되찾은 금화 주머니를 꺼내 주머니 두 개를 나무 탁자 위에 던졌다. 쨍그랑 하고 동전이 부딪히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이걸로 마녀가 만족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마녀에게서 독약을 건네 받고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녀가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를 뻗자 구부러진 손톱이 드러났다. 마녀는 들어올린 주머니를 유심히 살폈다. 왕자는 마녀가 더 많은 금화를 요구하지 않길 바라며 숨을 참고 있었다.

“이거면 내 입은 충분히 막겠군.”

마녀는 뒤를 돌아 어둠 속으로 절룩거리며 사라졌다. 거품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둔 촛불 덕에 마녀가 작은 유리병에 액체를 섞는 모습이 보였다. 유리병 속에 거품이 일어났고 마녀는 마개를 닫았다. 기다리는 내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고 불안감이 더해졌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걱정거리들이 왕자를 엄습했다. 만약 발각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발각된다면? 만약 마녀가 잘못된 독약을 준다면? 만약 마녀가 누군가에게 이 일을 발설한다면? 마녀가 자신의 신분을 눈치 챘다면? 왕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뿐이었다.

왕자는 이 모든 일에 점점 더 의구심을 느꼈다. 누군가를 암살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이제서야 깨달았다.

영원 같은 침묵이 한참이나 흐른 뒤, 마녀가 다시 나타났다. 마녀가 건네준 유리병은 너무 작아 한 손으로 충분히 감싸고도 남았다. 마녀는 뒤로 물러섰다.

“왜이리 작지? 이걸로 일을 도모할 수 있겠소?”

마녀가 미소를 지었다.

“아주 소량만으로도 목숨이 끊긴다는 사실에 감탄하게 될 거네.”

왕자는 뒤돌아 문으로 걸어갔다. 순간 등뒤로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마녀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뒤따라 왔는지 알 수 없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왕자는 미동도 없이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차마 너무 무서워 돌아볼 수가 없었다.

마녀는 왕자의 몸을 돌려 가까이 다가갔다. 마녀에게서 흉측한 냄새가 풍겼다. 마녀는 갑자기 양 손을 들어 왕자의 양 볼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말라 비틀어진 마녀의 입술이 왕자의 입술을 힘껏 눌렀다.

왕자는 완강히 반항했다. 생애 가장 역겨운 순간이었다. 마녀의 입술은 도마뱀 같았고 왕자의 혀를 누르는 마녀의 혀는 파충류의 혀와 다를 게 없었다. 마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마녀는 왕자의 얼굴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끝내 왕자는 뒤로 물러섰다. 손으로 입을 닦고 다시 닦은 손을 옷에 문질렀다. 마녀가 몸을 구부리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살인은 처음이 가장 어렵지, 그 다음부턴 한결 수월할거야.”

*

왕자는 서둘러 오두막을 벗어나 빈터로 달려 나왔다. 그곳에선 펄스가 왕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펄스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마치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잖아. 마녀가 해치기라도 했어?”

왕자는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며 반복해서 입을 닦아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뿐이었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자, 당장!”

블랙우드 숲으로 향하려 하자 갑자기 먹구름이 모여들어 해를 가렸다. 화창한 날씨가 급격히 어둡고 추워졌다. 이렇게 순식간에 두껍고 시커먼 먹구름 층이 드리워진 건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예사롭지 않았다. 여름날 쏟아지는 차디찬 비를 속수무책으로 맞으며 걸어가던 왕자는 마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없어 걱정이 앞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녀의 입맞춤에 악령이 홀린 것 같았다. 저주를 받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두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하고 싶지 않아. 두 번 다시는 오늘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은 서둘러 좁을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갔고 왕실로 향하는 숲길에 들어섰다. 이제서야 개리스 왕자의 기분이 차츰 나아졌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들을 마음속에서 지우려고 마음먹던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사내 여러 명이 왕자와 펄스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개리스 왕자는 두 눈을 의심했다.

술주정뱅이 동생 고드프리 왕자가 보였다. 실실 거리며 왕자에게 걸어오고 있었고 그의 주변으로 골칫거리 친구 두 명과 고드프리 왕자의 친구들 중 가장 비열한 헨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왜 그 많은 시간 중에, 그 많은 장소 중에 하필이면 이 시간에 이 숲 앞에서 마주쳤단 말인가. 왕자의 계획에 저주가 내려진 것 같았다.

개리스 왕자는 뒤로 돌아 머리 위로 모자를 덮었다. 평소보다 두 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정체가 탄로나지 않길 기도했다.

“개리스 형?”

달리 방도가 없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모자를 벗었다. 몸을 뒤로 돌려 고드프리 왕자와 눈을 맞췄다. 고드프리 왕자가 흥겨움에 빙그르르 돌며 개리스 왕자 앞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고드프리 왕자가 물었다.

개리스 왕자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이내 다시 닫고 말았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말을 잃었다.

“산책 갔다 왔어요.”

펄스가 대신 대답했고 덕분에 개리스 왕자가 위기를 면했다.

“산책, 둘이서?”

고드프리 왕자의 친구 한 명이 여자 목소리로 질문하며 펄스를 조롱했다. 나머지 친구들이 다같이 웃어댔다. 개리스 왕자는 고드프리 왕자와 그의 친구들이 평소 그의 성적 취향을 비판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제를 전화해야 했다. 고드프리 왕자 일행이 왕자가 숲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하는걸 바라지 않았다.

“그러는 넌 뭐하고 있었어?”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개리스 왕자가 물었다.

“사우스우드에 선술집 하나가 신규 개점했거든, 우리가 행차 한번 해 주셨지. 왕국에서 술 맛이 가장 끝내준다고. 좀 줄까?”

고드프리 왕자의 손에 나무통이 하나 들려 있었다.

개리스 왕자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고드프리 왕자의 생각을 분산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제를 다시 전환해 그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네가 이렇게 하루 종일 술 마시고 다닌 거 폐하께서 아시면 노여워하실 거야. 당장 술통 버리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성공이었다. 고드프리 왕자가 눈을 번뜩였고 확실히 개리스 왕자에 대해선 더 이상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오직 자신의 부자관계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언제부터 형이 아버지 걱정을 대신 해줬어?”

이걸로 충분했다. 술주정뱅이와 더 이상 말을 나눌 필요가 없었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갔고 고드프리 왕자를 교란시켰다. 이제 자신이 왜 이곳에서 고드프리 왕자 일행과 마주치게 됐는지는 더 이상 개리스 왕자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개리스 왕자는 뒤를 돌아 신속히 가던 길을 걸어갔다. 왕자의 뒤로는 조롱 가득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리스 왕자는 관심을 껐다. 머지않아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 여겼다.

제 14장

토르는 나무 테이블에 앉아 분리된 활과 화살을 조립하고 있었다. 토르의 옆자리엔 오코너가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나머지 열외 된 부대원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들 무기를 조립하기 위해 활을 칼로 긁어내고 줄을 묶고 있었다.

“전사라면 직접 활에 줄을 달 수 있어야 한다.”

콜크 사령관이 부대원 주변을 돌아다니며 허리를 숙여 각자의 솜씨를 판단하고 있었다.

“끈의 세기가 딱 좋군. 너무 짧아, 화살이 과녁 근처에도 못 가. 너무 느슨해, 날아가지도 않을 거야. 전쟁을 치르다 보면 무기가 망가진다. 전쟁 중에도 망가진다. 전장에 나서면서도 무기를 고칠 줄 알아야 한다. 최고의 전사는 망가진 무기를 모두 고칠 수 있는 대장장이이자 목수이자 수선쟁이이자 수리공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직접 무기를 고쳐보지 않고서는 사용하는 무기의 진면목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사령관은 토르 뒤에 멈춰 섰다. 토르의 어깨너머로 몸을 기울여 토르의 손에서 나무 활을 낚아챘다. 잡아당겨진 활이 토르의 손바닥을 쓸었다.

“끈이 팽팽하지 않잖아.”

사령관이 꾸짖었다.

“활도 비틀어졌어. 이걸 들고 전장에 나가면 넌 바로 죽음목숨이야. 네 동료도 네 옆에서 죽게 만드는 거야.”

사령관은 테이블 위에 활을 던져버리고 자리를 옮겼다. 몇몇 부대원들이 키득거렸다. 얼굴이 붉어진 토르는 활을 다시 집어 들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활을 평평하게 피고 줄을 거는 작업에 열중했다. 몇 시간에 걸쳐 계속된 작업이었고 진을 빼는 잡일 중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었다.

다른 부대원들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창을 던지고 검술을 배웠다. 토르는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그곳엔 토르의 친형 셋이 검을 맞대며 서로 웃고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형들은 토르보다 한발 앞 서 있었고 토르는 그늘 신세였다. 불공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왕의 부대가 자신을 원치 않는다는 생각이 뚜렷해졌고 또 부대원으로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마, 점차 적응 할거야.”

옆에 앉아있던 오코너가 다독여줬다.

재차 줄을 연결하려던 토르의 손바닥이 다 쓸려 나갔다.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줄을 잡아 당겼고, 드디어 신기하게도 빗장이 걸렸다. 땀을 흘려가며 있는 힘껏 줄을 연결했고 활의 양쪽 끝에 줄이 깔끔하게 걸렸다. 활이 제대로 갖춰지자 감격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해가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토르는 손등으로 땀을 닦고 앞으로 얼마나 더 이 작업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봤다. 더불어 전사가 되려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 동안은 다른 그림을 그려 왔었다. 부대원은 모든 시간을 훈련으로 보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작업 또한 훈련의 한 과정이라는걸 이내 받아들였다.

“나도 이런걸 하려고 여기 들어온 게 아니야.”

오코너가 토르의 생각을 읽은 듯 했다.

고개를 돌려 오코너의 한결 같은 미소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북쪽 지방 출신이야, 나도 왕의 부대 합류가 평생의 소원이었어. 난 그 동안 훈련과 전쟁만 그려왔거든. 이런 잡일은 상상도 못했지. 그렇지만 나아 지겠지. 우리가 신입이라서 그런 걸 거야. 적응해야지. 여기도 위아래 계층이 나뉜 거 같아. 그 중에 우리가 가장 어리고. 열 아홉 먹은 부대원은 이런 잡일 안 하더라. 우리도 계속 이런 것만 하진 않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배워두기에 꽤 유용한 것들이잖아.”

경적이 울렸다. 주변을 보니 모든 부대원들이 경기장 한 가운데 마련된 커다란 돌담 옆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돌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밧줄이 내려져 있었다. 담의 높이는 족히 10미터는 되는듯했다. 아래로는 건초더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뭘 꾸물거리고 있나? 움직여라!”

콜크 사령관이 외쳤다.

부대원들 주변으로 실버 대원들이 나와 소리를 질렀다. 토르가 일어서기도 전에 벌써 곁에 있던 모든 부대원들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돌담 쪽으로 달려나갔다.

이내 모든 부대원이 한곳에 모여 밧줄을 마주하고 섰다. 한데 모인 부대원들 사이에서 한껏 들뜬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드디어 다른 부대원들과 함께 서있다는 사실에 토르도 마냥 즐거웠다. 토르는 다른 부대원들 옆에 서있는 리스 왕자 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오코너도 토르 옆으로 다가왔다.

“전장에 나가보면 알게 되겠지만 대부분의 마을들은 요새화되어 있다.”

부대원들을 마주보며 사령관이 외쳤다.

“요새를 무너뜨리는 것은 병사의 임무이다. 요새를 공략할 땐 일반적으로 이 돌담에 걸린 것과 비슷한 밧줄과 갈고리를 사용한다.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 중 하나가 바로 벽을 타고 오르는 것이다. 이보다 더 위험한 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적들은 너희들 머리 위에서 납을 녹여 부어댈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질 것이다. 절대로 제대로 된 기회를 잡을 때까지 벽을 오르면 안 된다. 기회가 오면 목숨을 걸고 벽을 오르고,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콜크 사령관이 깊게 숨을 마신 뒤 외쳤다.

“시작하라!”

토르 주변의 모든 부대원들이 행동에 나섰고, 밧줄을 하나씩 붙잡았다. 토르도 전속력으로 뛰어나가 아무도 잡지 않은 밧줄에 손을 뻗었다. 순간 토르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부대원이 밧줄을 낚아채 토르를 밀쳤다. 몸싸움 끝에 토르는 다시 주변에 가장 가까운 밧줄을 잡았다. 매듭이 진 두꺼운 밧줄이었다. 밧줄에 매달려 앞다투어 벽을 오르는 내내 토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날은 이미 저녁 이슬이 맺힌 후였다. 축축해진 돌을 디디다 미끄러졌지만 여전히 속도를 높였다. 다른 부대원보다 앞서 오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 했고 선두에 가까웠다. 토르는 오늘 처음으로 기분이 좋았고 자부심마저 느꼈다.

난데없이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와 어깨에 부딪혔다. 위를 보니 실버 대원들이 담 꼭대기에서 작은 돌과 나무 막대기 등 온갖 종류의 파편들을 던지고 있었다. 토르와 같이 선두에 있던 한 부대원은 한 손으로 얼굴을 막아 파편을 피하다 나머지 손에 힘이 다했는지 뒤로 넘어가더니 결국 땅에 떨어졌다. 족히 6미터는 되는 높이에서 건초 더미 위로 추락했다.

밧줄을 잡고 있는 것 조차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꽉 잡고 안간힘으로 버텼다. 담 위에서 던진 곤봉이 토르의 등을 강타했음에도 토르는 계속해서 벽을 올랐다. 속도를 계속 높였고 이대로라면 일등으로 벽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무언가가 가슴을 세계 쳤다. 어디서 뭐가 날아 온 건지 당황스러웠다. 옆을 보니 부대원 하나가 중심을 놓쳐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몸을 피할 겨를도 없이 토르는 다시 반동해 돌아오는 부대원과 강하게 부딪혔다.

결국 잡고 있던 밧줄을 놓쳤고 등뒤로 바닥에 추락했다. 바람을 가르며 요동치던 몸이 건초더미 위에 떨어졌다. 놀라긴 했지만 다치진 않았다.

재빨리 일어나 무릎을 굽히고 손으로 땅을 짚었다. 숨을 고르며 담 위를 올려다봤다. 부대원들은 서로 부딪히고 밀리거나 담 위에 있는 실버 대원에 밀려 죽은 파리처럼 추락해 건초 더미에 떨어졌다. 끝까지 밧줄을 쥐고 있던 부대원들의 밧줄도 모두 잘려 나갔고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추락했다. 담 위에 올라간 부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기립하라!”

콜크 사령관이 외쳤다. 토르는 재빨리 일어나 나머지 부대원들과 같이 기립했다.

“검!”

부대원들이 일제히 목검 선반으로 달려갔다. 토르도 달려가 목검을 집어 들었다. 검의 무게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검은 토르가 지금껏 들어본 그 어느 무기보다 두 배는 족히 무거웠다. 들고 있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무거운 검, 시작하라!”

지시가 내려졌다.

고개를 든 토르 앞에 거구 엘덴이 있었다. 토르와 부대원 선발 일에 겨뤘던 소년이었다. 토르는 엘덴을 잊을 수가 없었다. 토르의 얼굴은 아직도 그때 생긴 멍으로 욱신거렸다. 엘덴은 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을 높이 든 엘덴의 얼굴엔 분노가 가득했다.

토르는 겨우겨우 목검을 들어올려 엘덴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검의 무게가 상당해 다시 들어 올리기가 힘들었다. 토르보다 힘에 세고 몸집이 큰 엘덴은 토르에게 다가가 흉부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토르는 견딜 수 없는 통증에 무릎을 구부리고 엎드렸다. 엘덴이 돌아와 토르의 얼굴을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다행히도 토르는 팔을 뻗어 간신히 공격을 받아냈다. 그렇지만 엘덴은 재빠르고 힘이 넘쳤다. 엘덴은 다시 돌아 토르의 다리를 공격했고 이에 토르는 옆으로 쓰러졌다.

부대원 몇 명이 두 사람 주위로 모여들었고 일부는 환호하고 일부는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엘덴의 승리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엘덴이 또다시 목검을 휘둘렀다. 토르는 등뒤로 세게 내려오는 목검을 보고 재빨리 몸을 굴려 피했다. 드디어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고 토르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토르는 몸을 돌려 엘덴의 무릎 뒤를 강하게 가격했다. 엘덴의 약점을 정확히 가격했고 덕분에 엘덴은 주춤하며 뒤로 넘어졌다.

엘덴이 넘어져 있는 동안 토르는 몸을 일으켰다. 엘덴도 곧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엘덴의 얼굴이 달아 올랐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대립했다.

이렇게 마냥 서있으면 토르에게 불리할 뿐이었다. 토르는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 검이 너무 무거웠다. 목검 덕에 토르의 동작이 너무 느렸고 엘덴은 모든 공격을 우습게 받아 치고 토르의 가슴을 찔렀다.

목검에 갈비뼈 사이 움푹한 부분을 가격당한 토르는 쥐고 있던 검까지 놓친 채 엎드렸다. 숨도 쉬기 힘들었다.

지켜보던 몇 명의 부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토르는 무릎을 꿇은 채 비무장 상태로 목에 겨눠진 목검의 날을 느꼈다.

“항복해!”

토르는 엘덴을 노려봤다. 입술에선 짭짤한 피비린내가 났다.

“절대 안 해.”

토르의 목소리가 도전적이었다.

엘덴을 얼굴을 찌푸리고 검을 높이 들어 내리칠 태세를 갖췄다. 토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단지 곧 다가올 어마어마한 타격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검이 내려오는 순간 토르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순간 세상이 느려졌고 다른 세계로 이탈한 것 같았다. 점차 바람을 가르는 목검의 곡선과 움직임이 느껴졌고 목검이 멈추기를 염원했다.

몸이 뜨거워졌고 따끔따끔했다. 주의를 집중할수록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상황을 제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 검이 한가운데 멈췄다. 어떻게 했는지 설명할 순 없었지만 토르는 주어진 능력으로 검을 멈췄다.

내리친 검이 갑자기 멈추자 엘덴은 영문을 몰라 당황했다. 이때 토르는 정신의 힘을 이용해 엘덴의 팔목을 꽉 잡고 비틀었다. 마음 속으로 좀 더 세게 비틀자 얼마 안 있어 엘덴이 소리를 지르며 검을 놓쳤다.

지켜보던 모든 부대원이 말을 잃었다. 모두 얼어버린 채 휘둥그런 눈으로 겁에 질려 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악마임이 틀림없어!”

누군가가 외쳤다.

“마법사야!”

다른 부대원이 받아 쳤다.

토르는 어쩔 줄을 몰랐다. 방금 전 뭘 한 건지 토르도 도통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당당해진 반면 두려웠다.

콜크 사령관이 부대원들을 뚫고 토르와 엘덴 사이로 나섰다.

“네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이곳은 주문을 외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전쟁을 준비하는 곳이다. 너는 싸움의 규칙을 어겼다. 스스로 반성해라. 진짜 위험이 도사리는 곳에 보내줄 테니 그곳에서 어떤 주문으로 스스로를 지킬지 한번 두고 보겠다. 캐니언 협곡에 있는 수비병에게 보고하라.”

부대원들이 경악했고 곧 모두 말을 잃었다. 토르는 사령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이든 매우 안 좋은 상황임은 분명했다.

“토르를 캐니언 협곡으로 보낼 수 없어요!”

리스 왕자가 강력하게 반발했다.

“아직 신입이에요. 다칠 수도 있어요.”

“내가 원하면 가는 겁니다, 부대원”

콜크 사령관이 왕자를 향해 인상을 썼다.

“왕자님을 옹호해줄 폐하께서는 여기 안 계세요. 캔드릭 왕자님도요. 제가 이곳의 책임자입니다. 왕자님도 입 조심 하세요. 왕족이라는 이유로 다신 부대원의 본문을 망각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같이 가겠어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오코너도 앞으로 나서 맞장구 쳤다.

“멍청한 것들. 이건 내가 강요한 게 아니네. 원한다면 함께 가도록.”

콜크 사령관은 엘덴과 눈을 맞췄다.

“너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았나 본데. 네가 이 싸움을 시작했지. 그럼 대가를 치러야지. 너도 오늘 캐니언 순찰에 함께 가도록.”

“그렇지만 주군님, 절 캐니언에 보내지 말아주세요!”

겁에 질린 엘덴이 반박했다. 엘덴이 겁에 질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령관은 엘덴에게 걸어가 손을 올려 엘덴의 엉덩이를 만졌다.

“보내지 말아? 난 널 캐니언에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곳에도 보낼 수도 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내게 얘기한다면 부대에서 영영 떨어져 왕국 제일 먼 곳으로 보내주겠다.”

엘덴이 고개를 돌렸다. 너무 당황해 뭐라 대꾸도 못했다.

“이들과 함께 가고 싶은 자가 있는가?”

사령관이 크게 외쳤다.

나머지 부대원들 모두 큰 체구에도, 연장자임에도, 힘이 센데도 불구하고 다들 겁에 질려 시선을 피했다. 불안에 떠는 부대원들을 바라보던 토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캐니언 협곡이라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제 15장

토르는 단단하게 잘 다져진 길을 걸어갔다. 리스왕자, 오코너, 엘덴이 토르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네 사람은 여전히 충격에 잠겨 지금껏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토르는 리스 왕자와 오코너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들에게 더없이 고마웠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궁지로 몰고 간 두 사람의 결정이 놀라웠다. 진정한 우정을 느꼈고 더한 형제애를 느꼈다. 캐니언 협곡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 두 사람과 함께라는 사실만으로 감사했다.

엘덴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 애썼다. 엘덴은 길가의 돌멩이를 발로 차고, 분을 토하며 토르 일행과 함께 캐니언 협곡에 간다는 사실에 고스란히 짜증을 드러냈다. 그러나 토르는 엘덴에게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다. 콜크 사령관의 말처럼 엘덴이 이 모든 상황의 시작이었고 결국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오합지졸로 분류된 네 소년들은 계속해서 지시 받은 방향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족히 몇 시간을 걸었더니 벌써 늦은 저녁이었다. 오랜 걸음에 다리가 점점 지쳤다. 배도 너무 고팠다. 점심이라고는 작은 그릇에 담긴 보리죽이 전부였다. 목적지에 닿으면 뭐라도 먹을 수 있길 바랬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걱정거리가 있었다. 토르는 입고 있는 새 갑옷을 훑어봤다. 분명 이유가 있기에 준 갑옷이었다. 길을 떠나기 전, 토르의 일행은 모두 새로운 갑옷을 받았다. 표면이 쇠사슬로 덮인 가죽 갑옷이었다. 뿐만 아니라 단검도 받았다. 무쇠로 만든 단검이었다. 질 좋은 철은 모두 전사의 검을 만드는 데 사용됐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허리에 튼튼한 무기를 차고 있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물론 새총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밤 혹시라도 곤란한 일이 닥치면 지금 입고 있는 갑옷과 단검만으로는 결코 안전할 수 없었다. 부대원이 되면 가장 질 좋은 철로 만든 검과 창, 방패, 단검, 미늘 창 등 최고급 무기와 갑옷이 주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형편이 좋은 명문가의 자제들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저 목동의 자식으로 태어난 토르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끝도 없이 드리워진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두 번째 태양도 저물고 있었다. 이미 왕궁을 벗어난 지 한참이었고 앞으로는 여전히 캐니언 협곡으로 향하는 길이 기약 없이 펼쳐져 있었다. 토르는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일부 부대원들은 토르의 존재를 못마땅해 하며 토르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영문을 알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에 토르는 풀이 죽었다. 일평생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되기만을 꿈꿨다. 그러나 토르는 부정행위를 저질렀고 이로써 모든걸 스스로 망친 것 같았다. 과연 나머지 부대원들이 자신을 동료로써 인정해 줄 날이 오긴 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걸 뒤로 하고 그 많은 대원 중에서 오직 토르에게만 캐니언 순찰 임무가 내려졌다. 불공평했다. 싸움을 시작한 건 엘덴이었다. 더군다나 정체 모를 능력이 발휘됐을 땐 그게 무엇이건 토르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여전히 이상한 능력의 출처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발휘하고 멈추는 법도 토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찌됐든 그런 이유로 처벌을 받는 이 상황이 억울했다.

캐니언 순찰 임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다른 부대원들의 반응을 미루어보아 모두가 꺼려하는 임무라는 건 확실했다. 혹시 캐니언 임무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닌지, 이런 식으로 왕의 부대에서 낙오시키려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어찌됐던 토르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캐니언이 나오는 걸까?”

침묵을 깨고 오코너가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토르만 아니었으면 다들 이 고생 안 했을 거야.”

엘덴이 대답했다.

“네가 싸움을 걸었잖아, 기억 안나?”

리스 왕자가 끼어들었다.

“그렇지만 전 정정당당하게 승부했어요, 토르는 그렇지 못했고요. 더군다나 이게 다 토르가 자초한 거에요”

“왜? 왜 내가 이걸 자초했다는 거지?”

정말 그런 건지 혼자서 계속 고민해오던 토르가 사실을 알고 싶은 마음에 물었다.

“넌 여기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 넌 부대원 자리를 정당하게 얻지 못했어. 우리는 모두 평가를 받아 선발된 거야. 너는 나와 싸운 덕에 들어온 거고.”

“그렇지만 그게 바로 왕의 부대가 하는 게 아닐까? 싸움과 승부? 난 토르가 누구보다 더 부대원 자리에 정정당당하게 들어왔다고 생각해. 우리는 선발됐지만 토르는 스스로 싸워서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걸 얻어냈어.”

리스 왕자가 대답했다.

엘덴은 동조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규율은 규율이에요. 토르는 선발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부대원이 될 자격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토르와 싸운 거라고요.”

“넌 절대 날 낙오시킬 수 없어.”

토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누구보다 부대원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두고 보자고.”

엘덴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듣고 있던 오코너가 엘덴에게 물었다.

엘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조용히 길을 걸어갔다. 긴장한 토르의 배가 움츠러들었다. 왠지 모르지만 토르에겐 이미 너무 많은 적이 생겨난 것 같았고 도대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신경 쓰지 마.”

리스 왕자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모두 다 들을 수 있게 토르에게 말했다.

“넌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 사령관이 널 캐니언에 보내려고 한 건 네게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야. 널 강하게 훈련시키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왜 이렇게까지 하겠어. 또 폐하께서 널 지목하셨기 때문에 실버 대원들도 너를 주시하는 거야. 그게 전부야”

“그렇지만 캐니언 임무가 대체 뭐죠?”

토르가 물었다.

왕자는 목을 가다듬었다. 표정에 근심이 가득했다.

“사실 나도 지금까지 캐니언 임무를 받아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얘기는 들었어.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부대원들과 내 형들로부터. 정확히는 순찰이 목적이야. 그런데 그걸 캐니언 협곡 반대쪽으로 넘어가서 해야 해.”

“반대쪽이요?”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오코너가 물었다.

“반대쪽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영문을 모른 채 토르가 따라 물었다.

리스 왕자가 토르를 유심히 살펴봤다.

“캐니언 협곡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

나머지 일행 모두 토르를 쳐다봤다.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토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뻥 치지마.”

엘덴이 쏘아댔다.

“진짜야? 평생 한번도?”

오코너도 확인이 필요한 듯 물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다니신 적이 없어. 캐니언에 대해 얘기를 듣긴 했지만.”

“분명 평생 고향 땅 외에는 아무데도 안 가본 거야. 내 말이 맞지?”

엘덴이 물었다.

토르는 대답 대신 어깨를 움츠렸다. 고향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게 그렇게 티가 났을까?

“정말이군,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믿을 수 없다는 듯 엘덴이 말했다.

“그만해, 토르 좀 내버려둬. 그렇다고 해도 토르가 우리보다 못한 거 하나도 없잖아.”

리스 왕자가 토르를 옹호했다.

엘덴은 리스 왕자를 비웃으며 잠시 칼집에 손을 올렸지만 이내 내렸다. 엘덴이 리스 왕자보다 덩치가 큰 건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엘덴은 왕족인 리스 왕자를 도발시키고 싶지 않았다.

“캐니언 협곡이 우리 링 대륙 내부를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이야. 협곡 외에는 세계의 무리와 우리를 분리시켜 주는 게 아무것도 없어. 만약 미개 왕국의 야만생물체들이 캐니언 협곡을 뚫으면 우리 모두 죽게 될 거야. 링의 대륙 내부에 사는 백성 모두가 우리에게 의지하고 있어. 폐하의 병력으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야 해. 캐니언 협곡은 순찰병이 지키고 있어. 주로 우리 대륙 쪽 캐니언 협곡을 순찰하지만 아주 가끔씩 그 바깥쪽도 순찰해. 그리고 바깥쪽으로 가는 길은 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가장 유능한 실버 대원들만이 그곳을 지켜. 시계 방향으로 순찰하면서.

리스 왕자가 토르에게 설명했다.

토르는 캐니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다. 캐니언 협곡 밖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악마 이야기도 충분히 들었다. 원형의 링 대륙 가장자리로 어마어마한 악의 제국이 링 대륙을 에워싸고 있고, 때문에 링 대륙 내부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위험에 가까이 노출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런 사실 덕에 토르는 더욱 실버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토르는 왕국과 그의 가족을 보호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캐니언 협곡에서 목숨을 걸고 왕국을 지키는 동안 자신은 편하게 왕국 내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직접 왕국을 지키고 악마의 무리와 맞서고 싶었다. 토르로서는 캐니언 다리를 지키는 실버 전사들보다 더 용감한 존재가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링 대륙을 에워싸고 있는 캐니언 협곡의 두께는 대략 2000미터 정도야. 협곡을 뚫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다고 그 경계에서 야만생명체의 접근을 막는 건 실버 전사들만이 아니야. 만약 실버 전사만이 캐니언 협곡을 지켰다면 수백만이 넘는 야만생명체가 벌써 협곡을 넘어 왔겠지. 실버 전사들은 그저 캐니언의 에너지 장을 관찰하고 있어. 정말로 링 대륙 내부로 진입 하려는 야만생명체를 차단해주는 건 바로 그 검이지.”

왕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검이라니요?”

토르가 고개를 돌렸다.

리스 왕자는 토르를 바라봤다.

“운명의 검. 전설로 듣지 않았어?”

“이 시골 촌뜨기는 아마 들어보지 못했을걸요.”

엘덴이 끼어들었다.

“나도 알고 있어.”

토르가 방어적으로 엘덴에게 쏘아 붙였다. 토르는 운명의 검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검과 관련한 전설을 떠올리며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을 했었다. 늘 운명의 검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했다. 전설적인 운명의 검. 링 대륙 내부를 보호하는 불가사의한 검. 캐니언 협곡에 강력한 에너지 장을 일으켜 침입자들로부터 링 대륙을 지켜내는 운명의 검.

“그 검은 왕궁에 있나요?”

토르가 물었다.

리스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검은 왕족 대대로 내려왔어. 그 검이 없다면 왕국도 없을 거야. 검은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전해질 거고.”

“검이 잘 지켜주는 데 왜 캐니언 협곡에 순찰병을 두죠?”

토르는 궁금했다.

“운명의 검은 큰 위협만 막아줘. 야만생물체들이 소규모거나 혼자라면 캐니언 협곡을 건널 수 있어. 그래서 실버 전사들이 그곳을 지키는 거지. 이들이 혼자이거나 혹은 적은 인원이라고 협곡을 다닐 수 있게 그냥 내버려 둔다면, 결국 자기들 마음대로 캐니언 협곡을 넘나들 거야. 또 실제로 우리 눈을 피해 그러기도 하고. 우리는 이들의 접근을 막아야 해. 야만생명체 하나 만으로도 그 피해가 엄청나거든. 몇 년 전에 넘어온 야만생명체 하나는 어는 마을의 아이들을 절반이나 죽이고 나서야 겨우 잡혔어. 운명의 검이 대대적인 공격은 막아주지만 우리가 이곳을 지키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이야.”

이야기를 다 들은 토르는 경탄했다. 캐니언 협곡이 매우 장엄하게 느껴졌다. 순찰병의 임무는 매우 중요했다. 때문에 토르는 오늘 이 중요한 임무를 경험한다는데 큰 의미를 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설명이 더 필요해. 캐니언 협곡에는 내가 말한 거 이상이 있어.”

왕자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의구심이 드리워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적합한 표현을 찾는 듯 목을 가다듬었다.

“캐니언 협곡은 크기가 엄청 나. 캐니언은……”

“캐니언 협곡은 남자들을 위한 곳이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모두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말 한 마리가 발을 구르고 있었다.

토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토르의 일행 옆으로 완전 무장을 한 에레크 명장이 수려한 말을 타고 말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무기들을 싣고 다가왔다. 명장은 토르에게 시선을 고정한 일행을 향해 웃고 있었다.

놀란 토르는 명장을 올려다봤다.

“캐니언은 너희들을 진정한 사내로 만들어줄 곳이지, 아직 진정한 사내가 아니라면 말이다.”

마상경기 이후 에레크 명장과의 첫 대면이었다. 토르는 명장의 등장에 안도할 수 있었다. 캐니언 협곡으로 향하는 길에 진짜 전사를 만났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그것도 다름아닌 에레크 명장이었다. 명장을 보자 토르는 천하무적이 된 것 같았다. 제발 명장과 함께 캐니언에 가길 기도했다.

“여기서 무얼 하세요? 저희와 함께 가실 건가요?”

토르는 자신의 질문이 너무 절실하게 들리지 않길 바랬다.

에레크 명장은 허리를 젖히고 웃었다.

“마음 푹 놓으렴, 어린 친구. 너희들과 함께 갈 것이다.”

“정말이죠?”

리스 왕자가 물었다.

“왕자님, 부대원이 캐니언으로 순찰 갈 땐 실버와 동행하는 게 전통이죠. 그래서 제가 그 길에 자진했습니다.”

명장은 고개를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그리고 어제 너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에레크 명장의 등장에 들뜬 토르는 마음이 놓였다. 친구들 앞에서 체면을 좀 세운 것 같았다. 캐니언 협곡으로 가는 길에 왕국의 가장 명망 높은 전사, 에레크 명장이 동행했다. 토르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물론 협곡 넘어서까지 함께 순찰을 돌진 못한다. 그렇지만 너희들을 데리고 협곡 다리를 건너 막사까지 인도하마. 거기서부터는 임무에 따라 너희끼리 순찰을 하게 될 거다.”

“영광입니다, 주군.”

리스 왕자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오코너도 대답했다.

에레크 명장은 토르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네가 내 첫 번째 후견부대원이 된다면, 난 절대 너를 거기서 죽게 놔두지 않을 거다.”

“첫 번째요?”

토르가 물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패스골드는 마상장에서 다리 부상을 당했어. 적어도 8주는 쉬어야 해. 네가 이제 내 첫 번째 후견부대원이다. 그리고 나와 개인 훈련도 곧 시작 할거야,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주군.”

기분이 좋아 날아갈 것 같았다. 오랜 만에 처음으로 행운의 여신이 토르의 손을 들어준 것 같았다. 이제 토르는 가장 인정받는 명장의 첫 번째 후견부대원이 됐다. 모든 친구들을 뛰어 넘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섯 명의 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해가 지는 서쪽으로 가고 있었고 에레크 명장은 토르의 일행 뒤에서 말을 이끌며 천천히 걸었다.

“캐니언 협곡에 가보신 적이 있으시죠, 주군?”

토르가 물었다.

“여러 번 가봤지. 내 첫 번째 순찰 때, 내가 딱 네 나이였다.”

“첫 순찰은 어땠어요?”

리스 왕자가 물었다.

네 명 모두 궁금함을 못 이기고 뒤를 돌아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명장은 한동안 말없이 말을 타고 길을 갔다.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주시했다.

“너희들의 첫 번 째 순찰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거다. 설명하기가 어렵구나. 캐니언 협곡은 이상하리만큼 이국적이고 초자연적이면서 아름다운 곳이지. 그 너머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단다. 건너야 할 다리는 매우 길고 경사졌어. 많은 실버들이 그곳을 순찰하고 있지만 언제나 홀로 그곳에 있는 느낌이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어둠 속으로 사람을 몰아 넣는 곳이지. 수백 년 동안 실버들이 그곳을 순찰해왔어. 모두의 통과의례지. 그곳을 경험하지 않고는 진짜 위험이 무엇인지 이해 못하고, 그곳에 가보지 않고서는 진정한 전사가 될 수 없단다.”

명장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나머지 네 소년은 불안함에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렇다면 협곡 너머 다른 세계에 가면 충돌도 예상해야 하나요?”

토르가 물었다.

명장이 어깨를 들어 올렸다.

“뭐든지 가능하지, 미개의 왕국 와일즈에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럴 수도 있지.”

에레크 명장은 토르를 내려다봤다.

“훌륭한 부대원이 되고 싶고, 훌륭한 전사가 되길 꿈꾸는 건가?”

토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네, 주군, 제가 바라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꼭 배워둬야 할 게 있단다. 힘으로도 부족하고, 민첩성으로도 부족해. 싸움에 능숙한 전사도 충분하지 않아.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다.”

에레크 명장이 다시 침묵했고, 참지 못한 토르가 질문했다.

“그게 뭐죠? 가장 중요한 게 뭐에요?”

“견실한 기상을 지녀야 한단다. 두려움을 버려라. 너는 가장 어두운 숲에 들어가 가장 위험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빈틈없이 평정을 유지해야 해. 그 평정심이 항상 너와 함께해야 한다. 언제나 어딜 가든 말이야. 겁을 버리고, 항상 준비하거라. 마음을 놓지 말고, 항상 근면하거라. 다른 사람이 너를 지켜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버리거라. 너는 더 이상 백성이 아니다. 대신 넌 폐하의 병사야. 전사의 가장 큰 자질은 용기와 평정이다. 위험을 두려워 말고 늘 염두 해 두거라. 그러나 결코 위험을 쫓진 말거라.”

명장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링 대륙은 우리의 왕국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링을 다른 세계로부터 지킨다고 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 오히려 우리가 캐니언 협곡에 깃든 마법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어. 우리는 마법의 원형 대륙, 링에 살고 있지. 절대 잊어선 안돼. 우리의 삶과 죽음은 마법이 좌우해. 캐니언 협곡의 안팎에 절대적인 안전은 없단다. 마법을 걷어내면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단다.”

아무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한참을 걸어갔다. 걷는 내내 에레크 명장이 들려준 이야기를 되새겼다. 마치 자신에게 암시를 주는 것만 같았다. 토르가 가진 힘이 무엇이든, 토르가 어떤 마법을 소환하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사실은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 왕국의 힘이라고 설명해준 것만 같았다. 토르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 전까진 마법을 사용한 대가로 캐니언에 보내진다고 생각했고 이에 죄책감까지 느꼈다. 그러나 토르가 가진 힘이 무엇이건 간에 이제는 토르가 느끼는 자부심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앞서가는 나머지 일행들 뒤로 토르와 에레크 명장이 걸어갔다. 명장은 토르와 눈을 맞췄다.

“벌서 왕궁에 막강한 적들을 만들어 뒀더구나. 내가 보기엔 네게 벗이 한 명 생길 때마다 적도 하나 느는 것 같은걸.”

명장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가득 짖고 있었다.

부끄러워진 토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잘 모르겠어요, 주군. 제가 의도한 건 아니에요.”

“적은 의도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다. 주로 질투심으로 생겨나지. 네가 많은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일으킬만한 일을 했잖니. 그렇다고 그게 꼭 나쁜 것 만은 아니란다. 네게는 수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돼 있어.”

토르는 명장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를 긁었다.

“그래도 잘 모르겠어요.”

명장은 여전히 재미있어했다.

“네 적들 중에서 가장 막강한 사람은 바로 왕비님이시다. 네가 어떻게 했는진 몰라도 왕비님을 적으로 만들어놨더구나.”

“어머니께서요? 왜요?”

리스 왕자가 돌아보며 물었다.

“제도 그게 궁금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더군요.”

명장이 대답했다.

토르는 두려웠다. 왕비님이? 적이라고? 무엇을 잘못 했기에? 납득이 안됐다. 어떻게 왕비님께서 토르를 신경 쓰시게 된 걸까? 토르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그럼 이건 왕비님께서 지시하신 건가요? 절 캐니언으로 보내라고 하셨나요?”

에레크 명장은 고개를 돌려 심각한 모습으로 눈 앞을 주시했다.

“아마도 그러셨을 수도 있지, 아마도 그러셨을 수도.”

명장은 심사숙고하며 대답했다.

토르에게 적대감을 품은 사람들의 수와 계층이 매우 다양했다. 토르는 이제 막 왕궁에 발을 들여놨을 뿐이었다. 그곳에 속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스스로의 열정과 꿈을 쫓아왔을 뿐이며 이를 위해 사력을 다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타인의 질투와 시기를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수수께끼마냥 이렇게 다양한 적을 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토르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어느새 언덕의 정상에 도착했다. 언덕아래로 드러난 광경에 다른 생각들은 모두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숨이 멎었다. 단순히 강한 돌풍 때문만이 아니었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곳엔 캐니언 협곡이 드리워져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캐니언 협곡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뗄 수 없을 만큼 토르는 눈 앞의 장관에 완전히 넋을 잃었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장대했다. 거대한 협곡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실버들이 줄지어 경계를 선 좁은 다리가 놓여 있었다. 길게 놓인 다리가 끝나는 곳이, 지구의 끝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의문이 들었다.

협곡 위로 저무는 두 번째 태양의 신록 빛과 푸른 빛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 반짝이는 석양빛이 협곡에 반사됐다. 토르는 나머지 일행을 따라 다리로 걸어갔다. 다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캐니언 절벽의 밑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지구의 가장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 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행여 협곡의 바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지 짙게 덮여있는 안개 때문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절벽을 이루는 바위는 수백 년의 세월을 탄 흔적이 엿보였다. 그 형상이 마치 수세기 전 지나간 태풍의 잔상을 그대로 간직한 듯 했다. 그 어느 곳보다 원시의 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었다. 지구라는 행성이 참으로 방대하고 원기왕성하고 생생하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지구가 창조되는 순간을 보는 것 같았다.

토르 주변에서도 탄성이 쏟아졌다.

고작 네 명의 부대원이 캐니언 협곡을 순찰한다는 사실이 터무니없었다. 협곡의 장관 속에서 이들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

다리로 들어서자 다리 양쪽으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실버 대원들이 이들에게 길을 내어주며 차려 자세로 경직했다. 토르의 맥박이 빨라졌다.

“우리가 무슨 수로 여기서 순찰을 할 수 있겠어.”

오코너가 말을 걸었다.

“우리 주변으로 수많은 순찰병이 있어. 우리는 수 많은 순찰병 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엘덴이 비웃었다.

다리를 건너는 내내 들려온 소리라고는 매서운 바람소리와 네 소년들의 발걸음 소리, 또 이들을 뒤따르는 에레크 명장이 탄 말발굽 소리가 전부였다. 고요히 울려오는 말발굽 소리만이 토르가 이 초현실적인 공간에서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소리였다.

에레크 명장의 등장에 군기가 바짝 들어간 순찰병들은 모두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리 위를 걸어가며 수백 명의 순찰병들을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토르는 좌우로 고개를 돌려 일정한 간격으로 박아놓은 대못을 살폈고 그곳에 꽂힌 야만생명체의 머리를 봤다. 꽂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이는 머리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급히 얼굴을 돌렸다. 덕분에 지금 토르가 처한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과연 자신이 이곳을 무사히 순찰할만한 능력을 갖추기나 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오는 내내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야만생명체와의 대결을 애써 지웠다. 수많은 생명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협곡의 너머에 무엇이 토르를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무사히 다시 돌아간다는 보장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여정의 진짜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을까? 토르를 죽이는 것?

끝도 없이 모습을 감춘 절벽의 가장자리를 살펴봤다. 멀리서 날카로운 새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무슨 새의 울음 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협곡의 너머에 살고 있는 동물들은 얼마나 낯선 모습일지 궁금했다.

진정으로 토르가 걱정하는 건 동물이나 못에 박힌 야만생명체의 머리가 아니었다. 이 곳이 주는 느낌이 가장 두려웠다. 자욱한 안개 때문인지 거센 바람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혹은 끝없이 펼쳐진 장대한 하늘 때문인지 석양의 푸른 빛 때문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초현실적인 장관에 토르가 맥없이 도취됐다는 사실이었다. 봉인된 것만 같았다. 캐니언 협곡에 드리워진 무거운 기운을 느꼈다. 그 정체가 운명의 검에서 발휘되는 보호막인지 아니면 어떤 고대의 기운인지 궁금했다. 캐니언 협곡을 걸어가는 자신이, 단순히 거대한 땅 위를 교차하는 행위를 넘어서 다른 존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듯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토르는 작은 마을에서 양이나 돌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난생처음으로 캐니언 협곡을 넘어, 미개의 영토에서 밤새 순찰을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제16장

태양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며 어두운 주홍빛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우주를 감싸 안았다. 토르는 리스왕자, 오코너, 엘덴과 함께 미개의 왕국 와일즈의 숲으로 연결되는 좁은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토르는 안절부절 못했다. 막사에 남은 명장을 뒤로하고 이젠 토르와 그의 일행들만이 길을 나서고 있었다. 그간의 다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네 소년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절실한 존재였다. 에레크 명장이 함께 있어주지 못하기에 이들은 더욱 똘똘 뭉쳐야 했다. 막사에서 길을 나서기 전에 에레크 명장은 기지에서 머무르며 토르 일행이 위험에 처하면 즉시 달려가겠다고 약속하며 부대원들을 안심시켰다.

덕분에 마음이 약간 놓인 건 사실이었다.

숲 속의 길이 좁아졌다. 이국적인 풍경에 주위를 둘러보니 숲의 바닥에는 가시와 정체 모를 과일들이 잔뜩 깔려있었다. 매우 오래된 듯한 나뭇가지들은 구불구불하게 굽어 서로 연결돼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붙어있어 앞으로 가기 위해선 종종 몸을 수그려야 했다. 나무에는 나뭇잎 대신 가시가 박혀있었고 사방이 가시 박힌 나무들로 가득했다. 노란 덩굴이 나뭇가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덩굴에 손을 뻗어 걷어내는 순간 토르는 덩굴이 아니라 뱀을 만졌다는 걸 깨달았다. 토르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쳐 간신히 뱀의 공격을 피했다.

토르는 일행들이 자신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여겼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두가 마찬가지로 겁을 잔뜩 먹은 채로 토르의 행동을 이해했다. 낯선 짐승들의 알 수 없는 소리가 토르 일행을 에워쌌다. 아주 멀리에서부터 울려 퍼지기도 했고 어떤 소리는 매우 가까이서 들렸다.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매복을 당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늘이 더욱 짙게 드리워져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 조차 힘들어졌다. 손을 더듬어 검 자루를 쥐었고 검을 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손가락이 하얗게 될 정도로 피가 안 통했다. 다른 한 손은 새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머지 일행들도 행여 놓칠 새라 각자의 검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훌륭한 전사처럼 강해지고 자신감과 용기가 솟아나길 간절히 바랬다. 에레크 명장의 조언을 떠올렸고, 공포 속에서 평생을 살 바엔 차라리 죽음 앞에 당당히 맞서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토르는 턱을 치켜들고 대담하게 걸었다. 속도를 높여 일행들보다 앞서 나갔다. 심장이 떨렸지만 스스로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었다.

“우리가 정확히 뭘 순찰하는 거야?”

토르는 질문을 하고 나서야 질문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고, 엘덴의 조롱을 예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토르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휘둥그래진 엘덴의 얼굴이 보였다. 토르의 질문 덕에 엘덴이 잔뜩 겁을 먹어버렸다. 엘덴의 모습을 보자 오히려 자신감이 붙었다. 토르는 엘덴보다 어리고 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심을 이겨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적들이겠지, 아마도.”

결국 리스 왕자가 대답했다.

“적들이 누구에요? 어떻게 생겼죠?”

“모든 종류의 적이 다 있다고 보면 돼.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와일즈야. 와일즈엔 야만생명체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악한 종족들이 있어.”

“그렇다면 이렇게 순찰하는 목적이 뭐죠? 이걸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거죠? 우리가 사악한 종족들을 하나 둘 죽여봤자 그들은 수백만이 넘잖아요?”

오코너도 왕자에게 물었다.

“그들의 개체 수를 감소시키려고 온 게 아니야. 우리의 존재를 알려주려고 온 거야. 폐하를 대신해서, 캐니언 협곡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거야.”

“그렇다면 그들이 넘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넘어오면 그때 본때를 보여주는 게 좀 더 효율적일 것 같아요.”

오코너가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아니야, 아예 접근조차 못하게 하는 편이 나아. 그게 바로 이 순찰의 목적이고. 적어도 우리 형들 말에 따르면 그래.”

숲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수록 토르의 심장이 떨렸다.

“얼마나 멀리까지 가야 하는 거야?”

엘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콜크 사령관님께서 하신 말씀 기억나? 빨간 현수막을 회수해서 가져가야 하잖아. 그래야 우리가 순찰을 제대로 다녀 왔다는 걸 증명하지.”

리스 왕자가 대답했다.

“도대체 현수막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가 않아요. 사실, 앞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잘 안보여요. 우리 어떻게 돌아가죠?”

오코너가 덧붙였다.

그 누구도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토르도 오코너와 같은 생각이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어떻게 현수막을 찾는단 말인가? 혹시라도 이 모든 게 속임수가 아닌가 생각했다. 왕의 부대가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심신단련이라고 믿고 싶었다. 토르는 명장에게 들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왕실에 있는 토르의 적들. 순찰을 돌고 있자니 기운이 쭉 빠졌다. 혹시 이 모든 게 미리 조작된 것인가?

갑자기 어디선가 끔직한 비명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나뭇가지 사이로 커다란 무언가가 가로질렀다. 토르는 재빨리 검을 꺼냈고 나머지 일행도 검을 꺼냈다. 적막 속에서 무쇠 검이 검 집을 빠져 나오는 소리만 울렸다. 네 사람은 눈 앞으로 검을 든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뭐였어?”

엘덴이 울부짖었다. 공포에 질려 목소리까지 갈라졌다.

다시 한번 짐승이 눈 앞을 가로질렀다. 숲의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빠르게 질주했다. 덕분에 모두 짐승의 모습을 자세히 보였다.

짐승의 정체를 확인하자 긴장으로 움츠러들었던 모두의 어깨가 풀렸다.

“그냥 사슴이잖아. 여태껏 본 사슴 중에 가장 이상하게 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사슴이었어.”

안도감이 섞인 목소리로 토르가 대답했다.

리스 왕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왕자의 나이 치고는 꽤 성숙한 웃음소리였고 덕분에 모두가 안심했다. 왕자의 웃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왕자가 장차 왕이 되어 웃는 모습이 눈 앞에 절로 그려졌다. 토르는 리스 왕자와 함께라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토르도 덩달아 왕자를 따라 웃었다. 겨우 사슴 하나에 지레 겁을 먹은 게 허무할 뿐이었다.

“난 네가 겁에 질리면 목소리가 갈라진다는 걸 처음 알았지 뭐야.”

왕자가 다시 웃으며 엘덴을 놀렸다.

“앞이 잘 보이기만 했어도, 두드려 패줄 텐데.”

엘덴이 대답했다.

“난 네가 잘 보이는데, 한 번 해봐.”

엘덴은 왕자를 노려봤다. 그렇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대신에 엘덴은 검을 칼집에 다시 꽂았다. 나머지 소년들도 모두 검을 도로 집어 넣었다. 리스 왕자가 엘덴을 놀려먹을 수 있다는 게 대단했다. 괴롭힘을 일삼는 엘덴도 사실 한번 제대로 당해봐야 했다. 엘덴이 왕자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큰데도 불구하고 겁내지 않고 그를 놀릴 수 있는 왕자가 부러웠다.

토르는 이제서야 긴장이 좀 풀렸다. 방금 전 일은 와일즈에서 첫 번째 환영 식을 치른 셈 쳤다. 기괴하게 생긴 사슴이었지만 토르 일행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토르는 몸을 쭉 펴고 웃어댔다. 살아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계속 웃어라, 비정상아. 누가 마지막에 웃는지 보자고.”

엘덴이 비꼬았다.

‘왕자나 나나 너 때문에 웃는 게 아니야,’ 토르는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저 무사히 살아 있는 게 감사해서 그래.’

그렇지만 입 밖으로 발설하진 않았다. 뭐라고 말해도 엘덴의 마음은 풀리지 않을게 분명했다.

“봐봐! 저쪽!”

오코너가 말했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재빨리 오코너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뭇가지 위에 걸린 왕의 부대 현수막이었다.

모두 다 현수막을 향해 뛰었다.

엘덴은 나머지 부대원보다 앞서 뛰었고 팔을 저어 다른 부대원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저 깃발은 내 꺼야!”

엘덴이 소리쳤다.

“내가 먼저 발견했어!”

오코너가 반박했다.

“그렇지만 내가 먼저 잡을 거야, 그리고 내가 가지고 갈 거야!”

토르는 화가 났다. 엘덴의 행동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순간 누구든지 배너를 찾아서 가져온 사람이 포상을 받을 거라는 명장님의 말씀이 떠올랐고 그제서야 엘덴이 전속력으로 뛰어간 이유를 이해했다. 그래도 엘덴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팀으로 행동해야 했다. 엘덴의 본심이 고스란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다른 누구도 깃발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뛰고 있었다. 이에 토르는 엘덴이 더욱 싫어졌다.

팔꿈치로 오코너를 제치고 깃발을 쫓아간 엘덴은 다른 부대원들보다 먼저 도착해 깃발을 잡아챘다.

그러자 난데없이 나타난 커다란 그물이 바닥에서 엘덴을 감싸며 공중으로 오므라들었다. 순식간에 엘덴은 공중에 매달린 신세가 됐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덫에 걸린 짐승 꼴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공포에 질린 엘덴이 울부짖었다.

나머지 부대원들이 엘덴 가까이 걸어가 멈춰 섰다. 리스 왕자가 웃기 시작했다.

“봐, 누가 진짜 겁쟁이인지?”

왕자는 재미있다는 듯 외쳤다.

“헛소리 하지마! 왕자든 뭐든 내려가면 당장 죽을 줄 알아!”

“아 그래? 그게 언제가 될까?”

리스 왕자가 쏘아붙였다.

“내려줘!”

엘덴은 덫에 갇혀 빙빙 돌고 있었다.

“당장 내리라고 했다!”

“오, 너 지금 우리한테 명령한 거야?”

왕자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왕자는 고개를 돌려 토르를 마주봤다.

“어떻게 생각해?”

“제 생각엔 우리 모두 엘덴에게 사과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특히 토르한테요.”

오코너가 대답했다.

“나도 찬성, 제안 하나 할게. 사과해, 진심으로 해야 해. 그럼 널 꺼내 줄 수도 있어.”

리스 왕자가 말했다.

“사과?”

엘덴이 소스라쳤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해.”

리스 왕자는 다시 토르를 바라봤다.

“오늘 밤 저 덩치녀석을 그대로 이곳에 놔둬야겠다. 짐승들한테 훌륭한 먹이 감이 될 거야. 어떻게 생각해?”

토르의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참 좋은 생각이에요.”

오코너가 찬성했다.

“기다려!”

엘덴이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오코너는 덫을 타고 올라가 허공에 매달린 엘덴의 손에서 깃발을 뺐었다.

“결국 깃발은 우리 차지네.”

오코너가 말했다.

세 소년은 뒤를 돌아 길을 재촉했다.

“안돼, 기다려! 이렇게 두고 가면 어떻게 해! 그러지마!”

그 누구도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잘못했어! 제발! 내가 잘못했어!”

엘덴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토르가 멈췄다. 리스 왕자와 오코너는 계속 걸어갔다. 결국 리스왕자는 다시 돌아와 토르에게 물었다.

“안가고 뭐해?”

“엘덴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엘덴이 밉긴 했지만 또 그렇다고 그를 여기다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왜 안돼? 자초한 일이잖아.”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 엘덴이었다면 널 여기 놔두고 좋다고 가버렸을 거야. 왜 네가 엘덴을 걱정해?”

오코너가 거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도 엘덴처럼 행동하면 안되잖아.”

왕자는 양 손을 허리춤에 얹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여 토르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도 엘덴을 여기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고. 그저 잠깐 동안만 내버려 두려고 했어. 하지만 네 말이 옳아. 엘덴은 못 버틸지도 몰라. 아마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고. 넌 너무 마음이 약해. 그게 문제야. 그렇지만 그래서 내가 네 친구가 된 거기도 해.”

왕자는 토르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설명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오코너가 토르의 나머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동참했다.

토르는 돌아가서 그물 위로 올라가 덫을 잘랐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덴이 떨어졌다. 엘덴은 재빨리 발을 놀려 그물을 걷어내고 흥분한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 검! 어디 있는 거야?”

엘덴이 소리쳤다.

토르도 바닥을 살폈지만 너무 어두워 찾을 수가 없었다.

“덫이 올라갈 때 나무위로 날아간 것 같아.”

토르가 대답했다.

“검이 어디 있던지, 여긴 없는 거잖아. 그냥 포기해.”

왕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왕자님은 몰라요, 왕의 부대에는 딱 하나의 규칙만이 존재해요. 절대 자신의 무기를 잃어버리지 말라. 검이 없으면 전 돌아갈 수 없어요. 쫓겨날 거라고요!”

토르는 다시 한번 바닥을 샅샅이 살폈다. 나무 주변도 살펴보고 찾을 수 있는 모든 곳을 찾아봤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엘덴의 검은 없었다. 왕자와 오코너는 그대로 서 있었다. 찾아줄 필요성을 못 느낀 듯 했다.

“미안해, 검을 찾을 수가 없어.”

토르가 말을 건넸다.

엘덴은 곳곳을 찾다 결국 포기했다.

“다 너 때문이야.”

엘덴은 토르에게 삿대질을 했다.

“너 때문에 일이 이지경이 됐다고!”

“나 때문이 아니야, 너 때문이야. 네가 깃발을 보고 뛰었잖아. 네가 우리를 곤경에 빠트렸어. 너 스스로를 원망해.”

“난 정말 네가 끔찍이 싫어!”

엘덴은 토르에게 돌진해 토르의 상의를 붙잡아 땅으로 밀어 붙였다. 무방비 상태로 넘어진 토르 위로 엄청난 무게의 엘덴이 올라탔다. 몸을 굴려 빠져나가려 했지만 다시 엘덴이 몸을 돌려 토르 위를 점했다. 엘덴은 너무 크고 힘이 셌다. 엘덴을 막기가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엘덴이 토르를 놔주더니 뒷걸음질쳤다. 순간 칼집에서 검을 빼내는 소리가 들렸고 올려다보니 리스 왕자가 엘덴의 목에 칼끝을 겨누고 있었다.

오코너가 토르에게 달려와 몸을 일으켜줬다. 토르는 리스 왕자와 오코너 옆에 서서 바닥에 주저앉아 왕자의 칼을 마주한 엘덴을 내려다 봤다.

“내 친구를 다시 한번 건드린다면, 장담하겠는데, 널 죽일 거야.”

왕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심각한 어조로 엘덴에게 경고했다.

제 17장

토르, 리스왕자, 오코너, 엘덴, 에레크 명장은 타오르는 모닥불 가까이 빙 둘러 앉았다. 누구 하나 말이 없었고 모두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한여름 밤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소용돌이치며 부는 신비스런 바람이 영원히 사라지질 않을 것 같은 안개와 뒤섞여 차가운 기운을 빚어냈고 덕분에 뼛속까지 춥고 눅눅했다. 토르는 앞으로 몸을 숙여 모닥불 가까이에 손을 비볐지만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일행이 챙겨와 나눠준 육포를 뜯어먹었다. 형편없이 질기고 짰지만 그런대로 허기를 달래줬다. 에레크 명장이 토르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는 순간 손끝에 부드러운 가죽 포대의 감촉이 전해졌다. 가죽 포대 안으로 찰랑거리는 액체의 무게가 상당했다. 토르는 포대를 들어올려 오랫동안 입에서 떼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처음으로 몸에 온기가 돌았다.

모두들 입을 다문 채 불꽃만 주시했다. 토르는 여전히 안절부절 못했다. 캐니언 협곡을 건너와 적들의 영토에 머문다는 사실에 한시라도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한편 토르는 뒷마당에 앉아있는 듯한 에레크 명장의 차분한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안심이 되었다. 비록 와일즈였지만 에레크 명장이 함께 있었고 다같이 모닥불 앞에 앉아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명장은 숲을 주시하며 모든 소리에 주위를 기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감 있고 편안해 보였다. 어떤 위험이 닥쳐도 토르 일행은 에레크 명장의 보호 하게 안전하리라 확신했다.

모닥불을 마주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주변을 살펴보니 모두들 안심하고 있는 눈치였다. 다만 엘덴만은 예외였다. 숲에서 나온 뒤로 계속 시무룩했다. 오전에 보여줬던 넘치는 자만심은 온데간데 없었고 검을 잃은 채로 줄 곳 뚱한 모습이었다. 콜크 사령관은 분명 무기를 잃어버린 실수를 절대 용납 안 할 것이다. 돌아가면 엘덴이 왕의 부대에서 제명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엘덴이 어떻게 위기를 넘기려 할지 궁금했다. 엘덴이 그렇게 손쉽게 무기 없이 부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꼼수를 쓰던, 대책을 마련하던 비장의 카드를 생각해 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이든 그다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 게 분명했다.

토르는 고개를 들어 에레크 명장이 주시하는 곳을 따라 서쪽의 먼 경계선을 바라봤다. 희미한 불빛이 끝도 없이 쭉 늘어져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불빛의 정체가 궁금했다.

“저게 뭐죠? 불빛의 정체가 뭐죠? 명장님께서 주시하고 계신 불빛이요.”

토르가 질문을 건넸다.

명장은 오랫동안 답이 없었다. 오직 부서지는 바람소리만이 정적을 채워주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명장은 토르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고랄족이다.”

일행들과 시선을 주고 받은 토르는 그들의 눈빛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고랄족이란 말에 토르도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고랄족들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겨우 숲 하나와 드넓은 평지를 사이에 두고 고랄족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미 캐니언 협곡을 건너왔기에 캐니언 협곡의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위치였다. 어렸을 때부터 고랄족에 대해 들어왔다. 링 대륙을 침범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흉포한 야만생명체. 게다가 지금 이곳은 보호막이 없는 와일즈 영토였다. 고랄족의 규모 또한 믿을 수 없이 대단했다. 이들은 방대한 수의 군대를 이뤄 대기 중이었다.

“두렵지 않으세요?”

토르가 에레크 명장에게 질문했다.

명장이 고개를 저었다.

“고랄족은 다같이 한번에 움직인다. 고랄족의 군대는 매일 밤 저곳에서 주둔한단다. 몇 년 동안 그래왔어. 고랄족이 침범할 땐 모든 병력을 총 동원해 한번에 캐니언 협곡을 쳐들어 올 거야.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운명의 검이 보호해주고 있으니까. 저들 또한 캐니언 협곡을 뚫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단다.”

“그렇다면 왜 저기서 주둔하는 거죠?”

토르가 물었다.

“저들만의 협박방식이지. 그리고 준비하고 있는 거란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선대의 고랄족들은 이미 수 차례 공격을 시도했고 캐니언을 뚫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지. 그렇지만 내 생애에 고랄족들의 침략시도는 없었어.”

머리 위로 노랑, 파랑, 주황빛으로 반짝이는 별들이 새까만 하늘 위를 밝혔다. 참으로 불가사의했다. 캐니언의 반대쪽, 이곳 와일즈는 늘 그렇듯 상상을 뛰어넘는 끔직한 곳이었다. 이에 토르는 두려웠지만 이내 침착해졌다. 왕의 부대 부대원으로서 그에 걸맞게 행동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에게 운명의 검이 있는 한 저들을 절대 공격 못 할거야.”

토르의 심정을 눈치챈듯한 명장이 토르를 안심시켰다.

“만져본 적 있으세요? 운명의 검 말이에요.”

“물론 없지, 왕의 후손이 아니면 그 누구도 시도해 볼 수 없어.”

명장의 대답이 날카로웠다.

혼란스러워진 토르는 명장을 바라봤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 거죠?”

이때 리스 왕자가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설명해도 될까요?”

에레크 명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운명의 검에는 전설이 하나 있어. 사실 운명의 검을 들어올린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어. 전설에 따르면 선택 받은 자만이 그 검의 주인이 된대. 왕의 신분이어야만 그 검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혹은 왕의 후손으로써 왕의 후계가 된 사람만이 시도해 볼 수 있어. 그래서 운명의 검은 아직도 주인 없이 잠들어 있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의 폐하께서는요? 왕자님의 아버지께서는요? 폐하께서 들어보시면 되잖아요?”

리스 왕자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도 시도해 보셨어. 딱 한번. 왕위를 계승하시던 날. 그리고 나서 말씀해주셨지. 들 수 없었다고. 운명의 검은 폐하께는 질책의 대상이야. 그 검을 싫어하시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폐하를 괴롭히는 존재거든. 선택된 자가 나타난다면, 링 대륙은 모든 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우리 모두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풍요로워질 거야. 더 이상의 전쟁도 없어지고.”

“동화책에나 나오는 꾸며낸 소리야.”

엘덴이 끼어들었다.

“그 검은 누구도 못 들어. 너무 무거워. 드는 건 불가능해. 더군다나 ‘선택된 자’가 어디 있어. 다 헛소리야. 그 전설이란 게 평민들 다스리기 편하자고 만든 거라니까. 백성들이 목이 빠지게 ‘선택된 자’가 나오길 기다리게. 그래야 맥길 가문이 좀 그럴듯해 보이지. 전부 왕족 편의 봐서 지어낸 전설이야.”

“말조심해.”

에레크 명장이 쏘아붙였다.

“어디서 감히 함부로 왕족에 대해 무례하게 말하는 거냐.”

풀 죽은 엘덴은 고개를 떨궜다.

토르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한번에 이해하기엔 무리였다. 평생토록 운명의 검을 직접 보는 순간을 꿈꿨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검의 모양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누구도 검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밝혀내지 못했고 분명 마법의 무기일거라는 예측만 떠돌 뿐이었다. 만약 운명의 검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궁금했다. 미개의 왕국에게 폐하의 군대가 붕괴될까? 토르는 저 멀리 경계선 너머에 머무는 반짝이는 불빛을 다시 바라봤다. 불빛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 너머로 가본 적 있으신가요? 저 멀리에요. 숲을 지나서요. 와일즈 안으로요.”

토르가 명장에게 질문했다. “

나머지 일행도 고개를 돌려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토르는 명장의 대답이 참을 수 없이 궁금했다. 허나 무거운 침묵만 이어졌다. 에레크 명장은 고랄족의 불빛을 계속해서 주시할 뿐이었다. 질문이 묻혀버린 것 같았다. 토르는 너무 꼬치꼬치 캐물은 게 아닌가 염려됐다. 에레크 명장에게 감사하고 의지하는 만큼 명장이 자신의 좋은 면만 봐주길 원했다. 게다가 토르 자신도 사실은 명장의 대답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차라리 질문을 거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명장의 대답이 들려왔다.

“가봤단다.”

명장의 목소리가 엄숙했다.

엄숙한 분위기가 모두에게 전달되어 긴 침묵이 흘렀다. 더 이상의 설명 없이도 명장의 대답에서 깊이가 밀려왔다.

“그곳은 어떤가요?”

오코너가 물었다.

오코너의 질문에 토르는 안도했다. 어려운 질문을 오코너가 대신 건넨 순간이었다.

“그 곳은 무자비한 왕국이 지배하고 있지. 그렇지만 영토가 광활하고 그 모습도 다양해. 야만생명체의 땅이 있고 노예들의 땅이 있지. 괴물들의 땅도 있단다. 너희들이 쉽게 상상조차 못할 괴물들이지. 그 곳에는 무수한 사막과 산과 언덕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셀 수 없이 많은 습지와 늪과 멋진 바다가 있지. 마법사의 땅이 있고 용의 땅도 있단다.”

토르는 놀란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용이요? 용은 존재하지 않잖아요.”

토르를 바라보는 에레크 명장의 눈빛이 유달리 진지했다.

“장담컨대, 용은 존재 한단다. 그리고 그곳엔 절대 가고 싶지 않을 거다. 고랄족들 마저 두려움에 떠는 곳이야.”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런 깊숙한 곳까지 모험을 했다는 게 토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명장이 어떻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기회가 되면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끝없이 솟구쳤다. 미개의 왕국이 어떤 모습인지 또 누가 그 왕국을 지배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들이 왜 침략을 꿈꾸는지도 궁금했다. 명장이 그곳에 간 건 언제이며 언제 돌아왔는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토르는 질문 대신 모닥불을 바라봤다. 불빛이 약해지고 날이 더 추워졌다. 머릿속이 질문으로 가득했고 그럴수록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더 이상 물어보기엔 이미 너무 늦은 밤이었다.

질문 대신 잠을 청하기로 했다. 땅바닥에 머리를 뉘여 눈 앞에 이국 땅의 흙을 바라봤다. 언제쯤 다시 부대로 돌아갈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궁금함을 품으며 눈을 감았다.

*

눈을 뜬 토르는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어디에 있고 또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지 납득이 안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슴까지 안개가 자욱해 발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캐니언 협곡 위로 동이 트고 있었다. 왕궁은 저 멀리 캐니언 협곡 너머에나 있었다. 여전히 토르는 캐니언 협곡의 반대쪽에 있었다. 협곡의 외각, 미개의 영토였다. 심장이 요동쳤다.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어찌된 영문인지 경계를 서는 실버 대원이 한 명도 없었다. 다리가 너무 황량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막막했다. 다리를 이어주는 나무 널빤지가 도미노처럼 하나씩 떨어져나갔고 순식간에 붕괴된 다리가 절벽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절벽 바닥의 깊이를 대변해주듯 무너져 내린 다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고개를 돌려 일행을 찾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뭘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이곳, 캐니언 협곡의 반대편에서 무너져 내린 다리를 뒤로하고 토르는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다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한 심정이었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옮겨 숲을 살폈다. 움직임이 감지됐다. 토르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걸어갈 때마다 발이 땅에 잠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뭇가지 위에 매달린 그물이 하나 보였다. 동그랗게 돌고 있는 그물 안에는 엘덴이 갇혀 있었다. 엘덴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나뭇가지가 삐걱거렸다.

매 한 마리가 엘덴의 머리 위에 앉아있었다. 양쪽 눈 가장자리에서 이마까지 검은 줄이 나있었고 몸에서는 은빛 광이 흐르는 게 예사로운 생김새가 아니었다. 매는 몸을 구부려 엘덴의 눈알을 뽑아 물었다. 부리 안에 눈알을 문 채 몸을 돌려 토르를 주시했다.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엘덴이 죽었다는 걸 확인 한 순간 숲 전체에서 갑자기 빠른 움직임이 느껴졌다. 사방으로 고랄족의 군대가 등장했다. 거대한 크기의 고랄족은 허리에 천 하나만 두른 차림새였다. 근육이 왕성하게 발달된 넓은 가슴에 얼굴 한가운데 코가 세 개나 있었다. 양 쪽의 송곳니는 몹시 길고 날카로운 곡선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고랄족들은 으르렁거리며 전속력으로 토르에게 돌진했다. 몸서리쳐지는 소리였다. 그 어디에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손을 뻗어 검을 찾았지만 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토르는 숨을 가쁘게 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광적으로 온 사방을 둘러봤다. 주위는 고요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정적만 울렸다. 꿈에서 본 적막이 아니었다.

새벽의 첫 번째 빛 아래 살펴보니 토르 옆으로 리스왕자, 오코너, 에레크 명장이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쭉 뻗고 잠에 취해있었다. 그들 옆으로는 다 타버린 불씨만 남아 있었다. 바닥에서 매가 한 마리 낮게 뛰었다. 매는 몸을 돌려 토르를 향해 머리를 젖혔다. 몸집이 컸고 은빛 매무새가 당당해 보였다. 눈 사이로 난 검은 줄이 이마까지 이어져 있었고 토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토르와 눈을 맞춘 매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몸서리가 쳐졌다. 꿈 속에서 본 그 매였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매가 암시를 보내고 있었다. 토르가 꾼 꿈은 단순한 꿈 그 이상이었다. 불길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양 팔로 미세한 전율이 느껴졌다.

재빨리 일어서 주위를 살펴봤다. 혹시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내야 했다. 아무 소리도 없었고 없어진 것도 없었다. 다리도 그대로였고 실버 대원들도 다리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슨 암시일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한 사람이 없었다. 엘덴.

처음에는 엘덴이 토르 일행을 떠난 거라 생각했다. 다리를 건너 안전한 캐니언 협곡으로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검을 잃어버린 수치심으로 부대를 완전히 떠난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숲 쪽을 살펴보니 이끼 위로 눌린 자국이 보였고 아침 이슬 덕에 지나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틀림없는 엘덴 발자국이었다. 엘덴은 떠난 게 아니었다. 숲으로 들어가버렸다. 혼자서 말이다. 엘덴도 기분 전환이 필요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곧 토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엘덴의 목적은 잃어버린 검이었다.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가버리다니. 엘덴이 얼마나 왕의 부대에 집착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엘덴이 위험한 것 같았다. 엘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게 분명했다.

토르의 예감이 맞는다는 듯 때맞춰 매가 다시 울었다. 그리고는 도약해서 공중으로 부양해 토르의 얼굴에 돌진했다. 고개를 숙여 간신히 매의 발톱을 피했다. 다시 높이 오른 매는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토르는 재빨리 움직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엘덴의 발자국만 따라 숲 속으로 질주했다.

혼자서 엘덴을 찾으러 나선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오히려 멈추지 않고 전속력으로 와일즈 영토 깊숙이 달렸다. 만약 지금 멈춰서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지 생각해본다면 아마도 옴짝달싹 못하고 겁에 질려버릴 것 같았다. 그러지 않기 위해 계속 몸을 움직였다. 엘덴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만이 전부였다. 토르는 이른 새벽빛을 받으며 숲 속으로 쉬지 않고 달려갔다.

“엘덴!”

토르가 소리 높여 외쳤다.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엘덴이 곧 죽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엘덴이 토르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냥 내버려두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지만 도저히 돕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만약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엘덴은 절대 도우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토르가 죽는걸 흡족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토르는 아니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외쳐대고 있었다. 더군다나 눈앞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데도 말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변화가 느껴졌다. 마치 몸이 새로운 존재, 혹은 신비한 기운에 의해 조종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불안감이 엄습했음에도 이미 몸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성을 잃은 걸까? 과민반응일까? 이것도 결국 꿈일까? 차라리 되돌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토르는 계속해서 달렸다. 전속력으로 질주했고 두려움이나 의심 따위에 꺾이지 않았다. 가슴이 터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뛰었다.

토르는 방향을 바꿔 상체를 숙였다. 뭔가를 발견한 것 같아 가던 길을 멈췄다. 선 채로 가쁜 숨을 골랐다. 방금 본 장면을 이해하려 했지만 설명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단련된 전사라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서 있는 엘덴이 보였다. 단검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들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끔찍했다. 엘덴과 토르의 머리 위로 우뚝 서있는 생물체는 남자 네 명과 맞먹을듯한 너비에 키는 족히 3미터는 돼 보였다. 정체 모를 괴물은 근육으로 뭉친 붉은색 팔을 들여 올렸다. 손에 달린 기다란 손가락 세 개는 손톱처럼 날카로웠고 악마 같은 머리에는 뿔이 네 개나 나있었다. 턱이 길고 이마가 넓었다. 노랗고 큰 두 눈 밑으로 상아처럼 구부러진 송곳니 두 개가 드러났다. 괴물은 몸을 쭉 뻗고 날카롭게 울었다.

토르 옆으로 우거진 수백 년 된 커다란 나무들이 괴물의 울음소리에 힘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엘덴은 공포로 얼어 붙었다. 손에 쥔 검마저 떨어트렸고 그가 서있는 땅이 축축해졌다.

괴물은 으르렁 거리며 군침을 흘렸고 엘덴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토르 역시 겁을 잔뜩 먹었다. 그러나 엘덴과 달리 토르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어떤 연유에선지 공포심 덕에 감각이 발달된 것 같았다. 좀더 생동감이 느껴졌고 시야가 좁아져 엘덴을 노리는 괴물의 너비와 폭과 힘과 속도에 최대한 집중 할 수 있었다. 모든 움직임이 감지됐다. 뿐만 아니라 토르 자신의 위치와 토르가 가진 무기에도 더욱 수월히 집중할 수 있었다.

행동에 나선 토르는 괴물과 엘덴 사이로 돌진했다. 괴물이 포효하자 멀리서도 그 뜨거운 입김이 전해졌다. 무시무시한 소리에 토르의 머리털이 바짝 섰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에레크 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해지거라. 두려움을 버리고 평정을 유지하거라. 토르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손에 쥔 검을 높게 들고 달려들어 괴물의 가슴에 깊이 박았다. 심장 이길 바랬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괴물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와 토르의 손을 타고 흘렀다. 토르는 멈추지 않고 칼자루만 남을 때까지 검을 더 깊게 꽂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괴물은 죽지 않았다.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괴물은 몸을 휘둘러 토르의 갈비뼈를 강타했다. 엄청난 타격에 토르의 갈비뼈가 모두 부서졌다. 토르는 그대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힌 뒤 바닥에 떨어졌다.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머리에 전해오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토르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하고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괴물은 몸을 수그려 몸에 박힌 검을 뽑았다. 커다란 괴물 손에 들린 검이 이쑤시개마냥 초라해 보였다. 괴물 손에 던져진 검은 나무 뒤로 날아가 숲 속에 자취를 감췄다.

괴물의 모든 관심이 이제 토르에게 쏠렸고 토르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엘덴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괴물의 공격대상이 토르로 바뀌자 엘덴도 행동에 나섰다. 엘덴은 괴물 뒤로 달려가 등에 올라탔다. 덕분에 괴물이 주춤했고 그 사이 토르는 몸을 일으켰다. 광분한 괴물은 팔을 뒤로 흔들어 엘덴을 던져버렸다. 엘덴은 속수무책으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혀 그대로 쿵 하며 땅에 떨어졌다.

괴물은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고, 격한 숨소리와 함께 다시 토르에게 주의를 돌렸다. 으르렁대며 토르에게 접근하는 괴물이 입을 벌리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사라졌고 괴물과 토르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괴물이 토르를 덮쳤지만 몸을 굴려 빠져 나와 찰나의 순간에 위기를 면했다. 괴물의 손이 그대로 토르가 있었던 나무 위를 덮쳤고 그 힘이 얼마나 센지 나무가 뽑혀버렸다.

괴물은 토르를 밟아버릴 기세로 발을 높이 쳐들었다. 토르는 몸을 굴려 다시 한번 위기를 피했고 토르가 머물던 자리에는 괴물의 발자국이 땅 속 깊숙이 패여 있었다.

토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새총에 돌을 넣고 던졌다.

괴물의 눈과 눈 사이를 정면으로 조준했다. 그 어느 때보다 있는 힘껏 돌을 날렸고 돌에 맞은 괴물이 뒤로 비틀거렸다. 분명 죽었을 거라 확신했다.

놀랍게도 괴물은 멈추지 않고 토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토르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자신이 가진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소환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곤 괴물에게 돌진해 뛰어올랐다. 그가 가진 초인적인 힘으로 괴물에게 달려들어 괴물을 제압하고 땅에 내려꽂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토르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지 않았다. 여전히 토르는 평범한 한 소년일 뿐이었다. 무지막지한 괴물 앞에 선 나약한 소년일 뿐이었다.

괴물이 토르의 허리를 잡아 공중에 들어올려 토르는 속수무책으로 거꾸로 매달렸다. 이내 괴물이 토르를 던져버렸고 화살처럼 날아간 토르는 나무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대로 누워 실신한 토르의 두개골과 갈비뼈가 모두 부서졌다. 괴물은 다시 토르를 향해 달려들었고 토르도 이젠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는 걸 예감했다. 괴물은 근육이 울퉁불퉁한 붉은 발을 올려 들었다. 토르의 머리를 밟을 모양새였다. 토르는 마음속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괴물이 공중에서 미동도 없이 얼어붙어버렸다. 토르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괴물이 몸을 위로하고 목을 움켜쥐었다. 순간 괴물의 목에서 튀어나온 화살촉이 보였다. 잠시 후 괴물은 무릎을 꿇고 쓰러졌고, 숨을 거뒀다.

에레크 명장이 달려와 토르를 살폈다. 그의 뒤로 리스 왕자와 오코너가 달려왔다. 자신을 쳐다보는 에레크 명장이 눈 앞에 아른거렸고 괜찮은지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눈이 감겼고 세상이 모두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제 18장

천천히 눈을 떴다. 현기증이 밀려왔고 전혀 낯선 곳이었다. 토르는 짚을 채운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아무래도 막사로 돌아온 거 같았다. 부대원들을 보기 위해 팔꿈치를 짚어 상체를 들었다.

그런데 막상 몸을 일으켜 보니 막사가 아니었다. 매우 정교하게 돌로 마감된 침실이었다. 왕실 침실이 분명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북적 이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무슨 소린지 생각하던 찰나 커다란 참나무 문이 열렸고 리스 왕자가 점잖게 걸어 들어왔다.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손으로 머리를 눌러 끔찍한 두통을 멈추려고 애썼다.

“어서 일어나, 가자. 모두들 기다리고 있어.”

왕자가 토르를 이끌며 재촉했다.

“잠시만요, 잠깐.”

토르가 몸을 추슬렀다.

“여긴 어디죠? 어떻게 된 거죠?”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잖아. 그리고 넌 곧 오늘의 영웅으로서 축하인사를 받게 될 거야!”

두 사람은 문으로 걸어갔다.

“영웅? 무슨 말이에요? 그리고……제가 여긴 어떻게 왔죠?”

“그 괴물 때문에 네가 기절해버렸어. 오랫동안 정신을 잃었고. 우리가 다같이 기절한 너를 들고 캐니언 협곡 다리를 건넜지. 정말 극적이었어. 그런 몰골로 다시 왕국에 돌아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왕자가 웃었다.

두 사람은 궁전 복도로 걸어나갔다. 걸어가는 내내 남자, 여자, 부대원, 병사, 실버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토르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서 전에 없던 경외심 같은 게 느껴졌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시선이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눈에 토르를 향한 경멸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토르를 향한 차별적인 시선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토르는 기억을 더듬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숲으로 달려간 건 기억나요. 괴물이랑 싸운 것도. 그리고 나서……”

“네가 엘덴의 목숨을 구해줬잖아. 넌 용감하게 숲 속으로 달려들어갔어, 그것도 혼자서. 왜 그런 건방진 녀석을 위해 그렇게까지 했는지 이해할 순 없지만 넌 그렇게 했어. 폐하께서 네 행동에 매우 흡족해하셔. 엘덴을 구해서가 아니라 네 용기에 감탄하셨어. 폐하께서 축하하길 원하셔. 이런 일은 모두에게 귀감이 되도록 축하해야 한다고 생각하셔. 그래야 폐하도, 왕의 부대도 체면이 서거든. 또 이를 기념하길 원하셔. 폐하께서 네게 상을 내리실 거야. 그래서 네가 지금 여기 있는 거고.”

“제게 상을요? 그렇지만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엘덴을 구했잖아.”

“그냥 한 거에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 그래서 폐하께서 네게 상을 내리시려는 거야.”

그저 난처할 뿐이었다. 토르가 한 행동이 보상을 받을만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찌됐든, 에레크 명장이 아니었다면 토르는 죽은 목숨이었다. 다시 한번 에레크 명장에게 더없이 감사했다. 토르는 언젠가 그 은혜를 보답할 기회가 주어지기만을 바랬다.

“그렇지만 우리 순찰 임무는요? 다 끝내지도 못했잖아요.”

리스 왕자는 토르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안심시켰다.

“친구여, 자넨 한 소년의 생명을 구했다네. 그것도 왕의 부대 부대원을. 그보다 순찰 업무가 중요하진 않지. 무탈한 첫 순찰 임무 치고는 엄청난 일을 했지!”

왕자가 웃었다.

또 다른 복도 끝에 다다르자 문 앞에 서있던 두 명의 병사가 토르와 리스 왕자에게 문을 열어줬다. 들어가 보니 넓은 궁실이었다. 넓은 공간에는 약 백 맹 정도 되는 전사들이 서 있었다. 대성당을 연상케 하는 높은 천장과 형형색색 물들인 창문 밑으로 각종 무기들과 갑옷이 마치 트로피처럼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전사의 전당이었다. 가장 뛰어난 전사들, 실버들이 회동을 갖는 장소였다. 토르는 벽에 진열된 명성 높은 무기들과 전설로 전해지는 영웅들의 갑옷에 시선이 빼앗겼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사의 전당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다. 행여라도 이 곳에 와볼 수 있으려나 늘 꿈꿔 왔었다. 이곳은 부대원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었다. 오직 실버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더욱 놀랍게도 토르가 방에 들어서자 전당 안에 있던 모든 실버들이 몸을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그들은 토르에게 경외심을 표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전사들을 한곳에서 보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의 인정을 받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꿈속에 있었는데 말이다.

리스 왕자가 어안이 벙벙해진 토르의 표정을 살폈다.

“최정예 실버 대원들이 너를 예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거야.”

기분이 우쭐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를 예우하러요? 그렇지만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아니란다.”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에레크 명장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토르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넌 용감함과 명예로움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눈 앞에 위험을 감수하고서. 넌 동지를 구하기 위해 네 목숨까지 바치려 했다. 그게 바로 왕의 부대가 추구하는 정신이자 실버로서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지.”

“명장님이야 말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어요. 명장님이 아니셨으면 전 그 괴물한테 죽었을 거예요. 어떻게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명장을 활짝 웃었다.

“벌써 했단다. 마상경기 기억 나지? 이제 우리 서로 빚을 갚았구나.”

토르는 전당의 제일 안쪽에 위치한 맥길 왕의 왕좌로 걸어갔다. 양쪽으로 리스 왕자와 에레크 명장이 나란히 걸었다. 수백 명의 이목이 토르에 집중됐고 꿈인지 생신지 알 수 없었다.

왕의 뒤에는 수십 명의 자문단이 서있었다. 그곳에는 왕의 첫째 아들, 캔드릭 왕자도 보였다. 토르는 왕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스스로 긍지를 느꼈다. 맥길 왕이 또다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토르와 대면한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각종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증인이 되어주고 있었다.

왕좌 앞에 걸음을 멈췄다. 맥길 왕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전당 안이 고요해졌다. 위엄에 잠겨 있던 맥길 왕이 미소를 지으며 세 걸음 앞으로 다가가 놀랍게도 토르를 끌어안았다.

전당 가득 환호성이 울렸다.

포옹 후 왕은 다시 토르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미소를 지으며 토르를 내려다봤다.

“자네가 부대원으로써 훌륭한 일을 해줬네.”

시중 하나가 왕에게 술잔을 올렸고 왕은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는 곧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용기를 위해!”

“용기를 위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왕을 따라 외쳤다. 기분 좋은 웅성거림이 퍼져나간 뒤 이내 전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네가 세운 위업을 기리기 위해, 네게 큰 상을 하사하겠다.”

왕의 신호에 신하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길고 검은 장갑을 착용한 신하의 손 위로는 어마어마한 몸짓의 매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매는 몸을 돌려 토르를 주시했다. 마치 익숙한 사람을 보고 있는 표정이었다.

토르는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어젯밤 꿈에서 봤던 은빛에 검은 줄이 이마에 드리워진 그 매였다.

“매는 우리 왕국과 왕족의 상징이다.”

왕이 설명했다.

“이 맹금은 자부심과 명예를 뜻한다. 또한 기량과 기묘함을 갖추고 있다. 충성심이 강하고 사나우며 모든 짐승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을 비행한다. 이 새는 영물이다. 이 새의 주인이 된 자는 반대로 이 새를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앞으로 네 모든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네게서 멀리 날아가겠지만 언제든지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이 시간 이후로 이 매는 너를 주인으로 섬길 것이다.”

매를 든 신하가 앞으로 나와 토르의 손과 팔목에 무거운 장갑을 씌어준 뒤 매를 토르에게 넘겨줬다. 팔 위에 찌릿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매의 무게에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토르는 팔에 힘을 잔뜩 주며 있는 힘껏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매는 매대로 토르의 팔목 위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매가 발톱에 힘을 주며 토르의 손목 위를 파고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장갑 덕에 토르에게는 그 힘만 전해졌다. 매가 몸을 돌려 토르와 눈을 맞추고 날카롭게 울었다. 매와 눈이 마주치자 알 수 없는 신비한 교감을 느꼈다. 순간 매와 토르가 영원히 서로에게 종속된 관계임을 감지했다.

“뭐라고 이름을 지어줄 것인가?”

왕이 물으며 정숙한 전당의 침묵을 깼다.

토르는 골똘히 생각해봤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빨리 결정해야 했기에 알고 있는 모든 명예로운 전사의 이름을 떠올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벽에 진열된 장식 판들을 둘러봤다. 나열된 장식 판에는 전사의 이름과 왕국의 지명들이 나열돼 있었다. 지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번도 가본적은 없지만 신비하고 강렬한 곳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매와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에스토펠레스라고 부를 거에요.”

“에스토펠레스!”

숨죽여 바라보던 사람들이 동의하는 듯 따라 외쳤다.

순간 매가 날카롭게 울며 토르가 지어준 이름에 대답했다.

에스토펠레스는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올랐다. 천정의 정점까지 올라가더니 창문 밖으로 날아가버렸다. 토르는 에스토펠레스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걱정 마세요, 언제든지 필요할 때 곁으로 올 겁니다.”

매를 건넨 신하가 말했다.

토르는 몸을 돌려 왕을 바라봤다. 토르는 지금껏 선물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상당한 위상을 가진 선물은 더더욱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토르는 어쩔 줄을 몰랐다.

“폐하.”

토르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말을 전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했네.”

사람들이 환호했고 전당 내 가득했던 긴장이 사라졌다. 사람들 사이로 생생한 대화가 흘렀고 수 많은 전사들이 토르에게 다가왔다. 어디를 봐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이분은 동부지방 출신 알고드 전사야.”

리스 왕자가 토르에게 알고드 전사를 소개했다.

“이분은 로우 마쉬즈 출신 카메라 전사…… 그리고 이분은, 바식홀드, 북폴츠에서 오셨어……”

점차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생에 처음으로 인정받는 영예로운 순간이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난생 처음으로 스스로가 대단히 가치 있게 느껴졌다.

계속해서 에스토펠레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리저리 돌아가며 기억도 못할 이름들을 듣고 전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가 전사들 사이를 헤치고 토르에게 다가왔다. 그는 토르의 손바닥에 조그맣게 돌돌 말린 쪽지 하나를 건네고 사라졌다.

토르는 쪽지를 펴서 우아한 필체의 손 글씨를 읽었다.

왕실 뒤뜰에서 만나. 성문 뒤에서.

분홍색 쪽지에서 우아한 향이 전해졌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토르는 쪽지를 보낸 사람이 누군지 고민했다. 쪽지에는 이름도 적혀있지 않았다.

리스 왕자가 몸을 기울여 어깨너머로 쪽지를 읽곤 웃어버렸다.

“보아하니 누나가 네게 관심이 있나 봐.”

왕자가 미소를 가득 보이며 말했다.

“나라면 당장 갈 거야. 누나는 기다리는 거 싫어하거든.”

얼굴에서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뒤뜰로 가려면 이쪽에 있는 문들을 모두 지나야 해. 서둘러. 누나는 금방 마음이 바뀐단 말이야.” 왕자는 토르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네가 내 매형이 된다면 난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야.”

제 19장

토르는 사람들로 북적 이는 궁전에서 리스 왕자가 알려준 대로 길을 찾아갔다. 그러나 알려준 대로 따라가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궁전은 미로같이 복잡했고 매 공간마다 여러 길이 이어졌다. 뒷문이 너무 많았고 복도는 너무 길었고 복도의 끝에는 또 다른 복도가 있었다.

왕자가 알려준 순서를 대뇌이며 작은 계단을 내려가 또 하나의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제서야 리스왕자가 말한 빨간 손잡이가 달린 작은 원형 문이 눈에 들어왔다. 토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두르며 문밖을 나섰더니 한여름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 볕에 눈이 부셨다. 야외로 나오니 마음이 들떴다. 답답한 궁전 밖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햇살을 쬈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저절로 실눈이 떠졌고 서서히 빛에 적응했다. 토르의 눈앞에 왕실 정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울타리는 다양한 모양으로 빈틈없이 손질돼 단정하게 늘어섰고 그 사이로 산책로가 구불구불 이어졌다. 곳곳에 분수가 보였고 특이한 나무들도 가득했다. 이른 여름 과일들이 유실수마다 주렁주렁 열렸고 들판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웬돌린 공주의 흔적을 찾아 곳곳을 두리번거렸다. 뒤뜰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원 밖으로 아주 높게 담을 쌓아 공간을 분리해 논 걸 보니 아무래도 왕족만이 출입이 가능한 정원 같았다. 쉬지 않고 둘러 봤지만 공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쪽지가 가짜가 아닌가 의심했다. 아마 그럴 확률이 높았다. 감히 공주님 같은 분이 토르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게 가당하기나 하단 말인가?

고개를 숙여 다시 쪽지를 읽었다. 그러나 토르는 수치심에 쪽지를 이내 말아 넣었다. 놀림을 당한 게 분명했다. 이런 식으로 공주와 다시 만날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너무 속이 상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로 돌았다. 궁으로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궁으로 이어지는 문을 막 열려던 순간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어딜 가는 거야?”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새가 지저귀는 것만 같았다.

혹시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의심했다. 뒤를 돌아 살펴보니 성벽 아래로 그늘진 곳에 공주가 앉아 있었다. 분홍색으로 장식한 순백의 공단 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고 있었다. 토르가 기억 속에서 꺼내보던 공주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가 있었다. 그웬돌린 공주. 첫 만남 이후 계속해서 꿈꿔왔던 소녀. 파랗고 초롱초롱한 눈과 빨간 머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미소의 그녀. 흰색과 분홍색의 창이 큰 모자로 햇빛을 가리고 있었고 모자 아래로 그늘진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토르는 잠시 두리번거리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음……저기……음……잘 모르겠는데……저는……안에 들어가려 했어요.”

토르는 또다시 공주 앞에서 허둥지둥 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생각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게 맘처럼 되질 않았다.

공주가 웃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다.

“왜 그러려고 했는데?”

공주가 장난치듯 물어봤다.

“방금 전에 여기 왔잖아.”

토르는 당황했다. 혀가 마비된 것 같았다.

“공주님을……찾을 수가……없어서요.”

공주가 다시 웃었다.

“나 여기 있잖아. 이쪽으로 와서 내 손 좀 잡아주지 않을래?”

공주가 한 손을 내밀었다. 토르는 서둘러 달려가 몸을 구부리고 공주의 손을 잡아 일어서는걸 도왔다. 부드러운 공주의 살결이 토르의 손에 닿은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공주의 연약한 손이 토르의 손에 꼭 맞게 쥐어졌다. 공주는 고개를 들어 토르와 눈을 맞췄고 잠시 손을 그대로 올려 놓은 뒤 천천히 일어섰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공주의 손끝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이대로 계속 손을 잡고 있길 바랬다.

일어선 공주는 빼낸 손을 다시 토르의 팔에 감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걸었다. 공주는 구불구불하게 연결된 산책로로 토르를 안내했다. 조약돌이 깔린 좁은 길을 따라 걸었고 미로 같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밖의 시선이 차단된 곳이었다.

토르는 긴장했다. 이런 곳에 평민의 신분으로 폐하의 딸과 함께 들어와 곤경에 처해질까 염려됐다. 이마에 가볍게 땀이 맺혔고 느껴지는 따뜻함이 자신의 열기인지 공주의 손길인지 구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왕실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됐지?”

공주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깨준 공주가 고마웠다.

토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죄송해요. 의도한 건 아니에요.”

공주가 웃었다.

“왜 의도한 게 아니야? 관심을 받으면 좋은 거 아니니?”

토르는 좌절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답답했다. 늘 바보 같은 말만 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게 속상했다.

“아무튼, 여기는 너무 답답하고 지루해.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면 참 좋아. 아버지께서도 널 꽤 흡족해하셔. 리스도 그렇고.”

“음……감사해요.”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질책했고 죽을 것만 같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얘길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공주님께서는……”

토르는 머리를 쥐어짜며 적당한 말을 생각했다.

“……왕궁이 좋으세요?”

공주가 몸을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내가 과연 이곳을 좋아할까? 어쨌든 좋아해야지. 여기가 내 집인걸!”

공주는 다시 한번 웃었고 토르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위기를 다 망치고 있는 것만 같아 스스로를 자책했다. 토르는 여자들과 어울려 본 적이 없었고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경험도 없었다. 그저 공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는 소년이었다. 공주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고향이 어디냐고? 공주의 고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공주가 왜 자기를 불러냈는지 궁금했다. 단지 놀이상대인 것일까?

“왜 저를 좋아하세요?”

순간 공주가 고개를 돌려 토르와 눈을 맞췄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너 주제넘구나.”

공주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누가 그래?”

공주는 활짝 웃고 있었다. 토르가 무슨 말을 하건 공주는 확실히 재미있어 했다.

토르는 화를 자초한 것 같았다.

“죄송해요.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궁금했어요. 그러니깐……음……공주님이 절 안 좋아하시는 거 알아요.”

공주가 더욱 크게 웃었다.

“너 정말 재미있구나, 이건 인정해야겠다. 너 한번도 여자친구 사귄 적 없지, 맞아?”

토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피했다.

“누나나 여동생도 없지?”

토르는 다시 끄덕였다.

“형만 셋이에요.”

불쑥 대답이 튀어나왔다. 드디어 대화의 흐름에 걸맞은 평범한 대답을 했다.

“그래? 형들은 어디 있어? 고향에 있어?”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기 있어요. 부대에요, 저와 같이.”

“음, 그럼 좀 편하겠네.”

토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형들은 절 싫어해요. 부대에서도 나가길 바래요.”

처음으로 공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왜 널 싫어하는 거니? 네 친 형제들이니?”

토르는 어깨를 들썩였다.

“저도 알고 싶어요.”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걸었다. 혹시라도 즐거운 분위기를 다 망쳐버린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걱정 마세요, 전 신경 안 써요. 늘 그렇게 살았는걸요. 반대로 여기선 정말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어요. 제 생에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에요.”

“내 동생? 리스?”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스는 좋은 아이야. 어떤 면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제지. 내겐 형제가 네 명 있어, 너도 알다시피. 세 명은 친형제고, 한 명은 아니야. 첫째 오빠와는 아버지만 같고 어머니는 달라. 반쪽 형제지. 캔드릭 오빠, 너도 알지?”

토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 큰 빚을 졌어요. 제가 부대원이 된 건 다 그분 덕이죠. 참 멋진 분이세요.”

“맞아. 왕국에서 가장 멋진 남자 중 하나야. 나는 캔드릭 오빠를 친형제나 다름없이 좋아해. 그리고 또 리스도 그만큼 좋아. 나머지 오빠 두 명은……글세……너도 가족이 어떤지 알잖아. 모두 다 친하지는 않아. 가끔씩은 우리 형제가 어떻게 같은 부모 밑에서 나왔는지 궁금하기도 해.”

토르는 궁금해졌다. 나머지 두 형제가 누구이며 공주와 그들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지 알 고 싶어졌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것 같이 보일 까봐 걱정됐다. 공주 또한 그 부분에 있어서는 더 이상 언급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주는 분명 행복한 것을 위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사람 이었다.

조약돌이 깔린 길이 끝나자 새로운 정원이 시작됐다. 잔디는 완벽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다양한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엄청나게 큰 놀이판이 보였다. 각 방향으로 15미터는 족히 돼 보였고 토르보다 키가 큰 나무 조각들이 세워져 있었다.

공주가 즐겁게 외쳤다.

“이거 해볼까?”

“이게 뭐죠?”

공주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돌려 토르를 바라봤다.

“랙 게임 한번도 안 해봤니?”

창피해진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시골 촌뜨기도 이런 촌뜨기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제일 재미있는 게임이야!”

한껏 신이 난 공주가 대답했다.

공주는 두 팔을 뻗어 토르를 끌고 게임 장 안으로 이끌었다. 공주는 내내 즐거워했고 토르는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자제할 수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이 게임장도 아닌, 이 아름다운 공간도 아닌, 공주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감촉 덕에 전율이 흘렀다. 누군가가 자신을 원한다는 느낌이 좋았다. 공주가 토르와 게임을 하고 싶어했다. 공주가 토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왜 토르 같은 소년에게 관심을 주는 것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공주가? 혹시 여전히 꿈속을 걷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할 뿐이었다.

“그쪽에 서있어, 그 조각 뒤에. 이제 그 조각을 10초 안에 옮겨야 해.”

“옮기다니요?”

“어디로 옮길지 결정해, 서둘러!”

커다란 나무 조각을 드는 순간 엄청난 무게에 깜작 놀랐다. 나무 조각을 들어 몇 걸음 옮긴 뒤 아무 대나 보이는 대로 사각형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공주가 조각 하나를 들어 토르의 나무 조각을 밀어냈다. 토르의 자리에 공주의 조각이 놓였고 토르의 조각은 옆으로 넘어졌다.

공주가 즐거워하며 소리쳤다.

“수를 잘못 계산했어! 내 땅에 말을 세웠잖아! 네가 졌어!”

영문을 모르는 토르는 땅 위에 놓인 두 개의 조각을 바라봤다. 무슨 게임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공주가 웃으며 다가와 토르의 팔짱을 끼고 산책로로 이끌었다.

“걱정 마, 나중에 가르쳐줄게.”

‘공주님께서 내게 가르쳐주신다니.’ 듣는 순간 토르의 심장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공주는 토르를 다시 보고 싶어 했다. 토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길 원했다. 설마 토르가 여전히 꿈을 꾸는 것인가?

“말해봐, 여기 어떤 거 같니?”

공주는 토르를 또 다른 미로로 안내했다. 미로는 키가 2미터가 훌쩍 넘는 갖가지 꽃들로 장식됐다. 꽃잎들 위로 낯선 곤충들이 배회했다.

“제가 본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에요,”

토르는 진심을 얘기했다.

“근데 왜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되고 싶어 한 거니?”

“늘 제가 꿈꿔왔던 일이에요.”

“그렇지만 왜? 폐하께 충성을 바치고 싶어서?”

토르는 생각에 잠겼다. 한번도 자신의 꿈에 이유를 찾은 적이 없었다. 그냥 그것만이 토르가 원했던 것이었다.

“네, 폐하께 충성하려고요. 링 대륙에도요.”

“그렇지만 네 인생은? 가족을 꾸리고 싶지 않니? 땅은? 부인은?”

공주는 걸음을 멈춰 토르를 바라봤고 덕분에 토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진맥진했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기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토르를 바라보는 공주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어……저는……. 잘 모르겠어요.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걸요.”

“그럼 네 어머니께서는 뭐라고 하셨는데?”

공주의 말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순간 토르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이 생기를 잃었다.

“전 어머니가 없어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토르는 공주에게 모든 것을 말하려 했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 얘기를 처음으로 나눈 사람이 공주가 된다. 이상하게도 공주에게는 말하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걸 다 애기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고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심어둔 감정까지 공주가 알아주길 바랬다.

이제 막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뗀 순간, 어디선가 엄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웬돌린!”

날카로운 부름이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왕비가 있었다. 아름답게 차려 입은 왕비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공주에게 다가갔다. 왕비의 얼굴이 창백했다.

왕비는 공주의 팔을 세게 움켜잡고 왕비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당장 궁전으로 들어가. 내가 한말 잊었니? 저 아이와 다신 말하지 않길 바란다. 알겠니?”

공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놔주세요!”

공주가 왕비에게 애원했으나 소용 없었다. 왕비는 멈추지 않고 공주를 끌고 갔고 왕비의 시녀들도 공주에게 달라붙어 공주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놔달라고요!”

공주가 소리쳤다. 공주는 고개를 돌려 토르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서 필사적이고 슬픈 애원이 느껴졌다.

토르도 같은 심경이었기에 공주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공주를 부르고 싶었다. 끌려가는 공주를 바라보는 내내 가슴이 무너졌다. 눈 앞에서 자신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공주가 사라진 뒤에도 토르는 그 자리에 옴짝달싹 않고 서있었다. 공주가 떠난 곳을 주시하며 숨도 쉬지 않았다.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공주와의 일을 마음속에 평생토록 간직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공주를 다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

다시 궁궐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공주와의 만남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주변의 다른 풍경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공주에 대한 생각으로 넋이 나가 있었다. 토르는 공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공주는 토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예쁘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재미있는 소녀임이 분명했다. 다시 공주를 만나야만 했다. 공주가 곁에 없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웠다. 공주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이제서야 겨우 공주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어느새 공주가 없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공주를 끌고 가던 왕비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공주와 토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강력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어떠한 연유에선지 토르와 공주가 함께하는 걸 방해하는 세력이 건실히 존재했다.

그 원인을 찾으려고 고민하던 찰라, 갑자기 가슴에 뻣뻣한 손길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토르의 앞을 막았다.

앞을 보니 토르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소년이 서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몸에 토르는 구경도 못해본 값비싼 옷을 걸치고 있었다. 왕족을 상징하는 보라색과 초록색, 진홍색이 어우러진 비단옷이었다. 머리에는 우아한 깃털이 장식된 모자를 쓰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토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티가 흘렀다. 편하고 사치스럽게 살아온 삶이 버릇없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고생이라곤 모른다는 부드러운 손으로 토르를 막아 서서 하늘 높이 눈썹을 치켜 뜨고 경멸하듯 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날 알톤이라고 불러. 내 아버지가 바로 폐하의 사촌이신 알톤 경이셔. 700년 동안 내려온 귀족 가문이야. 그 말인즉슨, 내가 바로 공작이라는 거지. 반대로 넌 평민이고.”

알톤은 멋대로 말을 내뱉었다.

“왕실 정원은 왕족만을 위한 곳이야. 적어도 그에 버금가는 지휘를 갖은 사람들이나. 너 같은 부류가 오는 곳이 아니야.”

도대체 이 소년이 누군지, 왜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지 토르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게 원하는 게 뭐죠?”

알톤은 토르를 얕보며 낄낄거렸다.

“역시, 네가 뭘 알겠어. 아마도 넌 아무것도 모를 거야. 안 그래? 감히 네가 뭔데 여길 멋대로 들어와서 왕족인척 하는 거야!”

“왕족인척 한적 없어요.”

“아무튼, 네가 왕궁에 얼마나 큰 돌풍일 일으켰는지는 관심 없어. 네가 혼자 꿈에 부풀기 전에 미리 경고하나 하겠는데, 그웬돌린 공주는 내 꺼야.”

놀란 토르는 알톤을 바라봤다. ‘내 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결혼하기로 정해졌어.”

알톤이 계속 설명했다.

“우리는 동갑에다가 신분도 동등해. 벌써 우리 결혼은 이미 진행 중이야. 그러니까 공주를 넘보기만 해봐. 일초라도 꿈도 꾸지마. 변하는 건 없으니까.”

마치 강풍에 맞아 쓰러진 기분이었다. 뭐라 대꾸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난 공주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도 이해해주고 있어. 공주는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아. 때때로 공주는 평민들이나 시중들에게 인정을 베풀지. 그저 가벼운 친구로 만나주는 거야. 재미 삼아. 혹시 너도 공주의 친절을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지만 딱 거기 까지야. 너는 그저 공주의 새로운 놀이대상이야. 또 다른 오락거리. 마치 인형 수집하듯 모으는 거야. 공주는 그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면 흥미를 갖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 지나면 지겨워해. 금새 싫증 내거든. 넌 공주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어. 더군다나 올해 말이 되면 공주는 내 아내가 되어 있을 거야. 영원히.”

치열한 의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알톤을 눈을 크게 부릅떴다.

알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토르의 가슴에 박혔다. 사실일까? 토르는 정말 공주에게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일까? 혼란스러웠다. 무얼 믿어야 할지 괴로웠다. 공주는 진실해 보였다. 어쩜 이건 모두 토르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걸까?

“거짓말이야.”

토르가 결국 되받아 쳤다.

알톤이 비웃었다. 그는 곱디고운 손가락 하나를 올려 토르의 가슴을 찔렀다.

“만약 여기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게 다시 한번 내 눈에 띈다면 내 권한으로 왕실 병사를 부를 거야. 그럼 넌 수감될 거야!”

“뭘 근거로요?!”

“내겐 근거 따윈 필요 없어. 내 신분이면 충분해. 죄명이야 하나 지어내면 되고. 내가 말하면 모두들 믿을 거야. 내 모략에 왕국 절반은 모두 너를 죄인으로 여길 거야.”

알톤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역겨웠다.

“명예롭지 못하군요.”

토르는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알톤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알톤은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웃어댔다.

“난 명예 따윈 안 키워. 명예는 바보들이나 중요시하지. 난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돼. 너나 명예에 목숨 걸어. 그리고 그웬돌린 공주는 내 차지가 될 거야.”

제 20장

토르는 리스왕자와 함께 성문 밖으로 나가 왕의 부대 막사로 향하는 시골길을 따라 걸어갔다. 토르와 왕자가 성문을 지나가자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차려 자세로 예의를 갖췄다. 토르는 드디어 소속감을 맛봤다. 더 이상 외부인이라는 생각이 사라졌다. 며칠 전만 해도 토르의 진입을 막기 위해 경비병들이 원형경기장 안으로 토르를 쫓았다. 불과 며칠 만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에스토펠레스가 하늘 위에서 원을 그리며 토르를 내려다봤다. 매가 하강했고 토르는 기쁜 마음으로 매를 손목에 앉혔다. 다행히 아직까지도 철로 만든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매는 다시 하늘 위로 아주 높이 날아올랐지만 여전히 토르의 시야에서 머물렀다.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매는 신비한 동물임이 분명했다. 뭐라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토르는 분명 에스토펠레스와 끈끈한 교감을 나눴다.

토르와 리스 왕자는 말없이 막사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부대원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과연 토르를 어떻게 맞이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질투와 시기심을 드러낼 것인가? 토르에게 집중된 관심에 화가 나 있을 것인가? 캐니언 협곡에서 실신해 실려 나온 일로 토르를 놀려댈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만에 하나라도 토르를 인정해줄 것인가?

가장 후자 이길 바랄 뿐이었다. 부대원들과 겨루는 데 너무 지쳐있었고 이제는 정말로 부대원으로 인정받길 간절히 바랬다. 토르도 그들과 똑 같은 부대원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저 멀리서 조그맣게 막사가 보였다. 그러나 토르의 마음속은 다른 걱정거리로 꽉 차버렸다.

그웬돌린 공주.

공주가 리스 왕자의 누나라는 사실 때문에 왕자에게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망설여졌다. 그렇지만 공주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토르를 협박한 알톤 공작과 만난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가 한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괜히 왕자에게 공주의 이야기를 늘어놔 왕자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행여 친구관계까지 망치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알톤 공작은 어떤 분이죠?”

결국 토르는 질문을 던졌다. 불안했다.

“알톤? 알톤 얘기는 왜 묻는 거야?”

토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를 들썩였다.

다행히도 리스 왕자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톤은 위협적이야. 왕족답지 않지. 폐하의 세 번째 조카야. 근데 왜? 알톤이 네게 무슨 짓이라도 했어?”

리스 왕자가 실눈을 떴다.

“그웬돌린 누나랑 관련된 일이야? 진작에 너한테 말해줬어야 했는데.”

더욱 궁금해진 토르는 왕자와 시선을 맞췄다.

“무슨 말씀이시죠?”

“알톤은 망나니야. 기저귀 뗄 때부터 우리 누나를 쫓아다녔어. 우리 누나랑 자기가 결혼할거라고 확신한다니까. 어머니께서 허락 하실 거 같긴 하지만.”

“그럼 결혼하나요?”

초조한 목소리가 튀어나와 오히려 질문한 토르가 놀랐다.

토르를 바라보는 리스 왕자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런, 이런, 너 우리 누나한테 빠졌구나, 그렇지? 너무 빠르잖아.”

티가 나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뭐 결국엔 누나의 마음에 따라 결정되겠지. 만에 하나라도 공작과 어머니께서 억지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면. 그렇지만 폐하께서는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으실 거야.”

“공주는 알톤 공작을 어떻게 생각하죠?”

너무 꼬치꼬치 묻는 듯 보이긴 싫었지만 꼭 알아야겠기에 왕자를 재촉했다.

왕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직접 물어봐야 할거야. 누나와 한번도 그런 얘기 해본 적 없어.”

“혹시라도 폐하께서 공주님을 억지로 결혼시키실 수도 있나요? 폐하께서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 건가요?”

“폐하께서는 원하는 건 뭐든지 하실 수 있어. 그렇지만 그건 그웬 누나와 알톤이 결정할 일이야.”

왕자는 토르를 바라봤다.

“이 모든걸 왜 물어본 거야? 누나하고 무슨 얘길 나눴어?”

토르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뭐라 답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다.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왕자는 웃음이 터졌다.

“정말 엄청나게 아무것도 아닌 거 같네!”

왕자의 웃음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토르는 더욱 난감했고 혹시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게 모두 다 망상이 아니었나 생각해봤다. 왕자가 다가와 토르의 어깨게 손을 올렸다.

“잘 들어, 친구. 네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한가지는 바로 그웬 누나는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아주 잘 안다는 거야. 그리고 누나는 자기가 원하는 건 꼭 얻어내지. 늘 그래왔어. 누나는 폐하만큼이나 의지가 강해. 그 누구도 누나가 원하지 않는 걸 하게 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게 강요할 수 없어. 만약 누나가 널 선택한다면, 날 믿어. 누나는 꼭 네게 얘기할거야. 알겠지?”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렇듯이 리스왕자와 얘기를 나누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눈 앞을 내다보니 저 멀리 왕의 부대 막사의 커다란 출입문이 보였다. 놀랍게도 일부 부대원들이 출입문 앞에 모여 토르와 리스 왕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토르의 모습이 멀리서 확인되자 부대원들이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환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토르 앞으로 달려와 토르의 어깨를 잡고 팔을 걸쳐 막사 안으로 토르를 데리고 들어갔다.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면서도 부대원들의 호의적인 태도에 토르는 기분이 우쭐해졌다.

“캐니언 협곡 얘기 좀 해봐. 그 반대쪽은 어떤 곳이야?”

“그 괴물은 어떻게 생겼어? 네가 죽인 괴물 맞지?”

“내가 죽이지 않았어, 에레크 명장님께서 하신 거야.”

“네가 엘덴을 구했다며.”

“네가 그 괴물을 정면으로 공격했다던데.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말이야.”

“너도 이젠 우리와 다름없어!”

한 부대원이 소리쳤고 질문 세례를 쏟아내던 나머지 부대원들도 마치 오래 전에 잃어버린 형제를 대하듯 토르를 이끌며 환호했다.

믿기 힘든 순간이었다. 부대원들의 질문을 듣고 있자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그제서야 알았다. 어찌됐든 토르는 이들 앞에서 용맹을 떨친 셈이었다. 토르 자신도 차마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토르는 아주 오랜만에 스스로를 뿌듯하게 생각했다. 더불어 부대원들과 똑같이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 동안 토르의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감이 한 순간에 날아갔다.

부대원들은 토르를 주요 훈련장으로 이끌었다. 토르의 눈앞에 수십 명의 부대원들과 수십 명의 실버 대원들이 서 있었다. 그들 또한 토르의 등장에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가 토르에게 달려와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콜크 사령관이 토르 앞으로 나서자 한 순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늘 토르에게 적대적인 사령관이 보이자 토르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토르를 바라보는 사령관은 그 동안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록 토르에게 미소를 지어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인상을 쓰고 있지도 않았다. 토르는 사령관의 눈빛에서 토르를 인정하는 마음을 읽었다.

가까이 다가온 사령관은 검은 매 모양의 작은 배지를 높이 들어 보인 뒤 토르의 가슴에 달아줬다.

왕의 부대를 상징하는 배지였다. 토르가 부대원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드디어, 토르도 여기 모인 소년들과 똑 같은 부대원이 됐다.

“서부 왕국의 남부 주 출신 토르그린, 왕의 부대 부대원이 된 걸 환영한다.”

부대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토르에게 모여들었다. 토르에게 팔을 두르고 이리 저리 토르를 흔들어댔다.

토르는 차마 이 순간을 받아들이기가 벅찼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했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기면 그 뿐이었다. 드디어 토르도 소속감이란 걸 맛봤다.

콜크 사령관이 몸을 돌려 다른 부대원들을 바라봤다.

“알겠다, 부대원들, 이제 집중해라.”

사령관이 명령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땅 고르기, 무기손질, 말똥 치우기 업무는 배제하겠다. 이제 진정한 훈련에 임할 시간이다. 오늘은 무기를 연마하는 날이다.”

부대원들은 흥분의 환호성을 내지른 뒤 훈련장을 뛰어가는 사령관을 뒤쫓아 뛰었다. 사령관은 청동 문이 빛나는 참나무로 된 원형 건물로 향했다. 가까이에 있던 부대원들과 함께 토르도 그 쪽으로 향했다. 모두들 들떠있었다. 토르의 옆에는 리스 왕자가 걷고 있었고 오코너도 옆으로 달려와 함께했다.

“두 번 다시는 네가 살아있는걸 못 볼 줄 알았어. 다음에는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 너처럼 도우러 갈 거야. 그렇게 하게 해줄 거지?”

오코너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토르의 어깨를 살짝 쳤다.

토르도 오코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 건물은 뭐죠?”

건물에 가까이 다가가자 궁금해진 토르가 왕자에게 질문했다. 문에는 거대한 철 못이 여기저기 박혀있었고 건물 자체의 생김새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무기 창고야, 왕의 부대의 모든 무기들이 여기에 보관돼. 가끔씩 부대원들의 출입이 허락되고 이곳에 있는 무기로 훈련도 하게 해주지. 어떤 훈련을 시키느냐에 따라 달라져.”

엘덴이 토르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토르는 잔뜩 긴장했다. 토르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엘덴의 위협에 대비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엘덴은 토르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고맙다고 말해야겠어. 내 목숨을 구해줬잖아.”

고개를 푹 숙인 엘덴의 태도가 겸손했다.

난처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토르의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내가 널 잘못 본거 같아, 친구할래?”

엘덴이 손을 내밀었다.

원한과는 거리가 먼 토르가 기꺼이 손을 내밀어 새 친구를 반겼다.

“그래, 친구하자.”

“난 매우 진지해. 난 언제든 네게 되갚아 줄 거야. 네게 하나 빚졌어.”

엘덴은 뒤를 돌아 다른 부대원들 사이로 급히 사라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빨리 모든 게 바뀌어 버린 게 즐거운 뿐이었다.

“아주 형편없는 녀석은 아니었네, 앞으로는 네게 잘 할거야.”

오코너가 말을 걸었다.

토르와 부대원들은 무기 창고에 도착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절로 감탄이 나왔다. 토르는 천천히 걸어 들어가 목을 쭉 빼고 무기 창고 안을 유심히 둘러봤다. 수백만 개의 무기가 벽에 진열돼 있었고 개중에는 처음 보는 것들도 꽤 많았다. 다른 부대원들도 들뜬 걸음으로 서둘러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들 마음에 드는 무기 앞에 달려가 직접 들어보고 자세히 살펴봤다. 토르도 이들과 같이 행동했다. 사탕가게에 온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토르는 서둘러 미늘 창 앞으로 갔다. 두 손으로 나무 손잡이를 들어 무게를 가늠했다. 부피가 꽤 컸고 기름칠이 잘 돼 있었다. 도끼의 날이 헤져 있었고 자잘한 금도 보였다. 이 무기가 과연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였는지 궁금했다.

미늘 창을 내려놓고 도리깨를 들어봤다. 못이 잔뜩 박힌 동그란 쇳덩어리가 작은 막대기에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토르는 나무 손잡이를 쥐고 쇠사슬에 연결된 쇳덩어리가 빙빙 돌아가는 느낌을 손으로 익혔다. 토르 옆에는 리스 왕자가 전쟁용 도끼를 쥐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오코너가 긴 창을 이리저리 시험하며 가상의 적을 향해 공중에 창을 찌르고 있었다.

“잘 들어라!”

콜크 사령관이 외쳤고 모든 부대원이 그에게 집중했다.

“오늘은 적군과 거리를 두고 싸우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면 되겠는지 말해볼 사람 있는가? 10미터 멀리에 떨어진 적군을 죽이려면 무슨 무기를 사용해야 하는가?”

“활과 화살이요.”

부대원 한 명이 외쳤다.

“그래. 또 무엇이 있나?”

“창!”

다른 누군가가 소리쳤다.

“또 무엇이 있나?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더욱 많다. 말해봐라.”

“새총.”

토르가 대답했다.

“또 무엇이 있나?”

토르는 머리를 쥐어짜봤지만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었다.

“수리 검.”

리스왕자가 대답했다.

“또 무엇이 있는가?”

부대원들이 더 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생각나는 무기가 없었다.

“던지는 망치가 있다. 던지는 도끼도 있지. 석궁도 있고 창도 던질 수 있다. 검도 마찬가지로 던질 수 있지.”

사령관이 설명했다.

사령관은 부대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기 창고 안을 걸었다. 부대원들은 사령관의 한마디 한마디에 몰입했다.

“그 외에도 더 있다. 땅 위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유용하지. 소처럼 큰 전쟁영웅이 술책이 뛰어난 적군이 던진 돌에 맞아 즉사한 걸 내 두 눈으로 목격한 경우도 있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병사들은 갑옷 또한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갑옷용 장갑을 벗어 적군의 얼굴에 던질 수도 있지. 그렇게 하면 적군이 놀라 뒤로 주춤거릴 거다. 그 사이에 적군을 죽이면 된다. 방패 또한 던질 수 있다.”

사령관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단지 상대와 너희들의 거리만을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상대와 싸우면서도 훨씬 더 먼 거리까지 너희들의 공격반경을 넓혀야 한다. 보통의 병사라면 싸울 때 상대와의 간격을 세 걸음 정도로 유지하지만 훌륭한 전사라면 삼십 걸음을 상대와의 사이에 두고 싸울 줄 안다. 알아듣겠나?”

“네 알겠습니다!”

부대원들이 동시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좋다. 오늘은 너희들의 던지기 능력을 집중 훈련할 것이다. 무기 창고를 둘러보고 던질 수 있는 무기를 집어라. 각자 무기를 하나씩 들고 30초 안에 밖으로 집합한다. 실시하라!”

순식간에 무기 창고에서는 쟁탈전이 일어났다. 토르도 벽면으로 달려가 집을만한 무기를 살폈다. 토르 만큼 흥분한 부대원들이 서로 부대꼈고 토르도 그 속에서 이리저리 부딪혔다. 순간 알맞은 무기가 눈에 들어와 얼른 집었다. 던지는 용도로 만들어진 작은 도끼였다. 오코너는 단검을 골랐고 리스 왕자는 검을 집었다. 세 사람은 나머지 부대원들과 같이 연습장으로 나갔다.

부대원들은 콜크 사령관을 따라 반대쪽 경기장까지 뛰어갔고 그곳에는 말뚝 위에 박힌 12개의 방패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모든 부대원들이 무기를 하나씩 들고 기대에 가득 찬 모습으로 사령관 주위에 몰려들었다.

“너희들은 이곳에 선다.”

사령관이 바닥에 그어진 줄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제 너희들이 가진 무기를 던져 저 방패들을 맞춰라. 그리고 나서 방패로 달려가 방패에 꽂힌 무기를 하나 빼서 또다시 던져라. 절대로 한번 던져본 무기를 다시 던지면 안 된다. 너희들의 목표물은 저 방패들이다. 방패를 맞추지 못한 부대원들은 연습장을 한 바퀴 돈 뒤 다시 연습한다. 시작하라!”

부대원들은 바닥에 그어진 줄 밖으로 어깨를 맞대고 서서, 저 멀리 뒤 30미터는 족히 떨어져 있는 방패를 향해 들고 있던 무기를 던졌다. 토르도 줄에 맞춰 섰다. 토르 옆 부대원은 뒤로 몸을 젖혀 창을 던졌지만 안타깝게 방패를 빗나갔다.

그 부대원을 자리를 옮겨 경기장을 돌기 시작했고, 때마침 실버 대원이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위로 쇠사슬 갑옷을 걸쳐 무게를 더했다.

“이걸 입고 달려라!”

실버 대원이 명령했다.

부대원은 어깨위로 중압감을 견디며 이미 땀을 삐질삐질 흘렸고 더위 속에서 연습장을 뛰었다.

토르는 방패를 명중하길 바랬다. 몸을 뒤로 젖히고 집중을 한 뒤 도끼를 뒤로 가져가 힘차게 던졌다. 눈을 질끈 감고 명중을 기도했다. 가죽 방패에 도끼가 박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안도했다. 확인해보니 방패 하단에 도끼가 간신히 박혀있었다. 그래도 방패를 맞혔다.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연습장을 돌아야 했다. 방패를 맞힌 일부 부대원들만이 방패로 달려가 무기를 바꿔 들었다.

토르도 방패로 달려가 칼날이 길고 얇은 단검을 뽑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이나 훈련은 계속됐다. 던질 때마다 팔에 엄청난 통증이 전해졌고 방패를 빗 맞춰 몇 번이나 연습장을 돌았다. 땀이 비 오듯 계속 흘러나왔다. 다른 부대원들도 토르와 마찬가지였다. 허나 꽤 흥미진진한 훈련이긴 했다. 모든 무기들을 한번씩 던져볼 수 있었고 던지면서 각 무기들의 사용 감과 다양한 손잡이와 날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었다. 훈련이 계속 될수록 실력이 확실히 향상됐다.

그렇지만 여전히 무더위가 압박했고 체력도 바닥나고 있었다. 줄 뒤로는 겨우 열두 명 정도의 부대원만이 훈련에 임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연습장을 뛰고 있었다. 너무 많은 던지기 횟수와 계속해서 바뀌는 무기들로 인해 쉽지 않은 훈련이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열기 속에 연습장을 뛰느라 점점 정확도가 떨어졌다. 토르는 헐떡거렸다. 얼마나 더 훈련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하던 찰라 콜크 사령관이 앞으로 나섰다.

“그만하라!”

운동장을 뛰던 부대원들이 돌아와 잔디 위에 쓰러졌다. 그대로 누워 헐떡거리며 호흡을 가다듬고 쓰고 있던 무거운 쇠사슬 갑옷을 벗어버렸다. 토르도 잔디 위에 앉아 팔을 쭉 늘어뜨린 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일부 실버 대원들이 물이 담긴 들통을 몇 개 들고 와 잔디 위에 내려놨다. 리스 왕자가 손을 뻗어 들통 하나를 집어 물을 마신 뒤 오코너에게 건넸다. 오코너도 물을 마신 뒤 토르에게 들통을 건네줬다. 토르도 턱과 가슴으로 물줄기를 흘리며 정신 없이 물을 마셨다. 물맛이 최고였다. 가쁜 숨을 쉬며 들통을 다시 리스왕자에게 건네줬다.

“훈련이 얼마나 더 계속될까요?”

토르가 물었다.

왕자는 거친 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분명 우릴 죽이려는 거야.”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엘덴이었다. 엘덴이 가까이 다가와 토르 옆에 앉았다. 의아했다. 그렇지만 친구가 되길 원하는 엘덴의 진심이 느껴졌다. 엘덴의 바뀐 태도가 당황스럽긴 했다.

“부대원들!”

사령관이 부대원들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오후가 되면서부터 너희들 중 다수가 목표물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체력이 떨어지면 정확도가 떨어진다. 바로 그게 쟁점이다. 전쟁 중에 너희들은 늘 지쳐있을 것이다. 체력이 고갈된다. 어떤 전쟁은 몇 날 며칠이 이어진다. 특히 성을 공격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너희들이 가장 지쳤을 때가 바로 가장 정확한 조준이 요구될 때라는 걸 잊지 말아라. 너희들은 주로 주변에 있는 무기들을 던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모두 다 각종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하며 이는 너희들의 체력 여부와 상관없이 이뤄져야 한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부대원들이 목청껏 대답했다.

“너희들 중에 칼을 잘 던지는 부대원이 있다. 대신 그 부대원은 망치나 도끼 등은 익숙하게 다루질 못한다. 그렇게 하나의 무기만 던질 줄 안다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나?”

“아닙니다!”

“이게 단순한 놀이라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사령관은 인상을 쓰며 주변을 돌았고 자세가 흐트러진 부대원들을 발로 찼다.

“너희들은 충분히 쉬었다. 다시 기립하라!”

부대원들과 같이 토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얼마나 더 훈련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됐다.

“장거리 싸움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너희들은 무기를 던진다. 반대로 적군들도 너희에게 무기를 던질 수 있다. 30걸음 밖의 적군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지만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30걸음 밖에서도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날아오는 물건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선 공격을 인식하고 빠르게 움직여 낮게 걷거나, 구르거나, 재빨리 피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커다란 방패로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숙지해야 한다.

사령관이 신호를 주자 실버 대원이 커다랗고 무거운 방패를 가져왔다.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토르의 두 배는 돼 보였다.

“지원자 없나?”

사령관이 물었다.

망설임이 역력한 가운데 부대원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재고의 여지도 없이 토르가 손을 들었다.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고 토르가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좋아.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자원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 있군. 네 기상이 마음에 든다. 바보 같은 결정이긴 하지만 아무 좋다.”

사령관은 토르에게 커다란 금속 방패를 건네 주었고 토르는 정말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토르는 방패를 한쪽 팔에 고정시켰다. 엄청난 무게에 안간힘을 써야 간신히 방패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토르, 네 임무는 이쪽 끝에서 반대편 연습장까지 뛰어가는 거야. 다치지 않고. 저기 50명의 부대원들이 보이지? 저 부대원들 모두가 네게 무기를 던질 거다. 진짜 무기를 사용할거야. 알아듣겠나? 만약 네가 방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저 끝에 가기도 전에 죽을 거야.”

믿을 수 없는 임무에 토르는 사령관을 쳐다봤다. 부대원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매우 심각한 거야. 전쟁은 심각하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지. 정말로 자원하고 싶나?”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겁이나 다른 할말이 없었다. 이제 와서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많은 부대원들 앞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좋아.”

사령관이 신호를 보내자 누군가가 앞으로 나와 경적을 울렸다.

“달려라!”

사령관이 소리질렀다.

온 사력을 다해 두 손으로 무거운 방패를 들었다. 그 순간 엄청난 울림과 함께 머리위로 전율이 느껴졌다. 강철 망치가 방패를 때린 게 분명했다. 다행히 방패를 뚫진 못했지만 온 몸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토르는 방패를 거의 놓칠 뻔 했지만 가까스로 붙들고 움직였다.

방패를 겨우겨우 지탱하며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갖가지 무기들이 토르 주변으로 날아왔고 토르는 더더욱 힘을 줘 방패를 놓치지 않게 사력을 다했다. 토르의 목숨이 방패에 달려있었다. 달릴수록 어떻게 해야 방패를 놓치지 않고 몸을 잘 숨길 수 있는지 감이 왔다.

화살이 하나 날라와 아주 간소한 차이로 토르를 빗나갔다. 토르는 턱을 더 끌어당겼다. 또 다른 묵직한 무기 하나가 방패에 정통으로 맞았고 이에 토르는 뒷걸음질 치며 넘어졌다. 허나 재빨리 일어나 다시 달렸다. 죽을 힘을 다해 달렸고 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돌아와라!”

사령관이 외쳤다.

토르는 바로 방패에서 손을 뗐다.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끝까지 왔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 더 이상 방패를 들 힘도 없는 상태였다.

서둘러 부대원들에게 돌아왔다. 부대원들은 토르의 모습에 감탄했다. 토르 또한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잘했어.”

리스 왕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른 지원자 없나?”

사령관이 물었다.

부대원들은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토르를 보고 나자 그 누구도 지원할 생각이 없어졌다.

토르는 자부심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지원한 임무가 뭐였는지 미리 알았다면 지원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미 무사히 자원을 마쳤고 이에 기쁠 따름이었다.

“좋다. 그런 내가 선택하지, 거기! 세이든!”

사령관이 손가락으로 부대원 한 명을 호명했다.

삐쩍 마르고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부대원이 겁을 잔뜩 먹고 앞으로 나왔다.

“저요?”

세이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머지 부대원들은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너. 그럼 누구겠어?”

“죄송합니다, 주군, 그렇지만 저는 안 할래요.”

부대원들 사이에서 탄성이 일었다.

콜크 사령관이 인상을 잔뜩 쓰고 세이든에게 다가갔다.

“네가 원하는 대로는 못하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세이든은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쟤는 여기 있어선 안돼.”

리스 왕자가 토르에게 귓속말했다.

토르가 고개를 돌려 왕자와 시선을 맞췄다.

“무슨 말이에요?”

“명문가 자재거든, 부모님 능력으로 여기 들어온 거야. 그렇지만 세이든은 부대원이 되고 싶어하질 않아. 전사의 기질이 하나도 없어. 사령관도 그걸 잘 알고. 세이든을 낙오시키려는 거야. 부대에서 제명시키고 싶어하는 거 같아.”

“죄송합니다, 주군, 그렇지만 못해요.”

세이든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해야 한다!”

정적이 흘렀고 엄청난 긴장감이 대립됐다.

세이든은 수치심에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죄송합니다. 다른 임무를 주시면 뭐든 기꺼이 하겠습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사령관은 세이든의 코앞으로 열을 올리며 돌진했다.

“네게 다른 임무를 주마. 네가 어느 집 자식이건 난 상관없어. 이제부터 뛰어라.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연습장을 뛰어라. 이 임무에 지원하기 전엔 돌아오지마. 알겠나?”

세이든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버 대원 한 명이 세이든에게 다가가 갑옷을 입혔다. 곧 또 다른 실버 대원이 그 위로 갑옷을 하나 더 걸쳐줬다. 세이든이 과연 그 무게를 견딜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갑옷 하나만으로도 뛰기가 벅찼기 때문이다.

사령관은 몸을 쭉 피고 뒤에서 세이든을 발로 찼다. 세이든은 앞으로 절룩거렸고 천천히 연습장을 뛰기 시작했다. 세이든이 측은했다. 다리를 절뚝거리는 세이든을 보자 과연 그가 왕의 부대에서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갑자기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왕의 신하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실버 대원 열두 명도 함께였다. 긴 창을 들고 깃털이 달린 헬멧을 쓴 왕의 신하들은 부대원들 앞에서 멈췄다.

“폐하의 공주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해가 가장 긴 하지를 기념하기 위해, 폐하께서 남은 하루를 사냥일로 선언하셨다!”

토르 주변의 모든 부대원들이 큰 환호성을 질러댔다. 왕의 신하들이 돌아가자 부대원들이 신속히 말들의 뒤를 쫓아 뛰었다.

“무슨 일이죠?”

토르도 부대원들을 따라 뛰어가며 왕자에게 물어봤다.

왕자의 얼굴은 커다란 미소로 가득했다.

“횡재했어! 우리 훈련 끝났어! 이제 사냥 가는 거야!”

제 21장

토르는 사냥을 위해 나눠준 창을 받아 들고 숲 길을 뛰었다. 리스 왕자와 오코너, 엘덴이 토르 옆에서 함께 달렸고 50여명의 부대원들과 무리를 이뤘다. 이들 앞으로는 약 백여 명의 실버 대원들이 간단한 갑옷 차림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 일부 실버 대원들의 손엔 단창이 들려 있었고 그 외 대부분의 실버 대원들은 어깨위로 활과 화살을 멨다. 말을 탄 실버 대원들 옆으로 수십 명의 수행원들이 말을 타지 않고 이들과 나란히 함께 숲 속을 달렸다.

가장 선두에는 맥길 왕이 있었다. 거대한 몸짓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사냥에 한껏 부푼 듯 미소가 가득했다. 캔드릭 왕자, 개리스 왕자, 고드프리 왕자가 사냥에 동행했다. 고드프리 왕자의 참석은 예상 밖이었다. 수십 명의 견습 기사들도 함께였다. 몇 명은 등을 곧게 피고 상아로 만든 경적을 불었고, 나머지 견습 기사들은 으르렁거리며 맹목적으로 앞서간 말들을 쫓는 사냥개들의 목줄을 간신히 잡고 달렸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숲을 지나자 사냥에 나선 거대한 무리는 각자 소규모로 흩어졌다. 다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토르는 어느 무리를 따라갈 지 고민했다.

에레크 명장이 토르 가까이 말을 타고 지나갔고 토르 일행은 명장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토르는 리스 왕자 옆으로 뛰어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죠?”

뛰면서 말하느라 토르의 숨이 헐떡거렸다.

“숲 속 깊이 들어가는 거야, 실버들은 전리품으로 짐승들을 사냥해오거든.”

“왜 어떤 실버는 말을 타고 어떤 실버는 말을 안타는 거죠?”

오코너가 왕자에게 질문했다.

“말에 탄 실버들은 사슴이나 가금류 같은 사냥이 쉬운 짐승들을 잡으려는 거고, 말을 안 탄 실버들은 좀 더 위협적인 짐승을 노리는 거야. 예를 들면 노란 꼬리 멧돼지 같은 것들.”

짐승들 이야기에 흥분이 되는 한편 김장감도 느꼈다. 어린 시절 노란 꼬리 멧돼지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노란 꼬리 멧돼지는 약간의 도발에도 사정없이 달려들어 사람을 반으로 찢어놓는 험악하고 위험한 짐승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실버들은 말을 타고 사슴이나 새를 사냥하는 걸 선호하지. 반면 젊은 실버들은 두 발로 직접 위험한 짐승들을 사냥하길 원한단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그만큼 체력이 더 받쳐줘야 하겠지.”

에레크 명장이 설명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너희 부대원들의 사냥을 허락하는 이유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실버들과 함께 달리는 콜크 사령관이 소리쳤다.

“너희들에게는 훈련이나 다름없다. 사냥 내내 두 발로 뛰어 전사들의 말과 속도를 맞춰야 한다. 여기서 더 가면 너희들은 다시 좀 더 작은 무리로 흩어질 것이다. 각자의 길을 따라서 각자의 짐승을 사냥한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위협적인 짐승을 찾아 목숨을 걸고 사냥해라. 사냥에 요구되는 기질이야말로 전사에게 요구되는 소양과 다를 바가 없다. 체력과 대담함을 비롯해 적의 크기와 흉포성에 상관없이 어떤 상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자세 말이다. 지금부터 사냥 시작이다!”

토르는 좀 더 속도를 높였다. 토르의 일행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앞선 말들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힘차게 달렸다. 무리들이 분리되어 각각 흩어졌고 토르는 또다시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리스 왕자와 오코너와 함께 간다면 어디든지 괜찮다고 생각했다.

“화살을 줘, 빨리!”

에레크 명장이 급하게 외쳤다.

토르는 재빨리 행동에 옮겼다. 말 옆으로 달려가 안장에 달린 화살 통에서 뺀 화살을 명장에게 건넸다. 명장을 화살을 활에 끼우고 속도를 늦추며 침착하게 숲 속으로 활을 당겼다.

“사냥개!”

명장이 소리쳤다.

견습 기사 하나가 짖어대는 사냥개를 풀어줬다. 숲 속으로 달려들어간 사냥개는 놀랍게도 커다란 새 한 마리를 물고 나왔다. 에레크 명장은 전리품을 확인하자 화살을 내려놨다.

명장의 화살은 완벽히 새의 목을 관통해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 흠잡을 데 없는 명중이었다. 명장이 어떻게 숲 속의 새를 발견했는지 경이로울 뿐이었다.

“새!”

에레크 명장이 외쳤다.

토르는 뛰어가 죽은 새를 집어 올렸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고 목에서는 피가 흘렀다. 재빨리 돌아가 명장에게 새를 건넸고 명장은 새를 받아 안장에 걸쳤다.

주변 실버들이 사냥하는 모습도 명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새를 겨눠 활을 쏘면 그들의 후견부대원들이 죽은 새를 회수했다. 대부분 활을 사용했고 일부 실버들은 창을 던졌다. 캔드릭 왕자는 창을 꺼내 목표한 사슴을 명중시켰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고 정확히 목에 창이 관통해 사슴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숲에서 이토록 다양한 짐승을 잡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며칠 동안 왕궁 식구들을 모두 먹여 살리고도 남을만한 양이었다.

“전에도 사냥 해 보신적 있어요?”

토르는 달리는 말을 피해 리스 왕자 쪽으로 거리를 좁혔다. 사냥개들이 짖어댔고 경적이 계속 울렸다. 대원들이 소리치고 웃고 승리를 축하하는 소리에 토르의 목소리가 거의 묻혔다.

계속되는 달리기에도 리스 왕자의 얼굴에선 큼지막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많이 해봤지! 그렇지만 이전까진 다 폐하 덕에 특별히 허락된 거였어. 특정 나이가 돼야만 사냥에 참가할 수 있거든. 정말 스릴 넘치는 일이야. 비록 모두 다 무사히 사냥을 끝내는 건 아니지만. 멧돼지를 사냥하다 적어도 한 명 이상 목숨을 잃거든.”

달리며 대답하느라 왕자는 숨을 헐떡거렸다.

“난 항상 말을 타고 사냥했었어. 이렇게 부대원과 함께 두 발로 뛰며 사냥하는 건 처음이야. 또 멧돼지 사냥도 그렇고. 모두 다 처음이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숲이 바뀌었다. 수십 개의 갈림길이 펼쳐졌고 그 갈림길은 또다시 여러 개의 갈림길로 나뉘었다. 경적이 울렸고 커다란 무리는 다시 한번 소규모로 나뉘었다.

토르는 에레크 명장을 따라갔고 리스 왕자와 오코너도 토르와 함께 뛰었다. 이들은 급격하게 꺾이고 경사진 좁은 길을 택했다. 뛰고 또 뛰었다. 토르는 손에 창을 꼭 쥐고 작은 시냇가를 건넜다. 에레크 명장과 캔드릭 왕자가 말을 타고 달렸고 그들 곁으로 토르, 리스왕자, 오코너, 엘덴이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토르는 뒤를 돌아봤다. 부대원 두 명이 멀리서 쫓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체격이 크고 넓었다. 거친 곱슬머리가 눈까지 내려왔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일란성 쌍둥이에 토르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다.

“난 콘발이야.”

쌍둥이 중 한 명이 토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난 콘벤.”

“우린 형제야.”

콘발이 설명했다.

“쌍둥이야!”

콘벤이 덧붙였다.

“우리가 같이 가도 괜찮을까?”

콘발이 물었다.

부대 먼 발치에서 이들을 본 기억은 있었으나 한번도 가까이서 마주친 적은 없었다. 새로운 부대원들과 안면을 튼 토르는 기뻤다. 더군다나 이들은 처음부터 토르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럼 물론 좋지.”

“사람이 많을수록 더 좋지.”

리스 왕자가 덧붙였다.

“이 숲에 사는 멧돼지들은 굉장히 크다던데.”

콘발이 말했다.

“그리고 치명적이래.”

콘벤이 덧붙였다.

토르는 쌍둥이 형제가 각각 들고 있는 긴 창을 살폈다. 토르의 창보다 세배는 길었기에 왜 긴 창을 들고 왔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오히려 쌍둥이 형제는 토르의 단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짧은 창을 가져왔는걸.”

콘발이 토르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멧돼지들은 뿔이 엄청나게 커. 그거보다 긴 게 필요할 텐데.”

콘벤이 의견을 더했다.

“내 꺼 가져.”

엘덴이 토르 가까이로 뛰면서 창을 건넸다.

“그럴 순 없지, 넌 그럼 뭐로 공격하려고?”

엘덴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괜찮을 거야.”

엘덴의 자상함에 감동이 밀려왔고 변해버린 이들의 관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 걸 하나 가져가렴.”

누군가가 지시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에레크 명장이 토르 가까이 와서 안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긴 창 두 개가 걸려있었다.

토르는 고마운 마음으로 긴 창 하나를 안장에서 빼냈다. 창이 너무 무거워 들고 뛰는 게 쉽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긴 창 덕에 마음이 좀 놓였다. 이상하게 긴 창이 꼭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달리고 달렸다. 토르는 가슴이 타오르는 것 같았고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토르는 경계를 살피며 짐승의 흔적을 찾았다. 곁에 있는 일행들과 긴 창 덕에 든든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안한 건도 사실이었다. 멧돼지 사냥은 난생 처음이었기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다.

폐가 터질 것 같은 순간 숲 속 빈 터에 이르렀고 천만다행으로 에레크 명장과 캔드릭 왕자가 말을 멈춰 세웠다. 토르도 달리기를 멈췄다. 공터에는 여 덜 명의 전사와 부대원이 가던 길을 멈추고 서 있었다. 다들 숨을 고르며 서있는 동안 에레크 명장과 캔드릭 왕자가 말에서 내렸다. 말들도 가쁜 숨을 헐떡거렸고 숨 소리 외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소리가 전부였다. 수백 명의 무리들이 각각 흩어져 숲 속을 달리는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덕분에 토르는 자신의 일행이 그들과 꽤 멀리 떨어져 있음을 짐작했다.

토르는 거친 숨을 쉬며 공터 주변을 둘러봤다.

“짐승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왕자님은요?”

리스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멧돼지는 매우 간교하단다. 항상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니야. 가끔은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지. 무방비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서야 공격을 해. 절대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에레크 명장이 설명하며 한발 앞으로 나왔다.

“조심해!”

오코너가 소리질렀다.

돌아보니 커다란 짐승이 흥분한 채 공터로 달려들고 있었다. 토르는 순간 움찔했다. 멧돼지의 공격이 분명했다. 오코너가 비명을 질렀고 리스 왕자가 몸을 돌려 창을 던졌다. 빗나갔다. 짐승은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다시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제서야 토르는 멧돼지가 아닌 도망가는 칠면조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모두들 웃음이 터졌고 덕분에 긴장감이 한결 수그러들었다. 얼굴이 붉어진 오코너의 어깨를 리스 왕자가 안심하라며 다독여줬다.

민망한 듯 오코너가 고개를 돌렸다.

“여기 멧돼지 따위는 없나 봐, 우리가 길을 잘못 골랐어. 여기 있는 거라곤 새들 뿐이잖아.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엘덴이 불평했다.

“그것도 나쁘진 않아, 내가 듣기론 멧돼지 사냥은 목숨이 달린 일이랬어.”

콘발이 대꾸했다.

캔드릭 왕자와 에레크 명장이 차분히 숲을 살폈다. 토르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짐작했다. 그들의 경험과 지혜로 미루어 보아 분명 두 사람은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음, 길이 여기서 끝났나 보네, 여기서 계속 가면 아무 표시도 없을 거야. 다시 돌아오지 못해.”

리스 왕자가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사냥도 끝나잖아요.”

오코너가 대답했다.

“만약 빈손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 거죠? 멧돼지를 못 잡으면요?”

토르가 물었다.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거야.”

엘덴이 대답했다.

“아니야. 모두 다 멧돼지를 발견하는 건 아니야. 사실, 멧돼지를 찾는 경우보다 못 찾는 경우가 더 많아.”

리스 왕자가 정정했다.

모두가 말없이 공터에 서서 거친 숨을 고르며 숲 속을 주시했다. 순간 토르는 물을 너무 많이 마신 덕에 신호를 느꼈다. 사냥 내내 계속해서 소변을 참았고 이제는 방광에서 통증이 느껴져 금방이라도 싸버릴 것 같았다.

“저 잠시만요.”

토르는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디로 가는 거니?”

명장이 주위를 살피며 물어봤다.

“소변 좀 보고 올게요. 금방 올 거에요.”

“멀리 가지 말거라.”

토르는 등뒤로 일행의 시선을 의식하며 서둘러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때마침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 보였다. 일행으로부터 스무 걸음 떨어진 곳이었다.

볼일을 마치자 어디선가 난데없이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컸지만 약간 떨어진 곳이었다. 분명히 사람 발걸음 소리와는 달랐다.

목 뒤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다. 천천히 뒤를 돌아 보니 위쪽으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공터가 있었다. 공터의 한가운데는 커다란 바위가 떡 하니 차지하고 있었다. 움직임은 바위 밑에서 포착됐다.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동물이었다.

사람들에게 돌아갈지 직접 확인에 나설지 망설여졌다. 그런데 몸이 저절로 앞으로 나갔다. 무슨 동물이건 간에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앞섰다. 돌아가서 사람들을 불러오면 그사이 동물이 도망갈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한 토르는 공터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숲이 점점 좁아져 움직일 공간이 부족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울창한 숲과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전부였다. 창을 꼭 붙들고 공터에 들어선 토르는 다시 손에서 힘을 빼 허리 아래로 창을 내렸다.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공터를 눈 앞에 두고 토르는 어리둥절해졌다.

바위 옆 잔디에 조그만 새끼 표범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새끼 표범은 잔디 위에 앉아 꼼지락거리며 울고 있었고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햇살을 받고 있었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였다. 두 뺨도 안 되는 크기에 토르의 셔츠 안에 충분히 들어갈 것 같았다.

토르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표범의 털이 온통 하얬다. 어미가 흰 표범인 게 분명했다. 희귀하기로 이름난 동물이었다.

순간 등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일행이 토르를 향해 서둘러 달려오고 있었다. 제일 선두에 걱정스런 얼굴을 한 리스 왕자가 있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토르 앞에 도착했다.

“어디로 갔던 거야? 죽은 줄 알았잖아.”

리스 왕자가 캐물었다.

토르 옆으로 달려온 일행의 시선이 새끼 표범으로 향했다. 다들 놀라 탄성이 일어났다.

“중대한 징조이구나, 네가 일생 일대의 발견을 했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동물이다. 혼자 남겨진걸 보니 돌봐줄 어미가 없는 모양이야. 그럼 이제부터 네가 주인이 되야 한다. 앞으로 저 새끼표범을 키우는 건 네 의무가 된 거야.”

에레크 명장이 설명했다

“제가 주인이라고요?”

“이제 네 의무가 된 거란다. 네가 찾았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말해야겠지. 저 새끼표범이 널 찾은 거란다.”

캔드릭 왕자가 덧붙였다.

토르는 난처했다. 양을 길러본 적은 있지만 그 외엔 어떤 동물도 키워본 적이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토르는 벌써 이 새끼표범에게 강한 연대감을 느꼈다. 하늘빛깔의 작은 눈을 가진 새끼표범도 오로지 토르에게만 시선을 주는 것 같았다.

토르가 새끼표범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들어올린 새끼표범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새끼표범이 몸을 뻗어 토르의 뺨을 핥았다.

“새끼표범은 어떻게 돌봐야 하죠?”

토르는 어쩔 줄 몰라 질문을 던졌다.

“다른 짐승을 키우듯 별반 차이 없단다. 배고프지 않게 밥을 잘 챙기렴.”

명장이 대답했다.

“이름을 지어줘야지.”

캔드릭 왕자가 일러줬다.

토르는 심사숙고 했다. 벌써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게 두 번째라니 신기했다. 때마침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을 하나를 공포로 몰고 간 사자 이야기였다.

“크론.”

일행들이 다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 속 이름이네.”

리스가 말했다.

“이름 좋은걸.”

오코너가 말했다.

“이제부터 크론이구나.”

에레크 명장이 말했다.

크론이 고개를 숙여 토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고 이에 토르는 그 무엇보다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토르의 품 안에서 칭얼거리는 표범을 바라볼수록 토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새끼 표범을 알아 온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머리털이 쭈뼛 선 토르는 곧바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높은 하늘 위를 날던 에스토펠레스가 순식간에 하강하며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토르의 얼굴위로 돌진했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토르는 처음에 에스토펠레스가 크론을 질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에스토펠레스가 위험을 경고하러 왔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후 숲 건너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토르의 눈 앞으로 돌진했다. 순식간이었다.

에스토펠레스의 경고 덕에 다행히 토르는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달려드는 무언가를 포착한 토르는 재빨리 옆으로 뛰어 몸을 비켰다. 거대한 멧돼지가 토르를 향해 돌진했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갔다.

공터가 난장판이 돼버렸다. 흉포한 멧돼지는 일행들을 공격했고 이리저리 사정없이 뿔을 들이댔다. 멧돼지의 뿔이 스치자 오코너의 살이 찢겨나갔다. 찢어진 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고 오코너는 비명을 지르며 벌어진 상처를 움켜쥐었다.

맨손으로 황소를 때려잡아야 하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엘덴은 긴 창으로 멧돼지를 찌르려 했지만 멧돼지는 그저 고개를 살짝 돌릴 뿐이었다. 그러고는 큼지막한 입으로 엘덴의 손에서 뺏은 창을 두 동강 내버렸다. 다시 몸을 돌려 달려든 멧돼지에 엘덴은 갈비뼈를 들이 받혔다. 그러나 가까스로 뿔을 피해 몸이 뜯겨나가는 부상은 면할 수 있었다.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기세였다. 멧돼지는 분명 일행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고 누구 하나 죽기 전엔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모두가 자세를 바로 하고 공격에 나섰다. 에레크 명장과 캔드릭 왕자가 검을 꺼내 들었고 토르와 리스 왕자, 나머지 부대원들도 창을 앞세웠다.

다 같이 멧돼지를 가운데로 쭉 둘렀다. 그러나 멧돼지가 1미터 가까이 되는 뿔을 이리저리 사정없이 들이미는 바람에 가까이 다가가 공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멧돼지는 모두에게 둘러 쌓인 채로 빙빙 돌며 이리저리 위협적으로 달려들었다. 다같이 순서를 번갈아 가며 멧돼지를 공격했다. 에레크 명장의 검이 멧돼지의 옆구리를 제대로 베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멧돼지는 끄떡없다는 듯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잠시였지만 토르의 눈앞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토르가 고개를 돌려 숲을 살폈다. 저 멀리 나무 뒤에 누군가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토르의 눈에 분명 활과 화살을 들고 공터 쪽을 겨냥하는, 모자가 달린 검은색 망토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노리는 건 멧돼지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토르는 방금 본 게 환영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토르 일행이 공격을 받는다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곳에서?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숲 한가운데서? 누구에게 말인가?

토르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나머지 일행들이 위험에 처해있었기에 무작정 달려갔다. 검은 옷의 남자는 캔드릭 왕자를 노리고 있었다.

토르는 캔드릭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왕자를 강하게 덮쳐 바닥에 쓰러뜨렸다. 잠시 후 화살이 지나갔고 두 사람은 다행히 화살의 방향을 벗어나 있었다.

토르는 검은 옷의 남자를 찾기 위해 곧바로 숲을 살폈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토르는 더 이상 남자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겨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멧돼지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멧돼지는 방향을 바꿔 토르에게 돌진했고 도망치기엔 이미 때가 너무 늦어버렸다. 날카롭고 길다란 뿔을 앞세우고 눈앞으로 돌진하는 멧돼지를 본 토르는 몸을 최대한 말아 충격에 대비했다.

잠시 후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에 토르는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멧돼지 위에 올라탄 명장은 검을 쥔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린 뒤 멧돼지의 뒷목에 내리꽂았다. 멧돼지는 괴성을 질렀고 입에서는 피가 튀어나왔다. 무릎을 꿇고 넘어진 멧돼지는 그대로 에레크 명장을 태운 채 바닥에 쓰러졌다. 한발자국 떨어진 곳에 토르가 있었다.

모두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방금 일어난 일을 납득해보려 애쓰고 있었다.

제 22장

리스 왕자가 선술집의 문을 열자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토르는 셔츠 속에 크론을 품었다. 선술집 내부는 미리 도착한 부대원들과 실버 대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토르 일행이 나타나자 다들 소리치며 인사를 건넸다. 빽빽한 술집에 들어서니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토르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부대원들과 어깨를 맞댔다. 긴 사냥을 마친 하루였다. 사냥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이곳 숲 속 깊숙이 자리한 선술집에 모여 축배를 들었다. 실버 대원이 자리를 안내했고 토르 일행은 그를 따라갔다.

쌍둥이 형제 콘발과 콘벤이 남들보다 몇 배는 큰 이들의 전리품, 멧돼지를 메달은 긴 막대기를 나란히 이고 토르 뒤를 쫓아갔다. 전리품은 반입이 금지되어 쌍둥이들은 술집 문 앞에 전리품을 내려놨다. 토르는 사냥한 멧돼지에 마지막 눈길을 줬다. 여전히 사나워 보였고 그런 멧돼지를 사냥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옷 속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크론을 살펴봤다. 백 표범 새끼를 품 안에 품고 있다니,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크론은 투명한 파란 눈으로 토르를 보며 징징거렸다. 배가 고파 보였다.

토르의 뒤로 수십 명도 더 되는 인원이 술집에 발을 디딘 까닭에 토르는 거의 떠밀리다시피 선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술집 깊숙이 걸어갔고 술집의 좁고 북적거리는 공간은 밖과 비교해 족히 20도는 더 높은 것 같았다. 그만큼 끈끈함도 더했다. 토르 앞으로 에레크 명장과 캔드릭 왕자가 걸어갔고 뒤로는 리스왕자, 엘덴, 쌍둥이 형제, 오코너가 일렬로 따라왔다. 오코너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다행히 출혈이 멈춘 후였다. 다시 긍정적인 모습을 회복한 오코너는 상처에 아파하기는커녕 벌써부터 술집에 마음이 뺏겨있었다. 일행은 술집 안쪽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움직일 때마다 서로 어깨가 부딪혔고 술집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 덕에 몸을 돌릴 공간조차 확보하기 어려웠다. 몇몇 사람들이 기다란 벤치 위에 올라서서 앉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고, 잔과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하거나 일부러 테이블 위로 잔을 내리쳐 쾅 소리를 냈다. 토르로써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소란스러운 축제 분위기였다.

“술집 처음 온 거지?”

토르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엘덴이 소리쳤다.

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시골 촌뜨기가 따로 없었다.

“그럼 잔 맥주도 한번도 못 마셔 봤겠네, 그렇지?”

콘벤이 웃으며 토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당연히 마셔봤지.”

토르는 변명하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토르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제발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길 바랬다. 사실 토르는 제대로 술을 마셔본 경험이 없었고 고작해야 첫째 공주의 결혼식 축제 때 조금 마셔본 게 전부였다. 토르의 아버지는 음주를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행여 허락했다 할지라도 술을 살 돈이 없었기에 역시나 마셔보지 못했을 것이다.

“듣던 중 반기운 소리! 바텐더, 우리 가장 센 걸로 한잔씩 돌려줘. 여기 토르 이 친구가 술을 꽤 하거든!”

콘발이 소리쳤다.

쌍둥이 중 하나가 금화 한 닢을 꺼내 내려놨다. 쌍둥이들이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은 건지 놀라울 뿐이었다. 어느 집 출신인지도 궁금했다. 저 정도 돈이면 토르의 고향에선 식구들 한달 생활비였다.

잠시 후 거품이 가득한 맥주 열 두 잔이 바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쌍둥이들이 인파를 헤집고 다가가 술잔을 들고 왔다. 토르의 손에도 잔이 하나 쥐어졌다. 거품이 넘쳐 토르의 손가락 위로 흘러내렸다. 기대감에 벌써부터 토르의 배가 꼬르륵거렸다. 긴장도 살짝 됐다.

“사냥을 위하여!”

리스 왕자가 목청껏 외쳤다.

“사냥을 위하여!”

나머지 일행들이 따라 외쳤다.

토르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맥주잔을 입으로 옮기며 나머지 일행들을 따라 했다. 한 모금 넘겨보니 영 내키지 않는 맛이었다. 그러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술잔을 비우는 일행들의 모습을 보고선 겁쟁이로 보일까 두려워 의무감으로 술을 마셨다.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억지로 술을 들이켰다. 그러나 난데없이 나오는 기침 세례에 반 정도 남긴 술잔을 내려 놀 수밖에 없었다.

토르에게 시선이 쏠린 일행들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엘덴은 토르의 등을 살짝 쳤다.

“맥주 처음 마시는 거지, 그렇지?”

토르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에 남은 거품을 닦아냈다. 엘덴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순간 마침 어딘가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다같이 돌아보니 악단 명 몇이 입장해 류트와 플루트, 심벌즈를 연주했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고조됐다.

“동생아!”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토르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아 보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허리는 가늘었지만 어깨는 떡 벌어진 체격이었다. 면도도 안 한 데다 차림새도 단정하지 못했다. 남자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리스 왕자에게 어색한 포옹을 건넸다. 남자의 뒤로 역시나 단정하지 않아 보이는 세 명의 일행이 있었다.

“이런 데서 널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걸!”

남자가 리스 왕자에게 말을 건넸다.

“글쎄, 그래도 아주 가끔씩은 형을 본받아야 할 때도 있어야지, 안 그래?”

리스 왕자가 웃으며 소리쳤다.

“토르, 내 형 고드프리 왕자, 알지?”

고드프리 왕자는 몸을 돌려 토르에게 악수를 건넸다. 고드프리 왕자의 손은 부드러웠고 푹신했다. 전사와는 거리가 먼 손이었다.

“물론 새로 등장한 인물에 대해 익히 들었지.”

고드프리 왕자가 토르에게 몸을 바짝 기댔고 혀가 꼬인 채로 계속 말을 건넸다.

“왕국 전체가 네 얘기로 떠들썩해. 아주 훌륭한 전사라며.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술집이 귀한 예비손님을 잃었어!”

고드프리 왕자는 몸을 뒤로 젖히고 정신 없이 웃어댔다. 왕자의 일행도 함께 웃었다. 일행 중 가장 크고 배가 나온 남자가 취기가 잔뜩 오른 얼굴로 토르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용맹함은 훌륭한 기질이야. 그렇지만 그로 인해 전장에 나가고 추위에 시달리지. 술꾼이 된다는 건 이보다 훨씬 더 훌륭하지. 안전과 온기를 보장해주거든. 더군다나 포근한 여자들도 언제나 곁에 둘 수 있다고!”

말을 마친 남자는 일행들과 미친 듯이 웃어댔다. 어느새 바텐더가 맥주잔을 새로 채웠고 이를 본 토르는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길 바랬다. 벌써 머릿속에 취기가 가득했다.

“토르는 오늘이 첫 사냥이었어!”

리스 왕자가 고드프리 왕자에게 외쳤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술을 한 잔 마셔야겠네, 그렇지?”

“두 잔은 마셔야지!”

고드프리 왕자의 일행이 덧붙였다.

토르의 손에 잔이 하나 새로 쥐어졌고 토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을 위해!”

고드프리가 소리쳤다.

“처음을 위해!”

나머지 일행들이 따라 외쳤다.

“살면서 수 많은 첫경험을 하길 바란다. 대신 술이 깨는 첫경험만은 영원히 없었으면 해!”

키 큰 남자가 외쳤다.

모두가 술을 마시며 혼을 잃고 웃어댔다.

토르는 한 모금 마신 뒤 술잔을 내려놨다. 고드프리 왕자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술을 그렇게 마시면 안 돼지!”

고드프리 왕자가 소리치며 앞으로 다가와 술잔을 집어 토르의 입에 들이댔다. 마지못해 술을 마시는 토르의 모습에 일행들은 웃어댔다. 잔을 깨끗하게 비워 탁자에 내려놓자 환호성이 들렸다.

토르는 어렴풋이 밀려오는 현기증을 느꼈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고 집중력도 흐릿해졌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품 안에서 꿈틀거림이 느껴지더니 어느새 크론이 고개를 빼 들었다.

“아니 이것 좀 봐봐!”

고드프리 왕자가 즐거운 듯 소리쳤다.

“새끼 표범이에요.”

토르가 설명했다.

“사냥하다가 발견했어.”

리스 왕자가 덧붙였다.

“배가 고플 거에요. 근데 뭘 먹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왜 몰라? 맥주를 줘야지!”

키 큰 남자가 외쳤다.

“진짜요? 건강에 좋을까요?”

“물론이지! 홉으로 만든 거라고!”

이번에는 고드프리 왕자가 대답했다.

고드프리 왕자가 손가락에 맥주를 찍어 크론에게 가까이 대자 크론은 앞으로 몸을 빼고 손가락을 핥았다. 그러더니 쉬지 않고 왕자의 손가락을 핥고 또 핥았다.

“봐봐, 좋아하잖아!”

순간 고드프리 왕자가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을 움츠렸다. 왕자는 손가락을 높이 들어 피를 보여줬다.

“이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모르겠군!”

고드프리 왕자가 소리치자 일행들이 웃어댔다.

토르는 몸을 숙여 크론의 머리를 쓰다듬고 술잔을 입가에 기울여줬다. 크론은 남은 맥주를 전부 핥아 먹었다. 토르는 크론이 먹을만한 제대로 된 먹을 거리를 찾아봤다. 막사 내에서 크론을 키우려면 콜크 사령관의 허락이 절실했다. 나머지 부대원도 반대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악사들이 새로운 곡을 연주했고 고드프리 왕자의 친구들이 몇 명 더 나타났다. 이들은 토르 일행에게 다가와 맥주를 한잔씩 돌려 마시고선 고드프리 왕자와 함께 북적대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보자고, 동생.”

고드프리 왕자가 자리를 떠나며 리스 왕자에게 외쳤다. 그리곤 토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바라건대 술집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길!”

“바라건대 전장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길!”

캔드릭 왕자가 대꾸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고드프리 왕자는 이 말을 남기고 일행들과 정신 없이 웃으며 사라졌다.

“항상 이렇게 술을 마시나요?”

토르가 리스 왕자에게 물었다.

“고드프리 형? 아마 걸음마 떼고 나서부터 술집 출입 했을 거야. 아버지의 가장 큰 근심거리지. 그렇지만 형은 스스로 만족하고 즐거워해.”

“아니요, 제 말은 병사들 말이에요. 왕의 부대요. 늘 이렇게 선술집에 모이나요?”

리스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서 그래. 첫 사냥이었고, 낮이 가장 긴 하지잖아. 흔치 않은 일이지. 그러니까 즐겨둬.”

술집을 둘러보면 볼수록 점점 더 혼란스러웠다. 토르가 원하는 건 이런 술집 출입이 아니었다. 막사로 돌아가 훈련에 매진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다시 그웬돌린 공주에게서 멈췄다.

“그 남자 얼굴 기억하니?”

캔드릭 왕자가 토르에게 다가와 물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토르가 영문을 모른 채 캔드릭 왕자를 쳐다봤다.

“아까 숲 속에서 말이야, 활을 쏜 남자 기억나지?”

캔드릭 왕자가 설명했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다들 가까이 모여 둘의 대화를 들었다.

토르는 다시 한번 기억해봤지만 집중이 불가능했다. 모든 게 흐릿했다.

“저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근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요.”

“어쩌면 폐하의 병사가 실수로 우리 쪽에 할을 쏜걸 거야.”

오코너가 말했다.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옷차림이 달랐어요. 온통 검은색 차림이었어요. 망토도 그렇고 모자까지. 그리고 화살을 딱 한발 만 쐈어요. 캔드릭 왕자님을 향해서요. 그리곤 바로 사라져버렸어요. 죄송해요. 좀 더 봤어야 했는데.”

생각에 잠긴 캔드릭 왕자는 고개를 저었다.

“형이 죽길 바라는 사람이 누구야?”

리스 왕자가 캔드릭 왕자에게 물었다.

“암살 시도였나요?”

오코너가 물었다.

캔드릭 왕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아는 한 내겐 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아버지께서는 적이 많잖아, 아버지께 도전하기 위해 형을 없애려고 한 걸 지도 몰라.”

“어쩌면 왕자님을 없애 왕좌를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 수도!”

엘덴이 가정했다.

“하지만 너무 터무니없어! 난 적자가 아니라고! 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해!”

일행 모두가 고개를 저었고 맥주를 홀짝이며 실체 파악을 위해 생각에 잠겼다. 그 무렵 술집에서 고함소리가 들렸고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고정됐다. 올려다보니 여자들이 한 줄로 이층 복도에서 난간으로 걸어 나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아슬아슬하게 옷을 걸쳐 입고 진한 화장을 했다.

토르는 보기만해도 얼굴이 붉어졌다.

“안녕, 남자들!”

제일 앞에 선 여자가 외쳤다. 큰 가슴에 빨간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들이 환호했다.

“오늘밤을 위해 돈 가져온 사람 어디 있나요?”

다시 한번 환호성이 들렸다.

눈앞의 광경에 놀란 토르는 토끼 눈이 됐다.

“여기 사창가였어?”

토르가 물었다.

일행들이 고개를 돌려 말없이 토르를 바라봤다. 그리고선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너 숫총각이구나, 맞지!”

콘발이 말했다.

“너 한번도 사창가 와본 적 없어?”

콘벤이 물었다.

“여자도 한번 제대로 못 만나봤을 걸!”

엘덴이 대꾸했다.

이들의 시선에 토르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이들 말대로 토르는 한번도 여자와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절대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혹시 말하지 않았는데도 티가 나지 않을까 걱정됐다.

뭐라도 대답하기도 전에 쌍둥이 형제 한 명이 다가와 토르의 등을 꼭 잡고 계단 위 여자에게 금화를 던졌다.

“여기 첫 번째 손님이요!”

쌍둥이 형제가 외쳤다.

술집 가득히 환호성이 울렸다. 안간힘을 쓰며 몸부림을 쳤는데도 불구하고 토르는 어느새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이끌려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내내 머릿속은 그웬 공주뿐이었다. 얼마나 공주를 마음 깊이 좋아하는지 생각했고, 공주 외의 사람과는 한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돌아서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도망갈 곳이 없었다. 수십 명의 큰 덩치들이 토르를 끌고 갔고 돌아서지 못하게 막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계단을 올라 자신보다 키가 큰 여자 앞 이었다. 여자는 과한 향수냄새를 풍기며 토르를 향해 미소 지었다. 더욱 최악인건, 이미 취해버린 토르였다. 토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여자는 토르에게 다가서서 상의를 벗긴 뒤 토르를 방으로 끌고가 문을 닫았다. 토르는 여자를 거부했다. 그웬 공주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식의 첫경험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 취해 눈앞이 흐릿했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건 여자의 침대위로 끌려온 기억과 그러는 내내 바닥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쓴 기억뿐이었다.

제 23장

끊임 없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맥길 왕은 억지로 눈을 떴고 순간 단잠을 깬 아쉬움이 밀려왔다. 머리가 찢어질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열려있는 창문위로 내리쬐는 찬란한 햇빛이 잔인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밤새 양피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골아 떨어져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 기억을 더듬어봤다. 왕이 깨어난 곳은 궁전이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사냥을 나섰고 그 후 숲 속 선술집으로 향했다. 무리해서 술을 마셨지만 만취 상태에서도 궁에 잘 찾아 왔다.

왕은 고개를 돌려 왕비를 봤다. 왕 옆자리에서 이불을 덮고 잠이든 왕비는 이제 슬슬 깰 참이었다.

누군가 또다시 문을 두들겼다. 철로 된 고리 쇠가 부딪히며 끔찍한 소음을 자아냈다.

“누가 저렇게 문을 두드리죠?”

신경이 쓰이는 듯 왕비가 물었다.

맥길 왕도 같은 생각이었다. 왕은 분명 신하들에게 잠을 깨우지 말라고 평소 단단히 일렀다. 특히 사냥을 하고 온 날이면 이를 더욱 강조했다. 왕명을 어긴 죄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짐작하건대 집사가 하찮은 재정 문제나 거론하려고 문을 두드리는 게 분명했다.

“감히 누가 이리 소란을 피우냐!”

맥길 왕이 결국 고함을 질렀다. 침대에서 몸을 돌려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왕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나머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는 이내 양 손으로 감지 않은 머리를 쓸었다. 다시 수염과 얼굴을 차례로 쓸어내며 정신을 차렸다. 사냥과 음주의 여파가 너무 컸다. 한창때에 비해 몸이 많이 굳었다. 왕은 세월의 여파와 함께 기력을 모두 소진해버렸다. 지금 이 상태라면 평생토록 금주를 맹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은 있는 힘껏 몸을 일으켜 두 발로 섰다. 가운만 입은 채 침실을 가로질러 문으로 걸어갔다. 두꺼운 철문고리를 붙잡고 앞으로 당겼다.

문 앞에는 총 사령 고문관, 브롬이 양 옆으로 중위 두 명을 대동하고 서있었다. 중위 두 명은 고개를 숙여 왕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총 사령 고문관은 엄숙한 얼굴로 왕을 바라봤다. 맥길 왕은 늘 브롬의 엄숙한 표정이 내키지 않았다. 이러한 얼굴에는 어김없이 침울한 소식이 함께였다. 맥길 왕은 그럴 때마다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즐거웠다. 즐거웠던 사냥 덕에 철없던 젊은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선술집에서 시간을 보냈을 땐 더더욱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불청객의 방문에 억지로 잠이 깼고 덕분에 누렸던 평화도 깨져버렸다.

“폐하, 잠을 방해해 죄송합니다.”

브롬이 입을 열었다.

“죄송해야지, 중요한 사안이어야 하네.”

“그렇습니다.”

브롬의 얼굴에서 심각함이 전해졌다. 왕은 뒤돌아 왕비를 살폈다. 왕비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

왕은 브롬 일행에게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드넓은 침실을 가로질러 아치형 문을 지나 침실에 달린 작은 회의실로 데려갔고 왕비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회의실 문을 닫았다. 회의실은 앞뒤로, 좌우로 약 스무 걸음밖에 안 되는 작은 방이었다. 아늑한 의자가 몇 개 있었고 색색으로 물들인 커다란 유리 창이 나 있었다. 대 회의실에 가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날에는 가끔씩 이곳에서 정무를 봤다.

“폐하, 정보원에 따르면 맥클라우드 대표단이 페이비안 바다를 향해 동쪽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서쪽에 주둔한 우리 수색 병에 따르면 미개 왕국의 함선들이 북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분명 맥클라우드 왕족과의 회담을 위해 움직이는 게 확실합니다.”

맥길 왕은 방금 접한 정보를 분석하려 했으나 숙취의 여파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피곤함에 참을성을 잃고 재촉했다. 왕실을 둘러싼 끝없는 음모와 추측과 속임수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만일 정말 맥클라우드 왕가가 미개 왕국과 회동한다면 목적은 단 하나뿐입니다. 캐니언 협곡을 뚫고 링 대륙을 차지할 음모를 모의하려는 거겠죠.”

왕은 그의 곁에 오랫동안 머물러온 총 사령 고문관, 브롬을 바라봤다. 30여 년간 적군과 싸워온 브롬의 눈빛에 치명적인 진지함이 어려 있었다. 그 한 가운데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맥길 왕이 아는 한, 브롬은 두려움 따위는 모르는 사내였기에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왕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커다란 체구를 돌려 창가로 걸어갔다. 밖으로 시선을 옮겼고, 이른 아침이라 아무도 없는 왕궁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줄 곳 염두 해온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너무 이르오. 그쪽 왕자에게 공주를 시집 보낸 지 이제 겨우 며칠이 지났소. 그런데 지금 자네는 그들이 이미 우리를 정복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폐하. 그 외에 다른 이유는 결코 없습니다. 모든 조짐을 합쳐 보아 이들의 회동은 평화적입니다. 무력충돌이 전혀 없습니다.”

바론의 대답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네. 동부 왕국이 왜 미개 왕국을 링 대륙 안으로 들이겠나. 그들이 왜? 만일 그들이 미개왕국을 도와 보호막을 뚫고 우리 서부왕국으로 들어온다 쳐도,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어떻소? 미개왕국은 결국 동부왕국도 넘볼 것이오. 동부왕국도 결코 안전하지 못해. 맥클라우드 왕가도 이를 분명 알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모종의 계약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미개왕국의 진입을 허락하는 대신 우리 서부왕국만 공격하도록 약속을 받아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맥클라우드 왕이 링 대륙을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되니까요.”

맥길 왕은 고개를 저었다.

“맥클라우드 왕가는 매우 영리하오. 아주 간교하지. 미개왕국이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소.”

브롬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링 대륙을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그런 기회나마 잡으려는 게 아닌가 사려됩니다. 더군다나 현재 폐하의 따님께서는 동부왕국의 예비 왕비이십니다.”

왕은 곰곰이 생각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당장은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이른 아침이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의견은 무엇이오?”

왕은 브롬과의 대화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다. 계속해서 추측만 난무하는 상황에 이미 지쳐버렸다.

“이 상황을 선점해야 합니다, 폐하, 동부왕국을 정복해야 합니다. 지금이 적기입니다.”

놀란 왕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브롬을 바라봤다.

“내 딸을 시집 보내자마자 바로 공격을 하라는 것이오? 허락할 수 없소.”

“만약 그렇게 못하면, 그들이 우리 영토에 침범하도록 허락하는 거나 다름 없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예정된 일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나중에라도요. 만약 미개왕국과 손잡는다면, 서부왕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하이랜드 산악지대를 쉽게 넘지 못할 것이오. 산악지대의 모든 관문은 우리가 관리하고 있소. 그들의 병사만 대량 학살될 것이오. 설령 미개 왕국과 함께 공격한다 해도 말이오.”

“미개왕국은 수백만의 병사가 학살돼도 군사력에 큰 타격을 입지 않습니다. 수백만 병사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겁니다.”

“설령 보호막이 무너진다 해도 수백만 병사를 이끌고 캐니언 협곡을 넘거나 하이랜드 산악지대를 넘어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소. 함선을 타고 오는 것도 그렇소. 우리 병력이라면 이미 초기에 그들의 움직임을 감지할 것이고 경고를 보낼 것이오.”

맥길 왕은 심사숙고 했다.

“우리의 선 공격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부턴 신중한 조치를 취할 것이오. 하이랜드 산악지대의 순찰병을 두 배로 늘리고 요새를 강화하시오. 정보원도 두 배로 늘리시오. 이 정도면 될 것이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폐하,”

대답을 마친 브롬이 함께 온 중사 두 명을 데리고 서둘러 회의실을 나섰다.

왕은 다시 창가로 몸을 돌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왕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다시 주변을 차근차근 둘러봤다. 왕궁과 요새, 눈 아래로 펼쳐진 깔끔한 궁중을 보며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

지금 술을 더 마신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제 24장

누군가가 옆구리를 가볍게 발로 툭툭 차는 바람에 토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밀짚 침대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토르는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궁금했다. 머리는 쇳덩이에 짓눌린 것 같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갈증이 밀려왔다. 머리뿐만 아니라 두 눈까지 욱신거렸다. 마치 낙마한 기분이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토르를 건드렸다. 토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방안이 정신 없이 돌고 돌았다. 몸을 구부려 구역질을 했다. 계속 쏟아내고 쏟아냈다.

방안 가득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아보니 리스왕자, 오코너, 엘덴, 쌍둥이 형제가 가까이 다가와 토르를 내려다봤다.

“드디어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깨어났군!”

리스왕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다신 못 깨어나는 줄 알았다니까.”

오코너가 덧붙였다.

“괜찮은 거야?”

엘덴이 걱정했다.

토르는 손등으로 입을 닦고 몸을 다시 일으켰다. 몇 발자국 떨어져 자고 있던 크론이 낑낑거리며 달려와 토르의 품에 뛰어들어 머리를 비볐다. 크론과 함께라서 기뻤고 크론의 존재에 마음이 놓였다. 토르는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다.

“여기가 어디야? 어제 어떻게 된 거지?”

일제히 웃음이 일어났다.

“네가 어제 과음을 했다네, 친구여. 맥주 마시고 맛이 갔어. 기억 안나? 선술집?”

토르는 두 눈을 감고 양쪽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어제밤일을 떠올렸다. 영상이 짤막하게 아른거렸다. 사냥을 마치고 선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신 장면이 떠올랐다. 사창가 계단 위로 올라간 기억도 났다. 그러나 그 이후로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웬돌린 공주가 생각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혹시 공주한테 얼굴도 들지 못할 바보 같은 짓을 한 건 아닐까? 이제 더 이상 공주를 볼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을까?

“어떻게 됐죠?”

심각해진 토르는 리스 왕자의 팔목을 꼭 붙들었다.

“제발 말해줘요. 그 여자랑 아무 일도 없었던 거죠?”

다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왕자만은 진정을 담아 토르를 바라봤다. 토르가 얼마나 속상해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걱정 마, 친구, 실수한 거 없어. 그 여자 방바닥에 토하다가 쓰러진 거 빼고는!”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됐다.

“첫경험 한번 제대로 망쳤군.”

엘덴이 말했다.

그러나 토르는 마음 속 깊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주를 저버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다신 너한테 그런 돈 안 쓸 거야!

콘발이 말했다.

“정말 제대로 돈 낭비 했다고. 그 여자한테 돈도 다시 못 돌려 받았어!”

콘벤이 설명했다.

다들 웃어댔다. 토르는 창피하긴 했지만 공주와의 관계를 망치지 않았다는데 안도했다.

토르는 왕자의 팔을 가까이 끌어당겨 속삭였다.

“공주님 말인데요, 공주님은 어제 일에 대해선 모르시겠죠, 그렇죠?”

왕자의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가 펴졌다. 왕자는 토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 일은 비밀로 해둘게. 네가 딱히 뭘 한 건 아니지만. 누나는 몰라. 네가 우리 누나를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 그 점 고맙게 생각해.”

왕자의 얼굴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이제 보니 네가 정말 우리 누나를 아끼는 게 느껴진다니까. 만약 네가 그 여자랑 잤다면, 널 내 매형 감으로 탐탁히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사실 말이야, 너한테 이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도 받았다니까.”

리스 왕자는 돌돌 말린 작은 종이를 토르의 손바닥에 쥐어줬다. 손바닥을 내려다 보니 왕가의 도장이 찍힌 분홍색 종이가 있었다. 누군지 짐작이 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나가 보낸 거야.”

“우와!”

탄성이 울려 퍼졌다.

“어서 읽어봐!”

엘덴이 소리쳤다.

다같이 웃으며 맞장구 쳤다.

그러나 토르는 은밀히 읽고 싶었다. 서둘러 이들과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았지만 문제될게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우아한 양피지를 펼쳐 읽었다.

“리지 숲에서 정오에 만나. 늦지마.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마.”

토르는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뭐라고 써있어, 바람둥이?”

콘벤이 소리쳤다.

토르는 서둘러 리스 왕자에게 갔다. 왕자만은 믿을 수 있었다.

“오늘 부대 훈련 없죠, 맞죠?”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없지, 오늘은 휴일이잖아.”

“리지 숲이 어디 있어요?”

왕자가 미소 지었다.

“아,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야. 동쪽 길을 따라 궁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 작은 산을 올라가다가 두 번째 언덕 지나면 나와.

토르는 왕자를 바라봤다.

“부탁해요,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줘요.”

왕자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누나도 그러길 바랄 거야. 만약 어머니께서 아시면 둘 다 가만 안 둘걸. 누나는 방에 감금되고 넌 왕국의 서쪽 끝으로 추방당할지도 몰라.”

생각만으로도 두려워 토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이요?”

*

이른 아침부터 토르는 걸음을 재촉했다. 크론을 옆구리에 끼우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이 길을 나섰다. 왕자가 일러준 대로 열심히 길을 찾아갔다. 머릿속으로 길을 대뇌이며 왕궁 밖으로 나갔고, 작은 산에 올라 울창한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왼쪽으로 낭떠러지가 펼쳐진 가파른 산등성이의 좁을 길이었다. 그렇게 왼쪽으로는 절벽, 오른쪽으로는 숲이 이어졌다. 리지 숲, 바로 공주가 만나자는 장소였다. 공주는 진심일까? 그저 혹시 장난을 치는 것일까?

알톤은 참으로 뻔뻔한 왕족이 아닌가? 토르는 결국 공주의 장난감에 불과할까? 공주가 곧 실증을 낼까? 토르는 그 누구보다 간절히 그런 일은 없길 바랬다. 공주의 감정이 진심이라 믿고 싶었다. 비록 그런 일이 가당하기나 한지 스스로도 의문을 품었지만. 공주는 이제 겨우 토르와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왕족이었다. 토르에게 어떤 관심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공주는 토르보다 두 살 연상인데다 지금까지 연상이 토르를 좋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사실 그 어떤 소녀도 토르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고향에는 만남을 가질만한 소녀들이 거의 없었다.

토르는 여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여자 형제도 없었고 마을에는 또래 이성이 거의 없었다. 토르 또래의 소년들 또한 그다지 여자에 관심 없었다. 열여 덜 살이 넘어야 결혼하는 추세였고 그나마도 사업계약을 맺듯 정략 결혼을 올렸다. 계급이 높은 미혼 남자는 스물 다섯이 되는 날 선택의 날을 맞이한다. 신붓감을 고르거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으면 밖으로 나가 한 명을 데려와야 한다. 그러나 이도 토르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토르는 가난했다. 결혼 적령기의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부모가 원하는 결혼을 하기 마련이었다. 소를 거래하는 방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웬돌린 공주를 보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처음으로 토르는 무언가에 완벽히 마음을 빼앗겼다. 너무나 깊고 강하고 다급한 감정에 사로잡혀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공주를 볼 때 마다 이러한 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공주와 함께 있지 않으면 가슴이 아려오기까지 했다.

산등성이를 따라 속도를 두 배로 높였다. 이곳 저곳을 샅샅이 둘러보며 공주를 찾았다. 만나자는 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과연 공주가 만나러 오기는 할지 궁금증이 계속됐다. 첫 번째 태양이 높이 치솟았고 토르의 이마에 땀방울이 조금씩 맺혔다. 전날 밤의 여파로 여전히 불쾌하고 메스꺼웠다. 하늘높이 떠있는 태양 아래 공주를 아무리 찾아봐야 찾을 수가 없었다. 공주가 정말 토르를 만나러 올지도 의문이었다. 토르는 어느새 공주에게 뺏긴 마음이 초래할 위험을 생각하고 있었다. 왕비가 진정으로 계속 반대한다면, 토르의 결말은 결국 추방이 될 것인가? 왕의 부대에서도?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으로부터도? 그렇다면 무얼 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토르는 심사숙고 끝에 공주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게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 공주를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다만 섣부른 판단으로 바보같이 공주가 자신을 많이 좋아한다고 착각하지 않기만을 바랬다.

“내 옆에서 같이 걸을 참이었니?”

누군가가 말을 걸고 이내 킥킥 웃었다.

무방비 상태였던 토르는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소나무 그늘아래 공주가 미소를 가득 안고 서 있었다. 그 미소에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주의 눈빛에 애정이 가득했고 그 눈빛에 지금까지 끌어안고 있던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단번에 녹아 내렸다. 혼자서 바보같이 공주의 의도를 의심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공주를 보자 크론이 칭얼거렸다.

“어머 이게 뭐야?!”

공주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공주가 무릎을 구부리자 크론이 칭얼거리며 뛰어가 공주의 팔에 안겼다. 공주는 크론을 품에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너무 귀여워!”

공주가 크론을 꼭 안았다. 크론이 공주의 얼굴을 핥았고 공주는 킥킥거리며 크론에게 뽀뽀했다.

“이름이 뭐니, 작은 친구야?”

공주가 크론에게 물었다.

“크론.”

토르가 대답했다. 이번엔 더듬지 않고 제대로 대답했다.

“크론.”

크론과 시선을 마주친 공주가 따라 외쳤다.

“그럼 항상 이 표범 친구와 함께 다니는 거야?”

“제가 발견한 거에요, 숲에서요. 사냥하던 날이요. 공주님 첫째 오빠 분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발견했으니 제가 돌봐줘야 한대요.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래요.”

언제나 그렇듯 토르는 공주를 의식하며 대답했다.

공주는 진지한 얼굴로 토르를 쳐다봤다.

“음, 오빠 말이 맞아. 동물은 신성한 존재야. 네가 발견한 게 아니야. 동물이 널 찾은 거지.”

“크론이 같이 있어도 괜찮을까요?”

공주가 킥킥 웃었다.

“크론이 같이 있지 않으면 오히려 서운할 거야.”

공주는 좌우를 살펴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토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토르를 숲 속으로 데려갔다.

“가자, 다른 사람 눈에 뛰기 전에.”

공주가 토르의 손을 이끌고 숲 속 산책길로 안내했고 전해지는 공주의 감촉에 토르는 마냥 들떴다. 두 사람은 소나무 숲 한복판에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서둘러 숲으로 들어갔다. 공주는 토르의 손을 놓았지만 그 감촉만은 계속해서 토르의 마음속에 머물렀다.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생각에 이내 마음이 놓였다. 공주는 확실히 그 누구의 눈에도 뛰고 싶어하지 않았다. 특히 왕비의 눈에. 분명 공주는 토르와의 만남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녀도 위험을 감수하고 토르를 만나는 것이지 않나.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선 공주가 알톤이나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게 아닌가 생각됐다. 어쩌면 알톤이 옳았다. 공주는 토르와 있는 게 창피할 수도 있다.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토르를 에워쌌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공주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말을 걸었다.

토르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속 생각들을 공주에게 말하면 공주와의 관계를 망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렇지만 자신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공주에게 다 털어놔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주의 입장이 어떤지 알아야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공주님이 저번에 먼저 가버리셨을 때요, 알톤 공작을 만났어요. 공작님이 제 앞에 나타났어요.”

공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명랑함이 사라졌고 이에 토르는 데 죄책감을 느꼈다. 공주의 밝은 성격과 즐거운 마음을 소중히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방금 한 말을 다시 거두고 싶었다. 그만 했어야 했는데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알톤이 뭐라고 했어?”

“공주님한테서 떨어지라고 했어요. 공주님께서 진심으로 절 대하는 게 아니라고요. 공작님에 따르면 전 그냥 장난감 같은 거래요. 하루 이틀이면 공주님이 제게 질릴 거래요. 또 두 분이 결혼하기로 했고 이미 결혼 준비도 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화가 난 공주는 조소를 터트렸다.

“알톤이 그랬어?”

공주가 콧방귀를 꼈다.

“정말 너무 건방지고 참을 수 없는 입안의 가시 같은 존재야. 내가 걸음마를 뗐을 때부터 거슬리기 시작했어. 우리 부모님과 사촌이라는 이유로 알톤도 스스로를 왕족이라고 여겨. 그렇게 왕족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는 처음이야. 더군다나 알톤은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 둘이 결혼할 운명이라고 생각해. 내가 부모님이 시키는 데로 다 할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니까. 절대 아니거든. 절대 알톤하고는 결혼 안 해. 보기만해도 끔직한걸.”

공주의 대답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훨씬 가벼워진 마음에 나무 꼭대기에 올라 노래라도 부르고 싶었다. 토르가 듣고 싶던 바로 그 대답이었다. 이제서야 아무것도 아닌 일로 두 사람의 분위기를 어둡게 한 사실에 미안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여전히 공주가 토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너에 대해서는.”

공주가 살짝 토르의 얼굴을 살핀 뒤 고개를 돌렸다.

“난 넌 잘 몰라. 내 감정이 어떤 건지 지금 당장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이렇게 말해 줄 순 있어. 내가 만약 널 싫어한다면 만나지 않았을 거야. 물론 언제든 마음을 바꿔 먹을 수도 있고 변덕을 부릴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랑에 관한 한 그렇지 않을 거야.”

그 정도면 토르에겐 충분한 대답이었다. 공주의 진지함에 감명받았고 공주가 언급한 사랑이라는 단어도 인상 깊었다. 두려웠던 마음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나도 네게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어. 사실 내가 너보다 잃을게 훨씬 많아. 결국 나는 왕족이고, 넌 평민이잖아.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너보다 내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너에 관한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와. 권력에 눈이 멀어 신분상승을 위해 나를 이용하고 있다고. 왕이 되려 한다고. 내가 이런 말들을 믿어야 할까?”

토르는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에요, 공주님! 절대요. 꿈에라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요. 제가 여기 공주님 곁에 있는 건 공주님께서 안 계신 다른 곳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에요. 단지 곁에 있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공주님께서 곁에 없으면 공주님 생각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런 거에요.”

공주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드리워졌고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넌 여기 새로 왔잖아. 왕실이 처음이고, 왕실 생활도 처음이잖아.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기까진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여기선 그 누구도 진심을 말하지 않아. 모두에겐 각자의 의도가 있어. 모두 다 권력을 쫓지. 권력이 아니면 지위나 부 또는 돈과 명예를 탐해. 그 누구도 아무것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 각자가 정보원과 파당을 두고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지. 일례로, 알톤이 네게 우리의 결혼이 이미 예정됐다고 말했던 건 다름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떤지 떠보려는 의도였을 거야. 두려웠겠지. 어쩜 누군가에게 벌써 도움을 요청했을지도 몰라. 알톤에게 결혼은 사랑이 전제가 되는 일이 아니야. 단지 동맹이지. 순수하게 재정적인 이득과 계급 상승, 재산증식을 위한 수단이지. 우리 왕궁에서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순간 크론이 전속력을 다해 숲 속 내리막길에 있는 공터로 뛰어갔다.

공주는 토르를 보며 킥킥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토르의 손을 잡고 크론을 쫓아 달렸다.

“빨리!”

신이 난 듯 공주가 외쳤다.

산책로를 따라 뛰어 내려가니 커다란 공터가 펼쳐졌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장관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형형색색의 야생화로 가득한 아름다운 초원이었다. 온갖 종류의 새와 나비가 공중에 날아다녔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생동감이 넘쳤다. 태양이 찬란하게 초원을 비췄다. 어두운 숲 한가운데 숨어있는 비밀의 공간 같았다.

“눈 가리고 숨바꼭질 해본 적 있니?”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공주는 목에 맨 손수건을 꺼내 등뒤에서 토르의 눈을 가렸다. 토르의 눈앞이 컴컴해졌고 공주는 토르의 귓가에 킥킥거렸다.

“네가 술래야!”

공주가 잔디 너머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죠?”

“날 찾아봐!”

공주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눈을 가린 토르는 공주를 찾아 나섰다. 걸을 때마다 발을 헛디뎠다. 공주의 치마자락이 나풀거리는 소리에 의지해 공주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꽤 어려웠다. 두 손으로 눈 앞을 더듬어가며 공터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나무에 부딪히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향을 잃었고 계속해서 빙빙 돌고만 있었다.

토르는 다시 멀리서 들려오는 공주의 웃음소리에 의지해 방향을 바꿔 뛰었다. 어느 순간 공주가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가도 어느 순간 공주가 멀리 가버린 것 같았다. 점점 어지러웠다.

크론이 토르 옆에서 달렸다. 크론이 날카롭게 짖었고 덕분에 토르는 공주 대신 크론을 쫓았다. 그러자 공주의 웃음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기특하게도 크론이 토르를 공주에게 안내하고 있었다. 숨바꼭질 놀이를 금새 이해하는 크론의 영리함에 토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제 공주와의 거리가 몇 걸음 안으로 좁혀졌고 토르는 이쪽저쪽으로 공주를 찾았다. 손을 뻗어 공주의 옷자락을 잡았고 공주는 즐거움에 소리를 질렀다. 공주의 옷자락을 잡은 순간 토르가 발을 헛디뎠고 덕분에 두 사람은 바닥에 넘어졌다. 토르는 재빨리 몸을 돌려 공주를 몸으로 받아냈다.

토르 위로 넘어진 공주가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공주는 이내 킥킥 웃어댔고 눈을 가린 손수건을 풀어줬다.

공주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보고 있자니 심장이 요동쳤다. 토르는 온 몸으로 공주를 지탱했다. 얇은 여름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공주의 몸매가 느껴졌다. 공주는 토르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의지했다. 공주가 토르와 시선을 맞추자 두 사람의 호흡이 얕아졌다. 공주는 시선을 고정했고 토르 또한 공주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바람에 정신까지 혼미했다.

갑자기 공주가 몸을 앞으로 숙여 토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세상 그 무엇보다 부드러웠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 난생 처음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토르가 눈을 감자, 공주도 눈을 감았고 두 사람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입을 맞추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토르로서는 이 순간을 영원히 붙잡고 싶었다.

드디어 공주가 살포시 입술을 뗐다. 공주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천천히 감은 눈을 떴다. 여전히 토르 위였다.

두 사람은 눈을 맞추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누워있었다.

“넌 어디서 온 거니?”

미소를 가득 담은 공주가 부드럽게 물었다.

토르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전 그냥 평범한 소년이에요.”

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느낄 수 있어. 넌 평범한 그 소년 이상이야.”

공주가 몸을 기울여 다시 토르에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맞닿았고 이번에는 더 오랜 시간 입을 맞췄다. 토르가 손을 뻗어 공주의 머리카락을 쓸었고 공주도 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동치는 심장이 멈추질 않았다.

토르는 벌써부터 둘 사이의 앞날이 걱정됐다. 이들을 반대하는 수많은 세력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게 가능한 것인가? 두 사람이 진정 연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세상 그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하길 절실히 바랬다. 지금 이 순간, 공주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앞섰다. 그렇게 꿈꾸던 왕의 부대를 저버릴 만큼.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잔디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라 돌아봤다. 크론이 이들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진 잔디 위로 달려들었고 또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론이 날카롭게 짖고 으르렁거렸다. 곧이어 쉬이 하는 소리가 이어졌고 이내 다시 조용해졌다.

공주는 토르에게서 떨어졌고 두 사람 모두 동시에 일어나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던 토르는 재빨리 일어서서 공주를 보호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지만 짐승이든 사람이든 한발자국 떨어진 웃자란 잔디 속에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눈 앞에 크론이 나타났다. 작고 날카로운 크론의 이빨 사이로 커다란 백사가 매달려 있었다. 3미터 가까이 되는 길이에 밝고 윤이 나는 백색이었다. 몸통은 커다란 나뭇가지만큼 두꺼웠다.

순간 모든 상황이 정리됐다. 크론이 치명적인 뱀의 공격으로부터 두 사람을 구해낸 것이다. 토르는 새끼 표범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웬 공주가 경악했다.

“백사, 왕국에서 가장 치명적인 파충류.”

토르는 경외감에 백사를 바라봤다.

“실제로 이 뱀이 존재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전설에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매우 희귀해, 나도 기존에 딱 한번 봤었어. 우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날. 이 뱀은 흉조야.”

공주는 놀라 토르를 바라봤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뜻이야.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

토르의 등줄기에 오싹함이 전해졌다. 한 여름 초원에 갑작스런 한기가 흘렀다. 토르도 알고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백사가 죽음의 흉조라는 사실을.

제 25장

그웬돌린 공주는 홀로 궁전을 걸어갔다. 나선형 계단을 쭉 따라 돌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머리 속에는 온통 토르 생각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산책. 두 사람의 키스. 그리고 백사.

상반되는 감정이 공주를 괴롭혔다. 토르와 함께 한 시간에 매우 행복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백사가 의미하는 죽음의 전조로 두려움 마음이 앞섰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못 하는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을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낼 수 없었다. 혹시라도 가족 중 한 사람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오빠들 중 할 명일까? 고드프리 왕자? 캔드릭 왕자? 혹시 그럼 어머니? 그도 아니면, 공주는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아버지?

백사는 즐거웠던 하루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덕분에 분위기가 산산조각 나버렸고 토르와 공주는 차마 분위기를 전환할 수도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왕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함께 숲 속을 벗어난 이후부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따로따로 돌아왔다. 공주로서는 토르와 함께 있는 모습을 결코 어머니께 들키고 싶지 않았다. 순순히 토르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어머니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적절한 전략을 세울 때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다.

생각해보니 토르와의 만남이 너무 짧게 끝나 속이 상했다. 토르에게 다음에도 만나러 올 거냐고 물어보려 했었다. 다음 약속을 잡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백사를 본 충격에 너무 혼란스러워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토르가 혹시라도 자신을 무신경하게 여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신경 쓰였다.

궁전에 도착했을 때 공주는 폐하의 시중으로부터 폐하를 알현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왜 아버지가 보자고 하시는 건지 의문을 품은 채 떨리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아버지께서 토르와 함께 있는 걸 보신 걸까? 아버지께서 이렇게 급하게 부르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버지께서도 어머니처럼 토르와 만나는걸 금지하실까?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왕은 언제나 공주 편이었다.

턱 끝까지 숨이 찰 무렵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공주는 서둘러 복도를 지났다. 공주의 등장에 예의를 표하고 문을 열어준 시중들을 지나 회의실에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시중 두 명이 폐하 곁에 있었고 이들은 공주를 보자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물러가거라.”

왕이 시중들에게 명령했다.

이들은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방을 나섰고 등 뒤로 문을 닫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은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회의실을 가로질러 공주에게 다가갔다. 공주는 안도했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화난 모습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내 딸 그웬돌린.”

왕은 두 팔을 뻗어 공주를 꼭 안아줬다. 공주도 왕을 꼭 안았다. 곧이어 왕은 의자 두 개가 놓인 벽난로 옆으로 공주를 안내했다. 공주가 어린 시절부터 길러온 커다란 울프하운드 몇 마리가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의 길을 비켜줬다. 그 중 두 마리는 공주를 쫓아가 공주의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공주는 불 가까이 있어 기분이 좋았다. 여름 날 치고는 이상하리만치 갑작스레 날씨가 추워졌다.

왕은 눈 앞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주시하며 벽난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불렀는지 알고 있느냐?”

공주는 왕의 얼굴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왕은 놀란 듯 보였다.

“저번에 내렸던 결정 말이다. 네 형제들 앞에서 내린 후계 결정. 바로 그걸 너와 의논하고 싶었다.”

무겁던 공주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토르와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정치 문제였다. 바보 같은 정치, 공주는 안중에도 없었다. 공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긴장이 풀린 것 같구나. 뭘 예상하고 왔던 것이냐?”

왕은 통찰력이 깊었다. 언제나 그랬다. 공주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읽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늘 아버지 앞에서는 조심해야 했다.

“아무것도요, 아버지.”

왕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말해보거라. 내 결정에 대한 네 의견은 어떠하냐?”

“결정이요?”

“후계자 말이야! 왕국을 다스릴!”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럼 누구겠느냐?”

왕이 웃었다.

공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버지, 굳이 말씀 드리자면 놀랐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어요. 전 장자가 아니잖아요. 더군다나 여자의 몸이에요. 정치에 대해선 문외한이에요. 관심도 없고요. 왕국을 다스리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전 정치에 욕심이 없어요. 왜 절 선택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널 택했단다.”

왕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바로 네가 왕좌를 열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넌 왕위를 탐하지 않아. 그리고 정치에 있어서도 넌 백지 상태다.”

왕은 깊게 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넌 인간의 습성을 이해하고 있어. 통찰력이 남달라. 나를 닮았지. 넌 네 어머니로부터 빠르고 명확한 두뇌를 물려 받았고 내게서는 사람을 다루는 능력을 물려 받았단다. 넌 본능적으로 사람을 판단할 줄 알아. 그들을 꿰뚫어 본단다. 그리고 그게 바로 왕에게 요구되는 자질이다. 다른 이의 본질을 읽어내는 능력, 그거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나머지는 모두 기교에 불과해. 네 사람들을 정확히 파악해라. 그들을 이해하고 네 직감을 믿어라. 그들에게 환심을 얻어. 그거면 된다.”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분명 좀 더 많은 자질이 필요할거예요.”

“그렇지 않다. 네 기질이면 모든 걸 다 다스릴 수 있단다. 분명 훌륭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

“그렇지만 아버지, 잊고 계시는 게 있어요. 우선 전 왕위 따위는 관심 없어요. 그리고 아버지께서 당장 돌아가시는 게 아니잖아요. 모두 다 언니 결혼식 날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바보 같은 전통 때문이에요. 왜 이런 일에 연연하세요? 저라면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겠어요. 생각도 안 할 것 같아요. 아버지가 절대 돌아가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 모든 얘기가 다 소용 없게끔 말이에요.”

왕은 엄숙한 얼굴로 목을 가다듬었다.

“아르곤과 얘기를 나눴다. 내 앞날이 그다지 밝지 않다더구나. 나도 이미 느끼고 있단다. 준비를 해 둬야 해.”

공주는 순간 몸이 죄어오는 것 같았다.

“아르곤은 바보에요. 단지 마법사잖아요. 그가 한 말의 절반은 일어나지도 않았다고요. 무시하세요. 그러 바보 같은 전조에 굴복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괜찮을 거에요. 영원히 죽지 않을 거에요.”

그러나 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슬픔이 가득한 왕의 얼굴을 보자 공주는 다시 한번 몸이 죄어오는 걸 느꼈다.

“그웬돌린, 사랑하는 내 딸. 네가 준비를 해줬으면 싶구나. 네가 왕국의 다음 지도자가 되어줬으면 한단다. 심각하게 말하는 거란다. 네게 청하는 게 아니야. 명령하는 거야.”

진지한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보는 왕의 눈빛이 매우 어두웠다. 이에 공주는 덜컥 겁이 났다. 한번도 아버지에게서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공주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바람에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냈다.

“네가 널 슬프게 했나 보구나.”

“그러니까 이런 얘기 그만 해요.”

공주가 울며 부탁했다.

“아버지 절대로 돌아가시면 안돼요.”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내 말에 대답해 주겠니.”

“아버지, 아버지를 거절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면 알겠다고 대답하거라.”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왕국을 다스려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려운 게 아니란다. 고문관들이 늘 너와 함께 할거야. 네가 가장 명심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다. 너 자신을 믿어라. 부족한 네 경험과 순진함이 널 훌륭한 통치자로 만들어 줄 거야. 넌 진실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약속해다오.”

공주는 왕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이 모든 게 왕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공주는 어서 빨리 이 논의를 끝내고 싶었다.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기분을 전환시켜드리고 싶었다.

“알겠어요, 약속 드릴게요. 이제 기분이 좀 나아지셨어요?”

왕은 몸을 뒤로 젖혔다. 공주의 눈에 크게 안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비쳐졌다.

“그렇단다, 고맙구나.”

“다행이에요, 그럼 이제 다른 얘기 해도 될까요? 진짜 일어날만한 일에 대해서요?”

왕은 몸을 뒤로하고 크게 웃어댔다. 마음이 훨씬 가벼워 보였다.

“내가 이래서 우리 딸을 사랑하지. 늘 행복하거든. 늘 날 웃게 해주지.”

왕은 공주를 유심히 살폈다. 공주는 왕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보다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만나는 남자가 있는 게냐?”

공주는 얼굴을 붉혔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왕을 등지고 섰다.

“죄송해요, 아버지. 그렇지만 제 사생활인걸요.”

“네가 왕비가 되면 더 이상 사생활로 치부되지 않는단다. 그렇지만 캐묻진 않으마. 어쨌든 네 어머니께서 너의 알현을 원하신다. 네게 그다지 너그럽지 않을 모양이다. 이만 가보도록 허락해야겠구나. 마음의 준비를 해두거라.”

긴장한 공주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이곳이 싫었다. 이 곳만 아니라면 어디든지 상관 없었다. 소박한 마을에서 소박한 농장을 일구며 토르와 함께 소박하게 살고 싶었다. 모든걸 벗어버리고 싶었다. 공주를 조종하려는 모든 세력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어깨위로 다정한 손길이 느껴져 돌아보니 왕이 웃으며 공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어머니가 혹독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왕비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난 항상 네 편인걸 명심하거라. 사랑에 관한 한 누구든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해.”

공주는 팔을 뻗어 왕을 꼭 끌어안았다.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아닌 부친만을 사랑했다. 공주의 전부를 걸고 부디 아버지만은 백사의 저주와는 무관하길 기도했다.

*

공주는 왕비의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 또다시 복도를 걸었고 방향을 틀어 다시 복도를 지나 색색으로 물들인 유리창문을 옆에 두고 걸어갔다. 왕비의 소환이 영 내키지 않았다. 왕비가 마음대로 자신을 조종하려는 게 싫었다. 여러모로 왕국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인물은 왕비였다. 왕비는 다방면으로 왕보다 강했다. 본인의 입지를 굳혔고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물론 왕국은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맥길 왕은 늘 강인한 모습으로 역대 가장 현명한 왕의 면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왕이 궁전으로 돌아오면, 남들의 이목을 피해 늘 왕비의 의견을 구했다. 왕비의 총명함은 왕을 뛰어 넘었다. 더욱 냉정했고, 계산적이었고, 강했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치 단단한 바위 같았다. 게다가 가족문제에 관한 한 철저한 철권통치를 지향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특히 그것이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이루고야 말았다.

현재 왕비의 무자비함은 공주를 향해 있었다. 공주 또한 왕비를 만나는데 대비해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토르 일로 공주를 소환하는 것이 분명했고 혹시라도 토르와 함께 있는걸 들켰을까 염려했다. 공주는 어찌됐든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라 결심했다. 만약 왕실에서 쫓겨난다면 그에 수긍하기로 했다. 왕비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공주를 지하감옥에 가두고도 남았다.

왕비의 회의실 앞에 도착하자 시녀들이 참나무 재질의 나무 문을 열고 몸을 비켜섰다. 공주가 안으로 들어섰고 시녀들은 곧장 회의실 문을 닫았다.

왕비의 회의실은 왕의 회의실과 비교해 규모가 훨씬 작은 대신 아늑했다. 바닥에는 커다란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찻잔 세트와 게임보드가 벽난로 옆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우아한 멋을 풍기는 노란 벨벳 의자 세트가 있었다. 왕비는 이들 의자 중 하나에 앉아 있었다. 공주가 오는 것을 알고도 등을 돌린 자세였다. 벽난로를 바라보며 차를 음미한 뒤 게임보드 위에 조각 하나를 움직였다. 왕비의 뒤로 시녀 두 명이 서있었다. 한 명은 왕비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고 다른 시녀는 왕비가 입은 드레스의 허리끈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들어오렴, 얘야.”

왕비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왕비가 시녀들을 물리지 않고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때마다 공주는 불쾌했다. 조금 전 왕이 그랬던 것처럼 왕비와 둘이서만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는 왕비가 공주의 사생활과 체면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비는 이를 무시했다. 공주는 힘의 논리로 자신을 상대하려는 왕비의 의중을 읽어냈다. 주변에 시녀들을 둠으로써 공주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공주는 회의실을 가로 질러 왕비의 맞은편 노란색 벨벳 의자에 앉았다. 벽난로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다. 왕비가 미리 계산한 또 하나의 계책이었다. 상대방을 따뜻한 벽난로 가까이에 앉혀 무방비상태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왕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게임보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상아조각 하나를 복잡한 미로위로 밀어 넣었다.

“네 차례구나.”

왕비가 입을 열었다.

공주는 게임보드로 시선을 옮겼다. 왕비가 아직도 이 게임을 끝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랬다. 갈색 조각으로 왕비를 상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은 왕비와 게임을 하지 않았다. 왕비는 장기의 고수였다. 그러나 공주는 왕비보다 장기를 잘 뒀다. 왕비는 결코 패배를 용납하지 않았다. 분명 지난 몇 주간 게임을 분석해 완벽한 한 수를 생각해낸 게 분명했다. 이제 공주가 나타났고 왕비는 공주를 다시 게임에 참여토록 했다.

왕비와 달리 공주는 게임을 분석할 필요가 없었다. 공주는 장기판을 힐끔 보고 머릿속으로 완벽한 수를 찾았다. 공주는 팔을 뻗어 갈색 말을 장기판 가장자리로 옮겼다. 이로써 왕비는 어느 말을 움직이든 질 수 밖에 없었다.

왕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장기판을 바라봤다. 단지 눈썹을 살짝 깜빡였을 뿐이었다. 덕분에 공주는 왕비가 당황한 걸 눈치챘다. 공주는 분명 왕비보다 똑똑했다. 그러나 왕비에게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왕비는 여전히 공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장기판을 주시한 채 목을 가다듬었다.

“그 평민 아이와 벌이는 너의 무모한 장난을 모두 알고 있단다. 넌 내게 반항했어.”

왕비가 고개를 들어 공주를 바라봤다.

“왜지?”

공주는 긴장감에 깊은 숨을 들이켰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그럴듯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절대로 굴복할 수 없었다.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제 사생활은 어머니께서 신경 쓰실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내가 신경을 써야 할 문제 같은데. 네 사생활은 왕권과 연관됐다. 우리 가족의 운명과 링 대륙과도 연관됐지. 네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네 사생활은 그 자체로써 하나의 정치야. 넌 평민이 아니잖니. 네 삶에 사생활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내게 감출 수 있는 네 사생활도 존재하지 않아.”

왕비의 말투가 무정하고 차가웠다. 공주는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줄 곳 억울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왕비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는 것뿐이었다.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왕비는 목을 가다듬었다.

“네가 내 말을 거역했으니, 너를 대신해서 내가 결정을 내려야겠구나. 다시는 그 아이를 만나지 말거라. 만약 이를 어기면 그 아이는 왕의 부대에서 제명되고, 왕실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추방될 거야. 그리고 형구도 씌울 거다. 그 아이의 가족까지 모두 다. 불명예로 쫓겨난 신세로 전락하는 거야. 그리고 너도 다신 그 아이 소식을 들을 수 없을 거다.”

왕비는 노여움에 아랫입술을 바르르 덜며 공주를 바라봤다.

“알아 듣겠니?”

공주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으로 왕비가 얼마나 악랄해질 수 있는지 가늠하게 된 순간이었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왕비가 미웠다. 시녀들이 초조한 눈빛으로 공주를 힐끔거렸다. 치욕이 따로 없었다.

공주가 대답도 꺼내기 전에 왕비가 말을 이었다.

“더 나아가, 네 무책임한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네게 합당한 짝을 정해줘야겠다. 다음 달 첫째 날에 알톤과 결혼할거라. 당장 결혼 준비를 하는 게 좋겠구나. 유부녀가 될 각오를 단단히 하렴. 이상이다.”

왕비의 말투는 오만했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뱉어버린 듯 왕비는 아무렇지 않게 장기판에 시선을 돌렸다.

공주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화가 치밀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죠.”

공주의 분노가 서서히 고조됐다.

“제가 어머니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보이세요? 정말로 제가 누구든지 어머니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거라 생각하세요?”

“생각하는 게 아니다. 결과를 알고 있는 거지. 넌 내 딸이니 내 말을 듣거라. 그리고 내가 결혼하라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 거다.”

“아니요, 그렇게 안 해요! 그리고 어머니 마음대로 그렇게 못하실 거예요! 폐하께서 어머니가 절 마음대로 하지 못 할거라 하셨어요!”

“정략결혼 결정권은 왕국의 모든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권한이다. 그리고 왕과 왕비라면 더욱 그러하지. 폐하의 태도가 나와 다르다고 해도 너도 알고 있잖니, 폐하께서는 언제나 내 뜻에 수긍해 주시는 걸. 내 뜻대로 될 거다.”

왕비는 공주를 노려봤다.

“이제 알겠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렴. 네 결혼은 이미 진행 중이야. 나도 이제 막을 수 없구나. 너도 준비하도록 해.”

“그렇겐 안 할 거예요. 절대요. 제게 계속 이런 말씀을 하시면 더 이상 어머니와 대화하지 않겠어요.”

왕비는 고개를 들어 공주를 봤다. 차갑고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나와 절대 말을 안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난 네 엄마지 친구가 아니야. 그리고 여전히 난 너의 여왕이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해도 괜찮다. 결국엔 내가 하란 대로 할거고, 난 멀리서 내가 정해준 인생을 사는 네 모습을 지켜볼 거야.”

왕비는 다시 장기에 집중했다.

“이제 가보렴.”

왕비는 마치 하녀에게 하듯 손짓으로 공주를 물렸다.

분노로 가득 찬 공주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기판 앞으로 세 걸음 걸어가 양 손으로 장기판을 던져버렸다. 상아 조각들이 날아가고 커다란 장기판이 넘어져 산산조각 났다.

왕비는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머니를 증오해요.”

공주는 달아오른 얼굴로 뒤로 돌아 회의실을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쫓아와 붙잡는 시녀들의 손을 물리치고 스스로의 의지로 걸어나갔다. 다시는 왕비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제 26장

토르는 몇 시간 동안 구불구불한 숲 속 산책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걷는 내내 그웬 공주 생각뿐이었다. 머릿속이 온통 공주로 가득했다. 함께 한 시간은 마법 같았고 기대 이상이었다. 덕분에 공주의 마음을 의심하며 불안해할 필요가 없어졌다. 완벽한 하루였다. 다만 불청객의 등장으로 서둘러 헤어진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실존 여부도 불분명할 정도로 희귀한 백사는 불행의 전조였다. 물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토르는 옆에서 졸졸 쫓아오는 새끼 표범을 내려다봤다. 늘 그렇듯 크론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만약 크론이 그 순간 함께 있지 않았다면, 그래서 두 사람을 구해주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해봤다. 지금쯤 두 사람은 이미 죽어있었을까? 토르는 크론에게 평생의 빚을 졌다. 크론이야 말로 일생을 함께할 든든한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여전히 백사가 마음에 걸렸다. 보통 희귀한 뱀이 아닐뿐더러 백사의 서식지가 왕국 내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왔단 말인가? 왜 하필이면 그 순간 토르와 공주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기이한 일이었고 분명 무언의 암시였다. 그웬 공주와 마찬가지로 토르 또한 백사를 흉조로 여겼다. 죽음의 전조. 허나 그 대상이 누구란 말인가?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며 불안한 생각들을 떨치기 위해 애셨지만 소용없었다. 백사의 모습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토르를 괴롭혔다. 막사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훈련이 없는 날이었기에 대신해서 숲 속 산책길을 반복해 돌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백사의 등장은 다름아닌 다가올 흉조에 신속히 대비하라는 경종이 분명했다.

갑작스럽게 끝난 공주와의 데이트에 토르는 더욱 속이 상했다. 두 사람은 숲에서 나오자마자 작별의 인사도 없이 서둘러 헤어졌다. 공주의 마음 속이 산란해 보였다. 백사가 원인일 거라 짐작했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공주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공주가 다시 마음을 바꾼 걸까? 토르가 혹시 뭘 잘못한 걸까?

생각만으로도 토르의 가슴이 찢어졌다. 뭘 해야 할지 몰라 토르로서는 몇 시간 내내 숲 속을 배회하는 것뿐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통찰하고 죽음의 전조를 해석해 줄 수 있는 누군가와의 대화가 절실했다.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토르의 머릿속에 아르곤이 떠올랐다. 아르곤이야 말로 적임자였다. 그라면 토르에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걱정을 덜어줄 게 분명했다.

먼 곳을 내다봤다. 가장 동떨어진 능선의 북쪽 끝에서 보니 왕실 도시가 한눈에 펼쳐졌다. 가까이엔 교차로가 있었다. 북쪽 외각 볼더 평야에 아르곤이 홀로 지내는 오두막이 있었다. 이곳에서 도시 반대편으로 왼쪽 길을 따라가면 아르곤의 오두막이 나온다. 토르는 오두막을 향해 길을 나섰다.

긴 여정인데다 설사 그곳에 도착한다 해도 아르곤을 만날 거란 보장이 없었다. 허나 시도라도 해야 했다. 답을 얻기 전까지 토르는 한시도 불길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좀더 속도를 높여 평야를 향해 힘차게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오후가 됐다. 햇살이 찬란하게 내리는 아름다운 여름날이었다. 크론은 토르 옆을 따라 뛰었다. 때때로 멈춰서 다람쥐를 공격했고 의기양양하게 입에 물기도 했다.

초원이 사라지고 돌과 바위가 가득한 황량한 땅이 이어지자 길이 급격히 가팔라지고 굴곡도 심해졌다. 얼마 가지 않았는데 길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나무도 자라지 않는 높은 곳까지 올라오니 기온이 뚝 떨어졌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돌과 바위가 넘쳐났다. 오싹한 곳이었다. 저 멀리까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돌과 흙과 바위가 전부였다. 황무지를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내 길이 끊겨버린 까닭에 토르는 자갈밭 위를 걸어갔다.

크론이 옆에서 울어댔다. 이들을 둘러싼 주변 공기에 소름이 돋았다. 사악한 기운은 아니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짙게 드리워진 영적인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을 무렵 저 멀리 언덕 위에 돌로 지은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링 대륙의 형상을 띤 완벽한 원형이었다. 납작한 오두막은 검은 돌로 지어졌다. 창문도 없었고, 손잡이 없는 아치형 출입문 단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과연 이토록 황량한 곳에 마법사가 머무른단 말인가? 허락도 없이 찾아와 노여움을 사는 건 아닐까?

잠깐의 망설임 끝에 원래대로 발길을 재촉했다. 문 앞에 서자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을 두드리려 손을 뻗는 내내 전율이 느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문이 조금 열렸다. 틈 사이로 비춰지는 내부는 온통 검은색이었고 혹시 바람에 문이 밀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 사람이 살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두웠다.

토르는 다시 손을 뻗어 조심스레 문을 밀고 고개를 넣어 안을 살폈다.

“계신가요?”

문을 좀 더 밀었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제외하면 내부는 빛 하나 없는 암흑이었다.

“계신가요? 마법사님?”

좀 더 큰 소리로 외쳤다.

크론이 토르 옆에서 울부짖었다. 아르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때를 잘 못 맞춰 온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토르는 계속 아르곤을 찾아봤다. 두 발자국 안으로 들어가니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돌아보니 저 멀리 벽면에 아르곤이 서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토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불청객이로군.”

“용서하세요. 마음대로 들어오려던 건 아니었어요.”

토르는 주변을 살폈고 점차 어둠에 익숙해져 시야가 밝아졌다. 돌로 된 벽면 가까이 원형으로 배치된 양초가 보였다. 조명이라고는 천장에 뚫린 작은 원형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빛 한줄기가 전부였다. 삭막하면서도 압도적이고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이곳에 들어와본 사람은 거의 없단다. 물론 자네도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했겠지. 저 문은 열려야 할 때만 열린단다.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자들은 세상 그 무엇을 이용해도 저 문을 열 수 없지.”

토르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자신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는 아르곤이 신기했다. 아르곤과 관련한 모든 일은 그저 신비할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걸 봤습니다.”

토르는 모든 걸 다 토로하고 아르곤의 의견을 구해야 했다.

“뱀을 봤어요. 백사요. 우리 둘 다 물릴뻔했는데 제 표범 크론이 저희를 구해줬어요.”

“우리라니?”

너무 구체적으로 얘기한 것 같아 토르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혼자 있었던 게 아니었거든요.”

“누구와 있었던 거지?”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망설여진 토르는 혀를 살짝 깨물었다. 어찌됐든 아르곤은 폐하와 친분이 두텁다. 폐하께 모든걸 말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왜 백사와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절대적으로 연관됐지. 그게 백사가 나타난 이유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토르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아요.”

“단순히 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게 전부 너와 연관된 건 아니지. 다른 사람과 연관될 수도 있단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아르곤을 살펴보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공주가 사악한 운명에 휩싸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토르가 도울 수 있을까?

“운명을 바꿀 수 있나요?”

아르곤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었다.

“물론이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수세기 동안 받아온 질문이란다. 운명이 바뀔 수 있냐고?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 의지라는 게 있지. 개인의 선택이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단다. 정해진 운명과 자유의지가 나란히 한 사람의 인생 속에 함께하는 게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실은 그렇게 이뤄져 있단다. 운명과 자유의지가 절충되어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이지. 운명은 절대 꺾이지 않는다. 다만 구부러지거나 더한 경우 바뀔 수 있지. 대단한 희생과 강력한 자유의지가 맞물린다면 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단다. 거의 모두가 운명을 개척하기보단 수긍하며 살아가지.

“그렇다면 왜 백사를 통해 경고를 하는 거죠? 어차피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면요?”

아르곤이 몸을 돌려 미소 지었다.

“이해가 빠른 건 인정해야겠구나. 대부분 자기보호 차원에서 전조를 보는 거란다. 마음의 준비를 갖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미래의 운명을 암시해주는 거지. 가끔씩은, 드문 경우지만 결정된 운명을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조가 대신하기도 한단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단다.”

“정말로 백사가 죽음을 암시하나요?”

아르곤은 토르를 살펴봤다.

“그렇단다, 빗나간 적이 없지.”

아르곤의 대답에 두려움에 휩싸인 토르의 심장이 요동쳤다. 예상과 달리 직설적이었던 아르곤의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백사를 봤어요. 그렇지만 누가 죽는 건지 알 길이 없어요. 또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렇게 안돼요. 백사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왜죠?”

아르곤은 오랫동안 토르의 얼굴을 읽어낸 후 한숨을 쉬었다.

“그건 바로 누구의 죽음이든 네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 죽음이 네 운명과 관련 있어.”

토르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아르곤의 대답을 들을수록 궁금증만 쌓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타당하지 않아요. 누가 죽는지 저도 알아야겠어요. 미리 경고를 해주고 싶어요!”

아르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려줄 순 없단다. 그리고 네가 알게 된다 해도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다. 죽음은 언제나 목적을 달성한다. 설령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대체 왜 백사를 본 거죠?”

토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왜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 거죠?”

아르곤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눈빛이 어두운 방안을 모두 밝힐 만큼 격렬하게 빛났고 이에 토르는 크게 당황했다. 강렬한 태양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토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르곤은 토르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길에 토르의 몸에도 한기가 서렸다.

“아직 어리구나. 아직도 배우는 중이야. 너무 깊게 느끼고 있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지. 그러나 반대로 무자비한 저주가 될 수도 있단다. 운명에 수긍해 사는 자들은 운명을 인식하지 못한단다. 운명을 인식하고 예지하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 될 수 있지. 넌 아직도 네 능력을 이해 못하고 있단다. 그렇지만 곧 이해 할거야. 언젠가 말이다. 네 출신을 알게 되는 순간.”

“제가 어디서 왔는데요?”

토르는 혼란스러웠다.

“네 어머니의 고향. 여기서 아주 먼 곳이지. 캐니언 협곡 너머, 미개왕국 와일즈 너머에 있는 곳. 하늘 가까운 곳에 궁전이 하나 있단다. 절벽 위에 자리잡아 그곳에 가기 위해선 구불구불한 돌길을 쭉 따라가야 하지. 마치 하늘에 오르는 것 같은 신비한 길이란다. 엄청난 힘이 내제된 곳이지. 바로 그곳이 네가 태어난 곳이야. 네가 직접 가 보기 전까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다. 그곳에 가게 된다면 네 궁금증이 모두 해결되겠지.”

토르는 눈을 깜빡였다. 눈을 뜨는 순간 놀랍게도 아르곤의 오두막 밖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떻게 갑자기 이곳에 서있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갈 밭 위로 매서운 바람이 불었고 강렬한 땡볕에 절로 실눈이 떠졌다. 토르 옆에는 크론이 칭얼거리고 있었다.

토르는 다시 오두막 앞으로 걸어가 사력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돌아오는 건 고요한 침묵뿐이었다.

“아르곤님!”

휘파람 같은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다시 한번 문을 열어봤다. 온몸으로 문을 밀어붙여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도 못한 채 토르는 그 자리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날이 많이 어두워졌고 결국 더 이상 있어봐야 소용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 경사진 자갈밭을 걸어내려 갔다.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지만 한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막을 수 없는 누군가의 죽음이 예정됐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황폐한 땅이 펼쳐졌고 걷는 순간 발목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살펴보니 바닥에 두꺼운 안개가 쌓이고 있었다. 안개는 계속 쌓여 순식간에 올라왔다. 토르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고 크론 또한 울부짖었다.

걸음을 재촉해 최대한 빨리 숲에 도착하려 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뒤덮인 안개 덕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어찌된 일인지 팔다리가 천근만근이었고 하늘이 주문에 걸린 듯 어둡게 변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더 이상 걸음을 뗄 수도 없었다. 안개 속에서 그대로 바닥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주저 앉았다. 눈을 떠보려는 시도도, 몸을 움직여보려는 노력도 모두 허사였다. 얼마 후 토르는 잠이 들었다.

*

토르는 산 정상에서 왕국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봤다. 토르의 시야야 닿는 곳까지 아름다운 여름날의 왕궁과, 궁전, 요새, 정원, 나무, 언덕들이 펼쳐졌다. 나무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했다. 아름다운 음악과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눈 앞의 광경을 주시하며 천천히 몸을 돌리는 순간 푸른 잔디가 흑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과일들이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나무들은 차츰 말라붙어 모습을 감췄고 만발했던 꽃들은 그대로 시들었다. 놀랍게도 건물들이 하나씩 차례로 무너졌고 끝내는 왕국 전체가 돌밖에 없는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발 밑을 보니 어느 순간 나타난 커다란 백사가 토르의 두 발 위로 기어 올랐다. 백사가 무릎을 지나 허리를 감고 팔을 묶어놓는 순간까지 토르는 무방비 상태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백사는 토르와 얼굴을 마주하고 오랫동안 토르의 눈을 주시하더니 스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토르의 뺨에 닿을 듯이 혀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입을 쫙 벌여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고 앞으로 머리를 쭉 빼 토르의 얼굴을 집어 삼켰다.

토르는 비명을 질렀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궁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텅텅 빈 곳이었다. 왕좌가 있던 자리도 휑하니 비었다. 바닥에는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운명의 검이 누워 있었다. 창문은 모두 산산조각이 났고 형형색색 물들여진 색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쌓여 있었다.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곧장 몸을 돌려 음악소리를 따라 황폐한 방을 지나 또다시 황폐한 방을 지났다. 마침내 눈 앞에 높이가 30미터는 돼 보이는 커다란 문이 나타났고 토르는 사력을 다해 문을 열었다.

토르가 들어선 곳은 왕실 연회장이었다. 눈 앞에 양 옆으로 끝도 없이 긴 연회 테이블 두 개가 연회실 끝까지 펼쳐졌다. 그 위로는 산해진미가 넘치도록 쌓여 있었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연회실 가장 안쪽 끝에 한 남자가 있었다. 다름아닌 맥길 왕이었다. 왕은 왕좌에 앉아 토르를 주시했다. 그러나 토르는 왕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왕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테이블 사이로 걸어 들어가 연회실을 가로질렀다. 토르가 발걸음을 옮기자 양쪽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이 변하기 시작했고 지나간 자리의 산해진미가 썩어 파리까지 꼬였다. 토르 주변으로 온통 파리떼들이 윙윙거리며 음식을 뜯어먹었다.

좀 더 속도를 냈다. 이제 3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왕이 있었다. 순간 시중 하나가 옆방에서 와인이 든 커다란 황금술잔을 들고 들어왔다. 황금으로 만든 술잔에 루비와 사파이어를 두른 남다른 술잔이었다. 왕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토르는 시중이 하얀 가루를 술잔에 넣는 모습을 포착됐다. 독약이었다.

시중은 왕에게 술잔을 내밀었고 맥길 왕은 손을 뻗어 두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안돼요!”

토르가 비명을 질렀다.

왕이 든 술잔을 쳐내기 위해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었다. 왕은 와인을 들이켰다. 왕의 뺨을 타고 와인이 흘렀고 가슴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돌려 토르를 바라보는 왕의 동공이 열려있었다. 왕은 양 손을 올려 목을 쥐었다. 끝내 왕좌에서 떨어져 무릎을 꿇고 구역질을 하다 돌 바닥위로 쿵 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머리에서 벗겨진 왕관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멀리 굴러갔다.

쓰러진 그대로 미동도 없던 왕은 눈을 뜬 채 사망했다.

에스토펠레스가 날아와 죽은 왕의 머리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토르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울었다. 그 소리가 너무나 강렬해 토르의 등줄기에 한기가 느껴졌다.

“안돼!”

토르는 울부짖었다.

*

비명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토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쉬었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며 위치를 확인했다. 여전히 오두막 가까이에 있는 산 바닥이었다. 잠깐 잠이 들었던 게 분명했다. 안개는 말끔히 사라졌고 하늘을 보니 어느새 동틀 녘이었다. 저 멀리 핏빛처럼 붉은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며 새벽을 밝혔다. 토르 옆에서 칭얼거리던 크론이 토르의 무릎 위로 올라가 토르의 얼굴을 핥았다.

토르는 가쁜 숨을 고르며 한 손으로 크론을 안아 올렸다. 잠이 들었던 건지 깨어 있었던 건지 헷갈렸다.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한걸음 떨어진 바위 위에 에스토펠레스가 앉아있었다. 커다란 매는 토르와 눈을 맞추고 계속해서 날카롭게 울었다.

그 소리에 토르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꿈에서 들었던 바로 그 울음이었고 이를 확인한 순간 방금 꾼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걸 굳게 확신했다.

폐하께서 독살을 당하시는 게 분명했다.

새벽빛이 밝아질 무렵 토르는 서둘러 일어나 왕궁을 향해 전속력으로 산을 내려갔다. 왕을 만나야 했다. 위험을 알려야 했다.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왕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야 했다.

*

도개교를 질주해 외각 성문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병사 두 명이 토르를 알아봤다. 덕분에 멈추지 않고 궁 안으로 들어섰고 쉬지 않고 달렸다. 크론도 토르와 함께 뛰었다.

왕실의 안뜰을 가로질러 분수들을 지나치고, 왕이 거주하는 궁전의 성문 앞에 도착했다. 네 병의 병사들이 토르 앞을 막아 섰다.

토르는 숨을 헐떡이며 질주를 멈췄다.

“무슨 용무지?”

병사 한 명이 물었다.

“이해 못하시겠지만 저 좀 들여보내주세요. 폐하를 뵈어야 합니다.”

병사들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자기네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왕의 부대 소속 토르그린입니다. 꼭 들여보내주셔야 합니다.”

“저 아이를 알고 있네, 우리와 같은 폐하의 병사야.”

병사 한 명이 다른 병사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우두머리 병사가 앞으로 나섰다.

“네가 폐하께 무슨 볼일이지?”

여전히 숨을 고르며 토르가 대답했다.

“매우 급한 용무입니다. 꼭 한번은 뵈어야 합니다.”

“음, 폐하께서는 널 보고 싶어하시지 않으실 거다. 약속도 없이 찾아왔잖아. 폐하께서 자리에 계시지 않아. 정무를 돌보시기 위해 이미 몇 시간 전에 왕실 마차를 타고 떠나셨어. 오늘 저녁 열리는 왕실 축제 전까지는 돌아오시지 않을 거다.”

“축제요?”

토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꿈속의 축제 테이블이 생각났다. 끔직하게도 모든 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 축제. 부대원이면 너도 그곳에 참석하겠지. 아무튼 폐하께서는 이미 떠나셨고 네가 폐하를 뵐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오늘 저녁 축제나 참석해. 부대원들과 함께.”

“그렇지만 꼭 전해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요! 축제 전에 해야 해요!”

토르가 완고하게 주장했다.

“원한다면 내게 말해라. 그렇다고 해도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전해드릴 수 없다는 건 명심해.”

병사에게 그런 얘기를 할 순 없었다. 아마 토르를 정신병자쯤으로 치부할게 분명했다. 오늘밤 축제가 시작하기 전 직접 폐하에게 전해야 했다. 이제 토르가 간절히 소망하는 건 토르의 메시지가 너무 늦지 않게 전해지는 것뿐이었다.

제 27장

새벽이 지날 무렵 서둘러 막사에 도착하니 운 좋게도 이제 막 훈련이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토르는 여전히 크론과 함께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랐지만 곧장 훈련을 받기 위해 이제 막 줄을 서기 시작한 부대원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줄을 맞춰 서며 숨을 골랐다. 마음속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했다. 오늘 저녁 축제까지 왕에게 위험을 알릴 유일한 기회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느라 훈련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왕에게 미리 위험을 알려주라는 뜻에서 토르 앞에 백사가 나타난 게 분명했다. 왕국의 운명은 이제 전적으로 토르에게 달렸다.

토르는 기진맥진 한 상태로 리스왕자와 오코너에게 달려갔고 다 같이 줄을 맞춰 섰다.

“어젯밤 어디 있었어?”

리스 왕자가 물었다.

뭐라 대답은 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토르도 어젯밤 자신의 거처가 불분명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아르곤 집 근처 산 위에서 깜빡 졸았다고 해야 할까? 토르 스스로도 믿기 힘든 대답이었다.

“잘 모르겠어.”

“모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오코너가 물어봤다.

“길을 잃었었어.”

“잃어?”

“길을 잃고서도 다시 잘 찾아왔다니 다행이야.”

리스 왕자가 안심했다.

“오늘 훈련에 늦었으면 아마 부대에서 제명됐을 거야. 반갑다. 어제 너 없으니까 생각나더라.”

엘덴이 다가와 육중한 손으로 토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토르는 여전히 캐니언 협곡 순찰 이후 달라진 엘덴의 태도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누나랑은 어떻게 됐어?”

얼굴이 붉어진 토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만나긴 했어?”

“네, 만났죠. 정말 즐거웠어요. 급하게 헤어지긴 했지만요.”

“음, 오늘 누나 실컷 볼 수 있을 거야. 멋 좀 내봐. 저녁에 축제잖아.”

리스 왕자가 콜크 사령관과 대원들을 앞에 두고 줄을 서며 말을 이었다.

토르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토르는 다시 한번 꿈을 상기했다. 눈 앞에서 운명이 춤을 추고 있는데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용!”

콜크 사령관이 외치며 서서히 부대원들 앞을 걸었다.

모든 부대원이 침묵했고 토르도 이들과 같이 경직된 자세로 서있었다.

사령관은 이리저리 줄을 가로지르며 부대원들을 하나씩 관찰했다.

“어제 충분히 놀았겠지. 이젠 훈련에 임할 시간이다. 오늘은 고대부터 내려온 도랑파기 기술을 배울 차례다.”

일제히 불평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시끄럽다!”

부대원들은 다시 침묵했다.

“도랑을 판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중요함은 간과할 수 없다. 너희들도 언젠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황야에 나가 왕국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할거다. 깜깜한 어둠이 되면 발가락에 감각도 없어질 만큼 추위가 매섭게 닥쳐오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선 뭐든지 하게 될 거다. 또는 전장에 나가 적군의 화살세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곳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도랑을 파야 하는 이유는 수백 가지가 넘도록 많다. 앞으로는 도랑을 자주 접하게 될 거다. 오늘, 너희들은 두 손에 피가 나고 굳은 살이 박힐 때까지, 허리가 부러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가지 하루 종일 도랑을 팔 거다. 그리고 나면 언젠가 전장에 나설 때쯤 도랑 파는 건 우습게 여겨질 거다.”

“따라와라!”

부대원들은 제각각 불평을 늘어 놓으며 두 줄로 사령관을 따라 훈련장을 행군하기 시작했다.

“잘됐다, 도랑파기야 말로 정말 하루 종일 해보고 싶었던 거야.”

엘덴이 말했다.

“최악이 될 수도 있어, 오늘 비 올 확률이 커.”

오코너가 걱정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머리 위 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확률일 뿐이잖아.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마.”

리스 왕자가 대답했다.

“토르!”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돌아보니 사령관이 토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토르는 사령관에게 달려갔다.

“네, 주군.”

“네 후견인이 널 소환했다. 왕궁에 가서 에레크 명장에게 보고해라. 오늘 훈련을 빠지다니 운이 좋군. 대부분의 충실한 후견부대원들이 그러하듯 너도 오늘은 네 후견인을 보좌한다. 내일 돌아오면 넌 혼자서 도랑파기 훈련에 임한다. 가봐!”

토르는 뒤를 돌아 부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대원들의 얼굴을 마주한 뒤 다시 궁을 향해 뛰었다. 에레크 명장은 왜 토르를 호출한 것인가? 왕과 관련된 것인가?

*

왕궁으로 뛰어간 토르는 지금껏 한번도 가본적 없는 실버 부대 막사로 길을 꺾었다. 실버 대원들의 막사는 왕의 부대 막사와 비교해 규모가 훨씬 컸고 건물은 두 배나 됐다. 청동으로 외관을 장식한 건물 밑으로는 새로 돌을 깐 길이 나있었다. 실버 대원들의 막사에 가기 위해선 커다란 아치형 입구를 통과해야 했다. 그곳은 12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입구 앞으로 길이 넓게 펼쳐진 길은 들판과 울타리로 둘러싸인 복잡한 석조 건물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또 다른 수십 명의 병사들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인상적인 장관이었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들판이 더 잘 보였다. 병사들은 이미 저 멀리서 접근하는 토르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와 창을 교차해 길을 막았다. 그러고는 토르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통행을 차단한 채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무슨 용무지?”

“임무를 수행하려 왔습니다. 전 에레크 명장님의 후견부대원입니다.”

병사들이 신중하게 눈빛을 교환했고 다른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뒤로 물러서 무기를 거뒀다. 그러자 아주 천천히 문이 열리며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금속 못이 올라갔다. 문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두께가 반 미터는 족히 돼 보였고 이곳이 왕궁보다 더 요새화된 것 같았다.

“오른쪽 두 번째 건물로 가거라. 마구간에 가면 명장님께서 계실 거다.”

토르는 길을 따라 안뜰을 거쳐 석조건물을 지났다. 보이는 모든 것이 반짝거렸고, 깨끗했고,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강인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구간을 찾은 토르는 눈 앞의 광경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덩치가 크고 아름다운 수십 마리의 말들이 건물 밖에 줄지어 묶여 있었다. 대부분의 말들은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말들에게서 광채가 흘렀다. 이곳의 있는 건 그게 무엇이건 전부 크기가 남달랐고 웅장했다.

무장한 실버들이 여기 저기서 말을 달렸다. 안뜰을 가로질러 곳곳에 난 출입문을 오가며 막사 밖으로 나가거나 내부로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정신 없는 곳이었고 전쟁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이곳은 훈련이 아닌 생사의 갈림길을 나누는 전쟁을 위한 공간이었다.

토르는 작은 원형 입구로 들어서 어두운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마구간을 하나씩 지나며 에레크 명장을 찾아 다녔다. 마지막 마구간까지 찾아봤지만 명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명장님을 찾고 있는가?”

병사가 물었다.

토르는 뒤로 돌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군. 저는 그분의 후견부대원입니다.”

“늦었군. 이미 말을 길들이려 나가셨다. 빨리 가봐.”

복도를 나온 토르는 마구간을 벗어나 들판으로 뛰어갔다. 그곳에 에레크 명장이 있었다. 백마 한 필과 몸집이 크고 윤이 나는 씩씩한 흑색 종마 한 필이 함께 있었다. 토르의 등장에 흑마가 흥흥거렸고 이에 명장이 뒤를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주군, 최대한 빨리 온 겁니다. 늦으려던 건 아니에요.”

토르는 가쁜 숨을 참으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딱 맞춰 왔구나.”

명장이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라닌하고 인사 나누렴.”

명장이 흑마를 가리켰다.”

라닌은 대답이라도 하듯 껑충거리며 콧방귀를 겼다. 토르가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어 코를 쓰다듬었고, 이에 라닌은 부드럽게 칭얼거렸다.

“내 장거리 여행용 말이란다. 너도 곧 알게 되겠지만 실버 전사들은 말을 여러 필 거느리고 있단다. 마상경기용, 전쟁용, 혼자서 떠나는 긴 여행용 등이 있단다. 이 녀석은 앞으로 네가 가장 친하게 지내야 할 녀석이다. 라닌이 널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잘됐어.”

라닌은 앞으로 다가와 토르의 손바닥에 코를 비볐다. 눈 앞에 말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에 토르는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라닌의 눈동자에 영민함이 어려 있었다. 모든걸 다 이해하는 듯한 라닌이 살짝 섬뜩하기도 했다.

순간 토르는 방금 전 명장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긴 여행이라고 하셨나요, 주군?”

명장은 안창을 조이다 말고 몸을 돌려 토르와 눈을 맞췄다.

“오늘이 내 생일이란다. 이제 스물 다섯이 됐어. 좀 특별한 날이지. 선택일이라고 들어 봤니?”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대충이요, 주군, 사람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은 게 전부에요.”

“링 대륙의 전사들은 대를 이어 전사를 배출하지. 전사들은 스물 다섯이 되기 전까지 신부를 정해야 해. 정하지 못하면 법에 따라 1년 동안 신부를 찾아 떠나야 하고 1년이 지나기 전에 신부를 데리고 돌아와야 한단다. 만약 그때도 신부를 찾지 못하면 폐하께서 대신 신부를 정해주시지. 우리의 선택권은 박탈당하는 거야. 그래서 오늘 난 신부를 찾아 긴 여정에 나선단다.”

말문이 막힌 토르는 그저 명장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주군, 떠나신다는 거죠? 일년 동안이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세상이 토르를 중심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에서야 비로소 토르는 자신이 명장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깨달았다. 명장은 토르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토르는 명장을 친부보다 더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럼 제 후원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리고, 어디로 가시는 거죠?”

명장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비롯해 그 동안 얼마나 명장을 의지했는지 토르는 다시금 깨달았다. 명장이 떠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에레크 명장은 속 편하게 웃을 뿐이었다.

“무슨 질문부터 대답해줘야 하나? 걱정 말거라. 내가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다른 실버가 널 후원할거야. 캔드릭 왕자, 폐하의 첫째 아들.”

덕분에 토르의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토르는 캔드릭 왕자에게도 명장과 같이 부성애를 느꼈다. 더군다나 제일 처음 토르를 인정해주고 부대원이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사람이 바로 캔드릭 왕자였다.

“나의 여정은 어디까지냐…… 나도 모르겠구나. 확실한 건 남쪽으로 간다는 거야. 내가 태어난 왕국 쪽으로. 그곳에서 신부 감을 찾을 거란다. 만약 링 대륙에서 찾지 못한다면 바다를 건너 내 왕국으로 가서 신부를 찾을지도 몰라.”

“명장님의 왕궁이라니요?”

이제 보니 토르는 명장의 출신을 비롯해 명장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명장이 링 대륙 출신일거라 마음대로 생각했었다.

명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다 건너 이곳에서 아주 먼 곳. 그렇지만 자세한 건 다음에 얘기해줘야겠구나. 긴 여정을 앞뒀으니 이젠 준비를 해야지. 좀 도와주겠니. 시간이 없어. 마구를 좀 채우고 그 속에 각종 무기를 챙기거라.”

토르는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신속히 몸을 움직였다. 말 전용 무기고로 달려가 검은색과 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눈에 뛰는 라닌의 갑옷을 집어왔다. 토르는 차례대로 무기를 집어왔다. 우선 라닌의 등에 말 전용 코트를 올리고 팔을 뻗어 옷을 제대로 입혔다. 그리고 나선 라닌의 얼굴에 도금된 얇은 금속 장신구를 씌었다.

토르의 손길에 라닌이 기분 좋게 울었다. 사람으로 치면 고귀한 전사나 다름 없었다. 마치 전사가 그러하듯 라닌은 갑옷을 편안해했다.

토르는 재빨리 신발에 부착하는 명장의 금빛 장신구를 가져왔고 명장이 말에 오르자 명장을 도와 장신구를 차례대로 부착했다.

“무기는 어떤걸 챙겨야 하나요, 주군?”

명장은 토르를 바라봤다. 아래서 올려다보니 말에 탄 에레크 명장이 더욱 거대해 보였다.

“일년의 여정 동안 어떤 전투를 맞닥뜨릴지 알 수 없구나. 우선 사냥도 해야 하고 스스로도 보호해야 하겠지. 그럼 긴 검을 챙겨야겠다. 단검이랑 활과 화살, 단창, 철퇴, 단도, 방패도 챙겨다오. 그 정도만 챙기면 되겠지.”

“네, 주군.”

토르는 대답과 함께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라닌의 마구간 옆에 있는 명장의 무기 진열대로 달려가 수십 개의 무기를 눈으로 훑었다. 참으로 훌륭한 무기고였다.

에레크 명장이 지시한 무기들을 한꺼번에 조심스레 들고나와 일부는 명장에게 전달하고 나머지는 안전하게 안창에 채웠다.

라닌 위에 앉은 명장은 출발을 준비하여 양 손의 가죽 장갑을 단단히 잡아 당겼다. 토르는 도저히 떠나는 명장을 가만히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주군, 저도 함께 가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 제 후견인이시잖아요.”

명장은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서 해야 하는 여정이야.”

“그럼 첫 번째 도항까지만 배웅하게 허락해주시겠어요? 만약 남쪽으로 가신다면 제가 길을 잘 알아요. 저는 남부지방 출신이거든요.”

명장은 사려 깊은 표정으로 토르를 내려다봤다.

“첫 번째 도항까지라면 굳이 말릴 필요 없겠다. 그렇지만 온종일 말을 타고 가야 하니 지금 당장 출발해야겠구나. 부대원을 위해 마련해둔 말을 타거라. 마구간 뒤에 있다. 갈색 털에 붉은 갈기를 가진 녀석이야.”

토르는 마구간으로 달려가 명장이 말한 말을 찾았다. 말에 오르니 셔츠 안에 숨어있던 크론이 고개를 내밀고 칭얼거렸다.

“겁먹지마, 크론.”

토르가 크론을 진정시켰다.

토르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말을 재촉해 마구간을 빠져 나왔다. 명장은 토르의 모습이 보이자 기다림을 끝내고 라닌과 함께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토르는 사력을 다해 명장을 쫓아갔다.

두 사람은 왕궁 밖을 향하는 성문으로 함께 달렸다. 병사 몇 명이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옆으로는 여러 명의 실버 대원이 줄을 서서 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장이 지나가자 이들은 일제히 두 주먹을 들어올려 경례했다.

명장의 후견을 받는 부대원으로서 명장과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니 뿌듯한 마음이 앞섰다. 비록 첫 번째 도항까지였지만 명장을 배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됐다.

아직 명장에게 못다한 얘기가 너무 많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감사하고 싶은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허나 역시 시간이 부족했다. 두 사람은 평지를 가르며 남쪽으로 질주했다. 늦은 아침 왕실에서 나온 길을 따라 쭉 달리자 지형이 계속해서 변했다. 언덕 하나를 지나고 보니 저 멀리 들판 위로 허리가 끊어질세라 땅을 파고 있는 부대원들이 보였다. 순간 토르는 저 곳에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부대원들을 주시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일어나 토르를 향해 공중에 주먹을 들어올렸다. 태양빛에 눈이 부셔 확실히 볼 순 없었지만 리스 왕자가 토르에게 경례를 하는 것 같았다. 토르도 말을 달리며 주먹을 올려 왕자의 경례에 답했다.

말끔히 포장된 도로가 끝나고 제멋대로 난 시골길이 펼쳐졌다. 길이 좁고 험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생겨난 시골길보다도 더 형편없었다. 일반인들 혼자서 이곳을 지나는 건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길 곳곳에 매복한 도둑들로 어둑해지면 더욱 위험했다. 이런 면에서 토르는 안심할 수 있었다. 에레크 명장 옆을 달리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사실 강도를 마주치면 토르는 자신의 안위보다 강도를 더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더군다나 제정신을 가진 강도라면 감히 실버 대원에게 함부로 대적하는 일은 없기 마련이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타고 달렸고 덕분에 체력이 많이 소모됐다. 숨도 가빴다. 한편 에레크 명장의 체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에 토르는 나약해 보일 까봐 명장에게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눈에 익은 커다란 교차로를 지났다. 교차로에서 우회하면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잠시였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가 밀려왔다. 지금쯤 아버지는 무얼 하고 계실지, 양은 누가 돌볼지, 토르가 돌아오지 않아 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나셨을지 모두 궁금했다. 아버지가 염려돼서라기 보다는 잠시 익숙했던 기억들이 그리워졌을 뿐이었다. 사실 토르는 작은 마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큰 안도감을 느꼈고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남쪽 영토를 향해 계속해서 질주했다. 남부 도항에 대해선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토르가 그곳에 직접 갈 일은 없었다. 남부 도항은 링 대륙의 남쪽을 이어주는 삼대 주요 교차로 중 하나였다. 왕궁에서부터 거의 반나절을 달려왔고 이제 날이 저물 일만 남았다. 땀이 났고 숨이 찼다. 오늘밤 왕의 축제까지 시간 안에 돌아갈 수 있을지 불안했다. 이곳까지 명장을 따라온 게 실수였을까?

언덕을 돌자 드디어 저 멀리 눈 앞에 첫 번째 도랑이 명백하게 보였다. 도랑에는 크고 긴 탑이 세워져 있었고 사각 탑의 네 모퉁이마다 왕의 깃발이 각각 휘날리고 있었다. 난간에서는 실버 대원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탑 꼭대기에서 경계를 서던 실버 대원이 에레크 명장을 보자 트럼펫을 불었고 그 소리에 문지기가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도랑까지는 기껏해야 100미터 정도였다. 명장은 달리는 말을 세워 천천히 걸었다. 이제 정말 명장과 같이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토르는 다시 한번 긴장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명장이 확실히 돌아오리란 보장도 없었다. 일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고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배웅할 기회라도 건진 게 다행이었다. 주어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말들이 거친 숨을 쉬었고 명장 또한 거친 숨을 쉬며 탑으로 향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못 보겠구나. 내가 돌아오면 난 신부와 함께겠지. 많은 것이 달라질 거야. 그렇지만 무슨 일이 생기든 분명한 건 넌 영원한 내 후견부대원이라는 사실이다.”

명장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떠나기 전에 네게 명심시킬 일이 있구나. 전사는 힘이 아닌 총명함이 만드는 거다. 용기만으론 전사가 될 수 없어. 용기와 명예와 지혜가 조화를 이뤄야 해. 반드시 네 기상과 마음을 완벽히 다스려야 한다. 기사도는 얻어지는 게 아니라 달성하는 거야. 이를 위해 반드시 노력해서 더 나은 네 모습을 만들어가거라. 내가 없는 동안 넌 각종 무기들을 다뤄보고 각종 기술들을 연마할거다. 그러나 이것만은 명심하거라. 우리에겐 또 다른 관점의 전투가 있어. 바로 마법사의 관점이지. 아르곤 님을 만나거라. 네 숨겨진 능력을 개발해. 네게서 그 힘이 느껴진단다. 넌 엄청난 가능성을 지녔어. 절대 부끄러워할 게 아니란다. 알겠니?”

“네, 주군.”

토르는 명장의 지혜와 이해심에 감동했다.

“널 내 밑에 두고 보호한 건 다 이유가 있단다. 넌 남들과 달라. 네겐 엄청난 운명이 함께 하고 있어. 심지어 내게 내려진 운명보다도 더욱 위대한 운명일거다. 그렇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 절대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선 안돼.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훌륭한 전사가 되려면 용기와 기술만으론 안돼. 전사의 기량을 갖추고 언제나 그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해야 한단다. 타인을 위해 네 삶을 던질 수 있어야 해. 훌륭한 전사는 부나 명예, 지위나 영광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훌륭한 전사가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고통스럽단다. 바로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일이지.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단다.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신이 아니라, 어제보다 더 뛰어난 내일의 너를 만드는 거야. 반드시 네 부족한 면을 성찰해야 한다. 또한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 보호해줘야 한단다.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전사로의 원정이란다.”

토르는 명장의 말을 귀담아 듣고 숙지했다. 명장에게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더불어 명장의 말을 모두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거라 예상했다.

두 사람은 남부도랑의 입구에 도착했다. 몇 명의 실버 대원들이 말을 타고 명장을 마중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커다란 미소가 가득했고 명장에게 다가오더니 말에서 내려 명장의 등을 두드렸다. 오랜 친구 사이 같았다.

토르도 말에서 내려 라닌의 고삐를 잡고 수문 앞 관리소로 이동해 먹이를 챙겨주고 보듬어주었다. 명장이 몸을 돌려 그곳에 서 있는 토르를 바라봤다. 마지막 인사였다.

고별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차마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았다.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고 토르가 아는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싶었다. 백사와 이상한 꿈, 왕을 향한 불안감 등등 명장이라면 다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미 명장은 수많은 실버 대원들에게 둘러 쌓여 있었고 명장을 비롯한 나머지 실버 대원들이 토르를 미쳤다고 생각할까 두려웠다. 대신에 토르는 명장이 다가와 마지막으로 토르의 어깨를 토닥거렸음에도 그 자리서 서서 입을 꽉 다물었다.

“폐하를 지켜드려.”

명장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토르의 등에 한기가 서렸다. 마치 명장이 토르의 생각을 훤히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돌아선 명장은 다른 실버 대원들과 도항을 떠나 말을 달렸다. 그들의 등 뒤로 금속 문이 서서히 다시 내려왔다.

명장이 떠나버렸다. 토르는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다시 만나기까지 일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토르는 다시 말에 올라 고삐를 쥐고 세게 발길질을 했다. 벌써 시간은 오후였고 축제까지는 반나절가량 남아 있었다. 토르의 머릿속에는 명장이 마지막 남긴 말이 주문처럼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폐하를 지켜드려.

‘폐하를 지켜드려.’

제 28장

어둠 속에서 쉬지 않고 달려온 토르는 마침내 왕궁의 마지막 성문을 통과했다. 가쁜 숨을 쉬며 아직 다 멈추지도 않은 말에서 뛰어내려 시중 한 명에게 고삐를 건넸다. 온 종일 말과 함께한 하루였고 이미 해는 몇 시간 전에 자취를 감췄다. 성문 안으로 횃불이 환했고 축제가 한창 진행중인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얼른 정신을 차려 쓸데없는 생각을 지웠고 너무 늦게 도착한 게 아니길 기도했다.

가까이 있는 시중에게 다가갔다.

“모든 계급들이 다 왔나요?”

토르가 재촉하듯 물었다. 왕이 아직 괜찮은지 확인해야 했으나 독살 여부는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없었다.

시중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토르를 쳐다봤다.

“왜 안 그렇겠어? 늦게 온 너를 제외한 모든 계급이 다 왔지. 왕의 부대 부대원이라면 언제나 시간을 지킬 줄 알아야 해. 더군다나 옷이 너무 지저분하구나. 네 동료들에 비해 너무 초라해. 손부터 씻고 서둘러 입장하거라.”

땀 범벅이 된 토르는 급히 성문을 지나 물이 가득 찬 석조 대야에 두 손을 담갔다. 손으로 얼굴에 물을 끼얹고 그대로 긴 머리까지 쓸어 올렸다.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쉬질 못했다. 말을 타고 길을 달리느라 온 몸이 먼지투성이였고 하루가 마치 열흘처럼 길게 느껴졌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음을 진정하고 차분해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재빨리 복도를 지난 토르는 연회장으로 안내하는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커다란 아치형 문을 열고 들어서자 꿈에서 본 광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눈 앞에 30미터가 족히 넘는 기다란 연회 테이블 두 개가 저 멀리까지 쭉 이어졌고 그 끝에 왕이 자리하고 있었다. 맥길 왕은 그곳에서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었고 주변으로 시중들이 왕을 보좌하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 누군가 귀를 때리는 기분이었다. 연회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중들뿐만 아니라 실버 대원들, 부대원들이 연회석에 자리해 있었고 이 외에도 초대받은 연주자들과, 무용수들, 광대들을 비롯해 수십 명의 매춘부들 등 수백 명이 연회장을 채우고 있었다. 각기 다른 업무를 배정받은 시중들과 호위병도 북적거렸다. 개들마저 연회장을 뛰어다니느라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남자들은 커다란 잔으로 와인과 맥주를 마셔댔고,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고 술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며 술통을 부딪혔다. 테이블 위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멧돼지와 사슴을 비롯해 사냥한 모든 짐승들이 벽난로 앞에서 꼬치에 끼워져 익고 있었다. 절반 정도는 만찬을 즐기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녔다. 혼란스러운 연회장과 술 취한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조금 더 일찍 와 정돈된 모습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한 터라 연회는 어느새 음주 축제로 변질돼가고 있었다.

눈 앞의 아수라장에 당황을 금치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다행히 왕이 아직 살아 있었기에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왕은 매우 좋아 보였다. 덕분에 토르는 백사가 사실 별 뜻이 없었던 게 아닌지, 아니면 별것도 아닌 일을 크게 생각해 혼자 환상을 키운 게 아닌지 순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했다. 서둘러 왕에게 다가가 위험을 알려야 한다는 긴박한 마음만이 그를 재촉할 뿐이었다.

‘폐하를 지켜드려.’

왕을 만나기 위해 붐비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인파로 가득해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었다. 만취한 사람들 틈에 끼어 어깨를 부딪혔고 왕은 저 멀리 30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반쯤 걸어가니 그웬돌린 공주가 시야에 들어왔다. 덕분에 토르는 잠시 그 자리에 멈췄다. 공주는 연회장 옆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앉아있었고 시녀들에게 둘러 쌓여있었다. 평소와 달리 침울한 표정이었다. 음식과 음료엔 손도 대지 않은 채 다른 왕족들과 떨어져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 서둘러 공주에게 다가갔다.

마침 공주가 고개를 들어 토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평소처럼 웃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공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토르는 처음으로 공주의 눈빛에서 노여움을 발견했다.

공주는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더니 뒤로 돌아 자리를 피했다.

심장에 칼날이 꽂힌 것 같았다. 공주의 태도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토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인가?

토르는 급하게 연회 테이블을 돌아 공주에게 달려가 공주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나 매몰차게 내치는 공주의 모습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뒤돌아본 공주의 얼굴엔 인상이 가득했다.

“감히 건들지마!”

공주의 반응에 놀란 토르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토르가 알고 있는 공주가 맞긴 한 걸까?

“죄송해요.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무례를 범하려던 것도 아니에요. 단지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더 이상 네게 볼일 없어.”

분노로 눈까지 빨개진 공주의 어조가 흥분돼 있었다.

토르는 숨이 막혔다. 뭘 잘못했는지 알고 싶었다.

“공주님, 말해주세요, 제가 잘못한 게 있나요? 그게 뭐든지 사과할게요.”

“네 잘못은 구원받을 수도 없어. 그 어떤 사과도 소용없어. 너 자신이 문제야.”

공주가 다시 자리를 비켰다. 공주를 그대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입맞춤까지 나눈 공주를 이대로 가버리게 놔 둘 수 없었다. 알아야만 했다. 무슨 연유에서 공주가 토르를 증오하게 됐는지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토르는 달려가 공주 앞을 가로막았다. 이대로 공주를 보낼 수 없었다. 이런 식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웬돌린 공주. 적어도 제 잘못을 깨달을 기회를 한번은 주셔야죠.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

분노에 가득 찬 공주는 허리에 손을 짚고 토르를 주시했다.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아주 잘 알고 있을 거야.”

“모르겠어요.”

공주는 토르의 얼굴을 주시하며 표정을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토르의 말이 진실임을 믿는듯했다.

“네가 날 만나기 전날, 사창가에 갔었다며. 여러 여자들하고 어울렸다던데. 밤새 그 여자들하고 즐겼다면서. 그러고 나서 다음날 아침 날 만나러 온 거잖아. 이제 기억나? 정말 역겨워. 널 만났다는 게, 널 안았다는 게 역겨워. 다시는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감히 날 우롱했어. 그 누구고 날 함부로 우롱하지 못해!”

“공주!”

공주를 붙잡아 해명을 하고 싶은 마음에 토르는 큰 소리로 외쳤다.

“다 거짓말이에요!”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악단이 자리를 잡더니 난데없이 연주를 시작했고 공주는 재빨리 군중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얼마 있지 않아 토르는 공주의 뒷모습마저 놓쳐버렸다.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누가 공주에게 거짓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고자질해 공주의 마음을 돌려세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공주와의 관계가 엉망이 되어버린 마당에 그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그저 죽을 것만 같았다.

토르는 뒤돌아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백사가 생각 났지만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 지금, 모든 게 다 부질 없었다.

몇 발자국 채 걷지도 못했는데 난데없이 알톤이 나타나 토르의 길을 막아 섰다. 토르를 내려다보는 일그러진 얼굴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가득했다. 알톤은 비단 하의에 벨벳 상의를 입고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기다란 코가 더 돋보이도록 턱을 아래로 내려 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극도로 오만하고 자만심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평민 아니야. 미래의 신붓감은 만나 봤나? 내 생각엔 벌써 네 사창가 소문이 멀리 퍼진 것 같던데. 소문이 다 돌았어.”

알톤은 몸을 가까이 숙이더니 작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 잘 알잖아. 일말의 진실이라도 깃들어 있다면 금새 소문이 번지지. 그 일말의 진실을 내가 알고 있거든. 이제 네 명성도 땅에 떨어졌어.”

분노가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토르는 알톤에게 달려들어 주먹으로 배를 가격했다. 이에 알톤은 무릎을 꿇고 넘어졌다.

잠시 후 사람들이 토르를 붙잡았다. 부대원들과 병사들이 이들을 떼어놓기 위해 앞을 막아 섰다.

“주제넘게 군 줄이나 알아!”

알톤이 삿대질을 하며 토르에게 소리쳤다.

“아무도 왕족에게 손대지 못한다고! 평생 형구를 차고 살 줄 알아! 내가 널 체포할거야! 명심해! 날이 밝으면 바로 끌려갈 줄 알라고!”

알톤은 한바탕 고함을 지르더니 이내 뒤돌아 연회실을 뛰어나갔다.

그러나 토르는 알톤과 알톤의 사병들을 마음에 둘 여력이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든 토르는 오직 맥길 왕만을 생각했다. 토르를 붙잡은 부대원들의 손을 치우고 다시 왕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둘러 인파를 헤쳤다. 마음 속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 쳤다. 돌아가는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막 왕국에 도착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 모든 게 악의에 가득 찬 뱀 같은 녀석 때문에 무너져 버렸고 공주의 오해로 이별통보까지 받았다. 더군다나 내일 당장 구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왕비를 이미 적으로 둔 상황이었기에 토르가 구금될 확률을 더욱 컸다.

어쨌든 당장은 이 모든 생각을 접기로 했다. 당장을 왕을 구하는 일이 토르의 주된 관심사였다.

좀 더 격해진 동작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밀고 나갔다. 재주를 뽐내는 어릿광대와 부딪히는 바람에 토르는 어쩔 수 없이 광대를 피해 옆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도 시중 세 명을 지나서야 마침내 왕의 테이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맥길 왕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손에는 커다란 와인 잔이 들려 있었고 달아오른 얼굴로 공연을 즐기며 웃고 있었다. 왕의 주변으로 최정예 장군들이 앉아 있었다. 왕을 마주보고 선 토르는 조금 더 앞으로 나섰고 이에 왕은 토르를 돌아봤다.

“폐하.”

토르는 간절하게 외쳤다.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꼭 이요!”

토르를 제지하기 위해 병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섰지만 맥길 왕은 손을 들어 병사를 물렸다.

“토르그린!”

취기가 오른 왕의 목소리가 깊이 울렸다.

“얘야. 왜 여기까지 온 거냐? 부대원 자리는 저쪽인데.”

토르는 고개를 낮게 숙여 예의를 차렸다.

“폐하, 죄송합니다만.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연주자 한 명이 다가와 토르의 귀에 심벌즈를 울렸고 이에 왕은 손짓을 건네 연주를 중단시켰다.

음악이 멈췄고 모든 장군들이 토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토르는 자신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래, 토르그린 젊은 친구, 이제 네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말해보거라. 무슨 일이기에 오늘 당장 해야 한다는 것인지.”

“폐하.”

토르는 입을 열었지만 이내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 꿈을 꾸었다는 말을? 백사를 봤다는 말을? 왕이 독살될 것 같다는 말을? 터무니없이 들리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토르는 말을 이었다.

“폐하, 제가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폐하에 관한 꿈이었습니다. 이 연회장,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꿈에서……그러니까 폐하는 술을 마시면 안됩니다.”

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니까 내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냐?”

왕은 토르의 말을 큰소리로 또박또박 반복했다.

잠시 황당한 침묵이 이어졌다. 왕은 다시 몸을 뒤로 기울이고 테이블이 울릴 정도로 크게 폭소했다.

“그러니까 내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니!”

왕이 다시 한번 반복했다.

“도대체 무슨 꿈이 그런가! 터무니없는 꿈을 꿨구나!”

왕은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아 토르에게 호통쳤고 이내 옆에 있던 장군들도 이에 동조했다. 토르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차마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왕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다가와 토르를 끌고 갔다. 하지만 토르는 거칠게 병사들의 손을 치웠다. 이미 굳게 마음을 먹은 터라 왕에게 꼭 위험을 알려야 했다.

‘폐하를 지켜드려.’

“폐하, 제 말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토르는 달아오른 얼굴로 왕에게 다가가 소리치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테이블이 심하게 흔들렸고 사람들이 일제히 토르를 주시했다.

모두가 놀라 모두 말문이 막혔고 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말을 명심해? 내게 감히 명심하란 말을 하다니!”

왕의 노여움이 더욱 고조됐다.

“폐하, 용서하십시오. 불경을 저지르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폐하의 안위가 염려됩니다. 제발. 술을 드시지 마세요. 꿈속에서 폐하께서는 독살되셨습니다! 제발, 폐하가 걱정돼서 이러는 겁니다. 그 외에 다른 의도는 절대 없습니다.”

왕의 인상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왕은 토르의 눈을 주의 깊게 주시한 뒤 크게 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마음을 알겠구나. 비록 네가 미련한 짓을 저질렀지만 네 불경을 용서하겠다. 가라. 오늘밤은 더 이상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구나.”

왕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아까보다 토르를 더욱 세게 붙들어 끌고 갔다. 이내 한두 잔씩 술잔이 비워지며 왕의 테이블에 유쾌함이 재개됐다.

토르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끌려나갔다. 이곳에 와서 벌인 일들 덕에 덜컥 겁이 났다. 내일이면 그 대가를 치를 거란 생각에 기운이 완전히 빠져버렸다. 어쩌면 왕궁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생토록.

병사들은 토르를 내치고 가버렸다. 돌아보니 부대원 테이블이었다. 왕의 테이블과는 6미터 남짓 떨어져있었다.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짚어 돌아보니 리스 왕자였다.

“계속 널 찾아 다녔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잖아!”

여전히 당혹스러운 마음에 토르는 대답조차 할 기운이 없었다.

“이리 와서 앉아, 내가 자리 맡아놨어.”

리스왕자는 토르를 끌고 자신의 옆 자리에 앉혔다. 왕족 옆으로 나란히 마련된 테이블이었다. 고드프리 왕자는 양 손 가득 술잔을 들고 있었고 그 옆으로 개리스 왕자가 쉬지 않고 눈동자를 굴리며 이곳 저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토르는 그 누구보다 그웬돌린 공주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공주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토르? 마치 이 테이블이 널 잡아먹기라도 하듯 계속 여기만 노려보고 있잖아.”

왕자는 토르 옆자리에 앉아 재차 질문했다.

토르는 고개를 저었다.

“말씀 드려봐야 믿지도 않으실 거에요. 그냥 조용히 입다물고 있을래요.”

“말해봐. 내게 못할 말이 뭐가 있어.”

왕자는 집요하게 토르를 재촉했다.

왕자의 눈을 바라본 순간 드디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줄 누군가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토르는 크게 숨을 마신 뒤 말을 꺼냈다. 밑져 봐야 본전이었다.

“어젯밤 숲에서요, 그웬 공주와 같이, 백사를 봤어요. 공주님께서 백사가 죽음의 전조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아르곤님을 찾아갔고 누군가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폐하께서 독살당하시는 꿈을 꿨어요. 바로 오늘밤 이곳에서요. 확실한 예감이 들어요. 폐하가 운명하실 거라는. 누군가가 폐하의 암살을 꾸미고 있어요.”

횡설수설하며 뱉어냈지만 그래도 더 이상 혼자 끙끙 앓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리스 왕자는 말없이 토르의 두 눈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사실인 것 같구나. 의심의 여지가 없어. 그리고 아버지를 염려해줘서 정말 고마워. 난 널 믿어. 진심으로. 그렇지만 꿈은 간교해. 언제나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야.”

“폐하께도 말씀을 드렸어요. 모두들 절 조롱하셨어요. 물론 폐하께서는 계속 술을 드시겠죠.”

“토르, 네가 확실히 꿈을 꾼 건 알겠어. 그리고 네 불안한 마음도 이해해. 그렇지만 나도 평생토록 수많은 악몽을 꿨어. 어제는 궁궐에서 쫓겨나는 꿈을 꿨고 꿈이 깼는데도 그 기분이 생생했어. 그렇지만 난 쫓겨나지 않았잖아. 내 말뜻 알겠니? 꿈이란 참 묘해. 그리고 아르곤의 말은 수수깨끼 같아. 전부 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단 얘기야. 폐하께선 멀쩡하시잖아. 나도 그렇고. 우리 부자 모두 다 괜찮을 거야. 편하게 앉아서 술을 좀 마시고 쉬어. 축제를 즐겨야지.”

이 말을 끝으로 리스 왕자는 푹신한 털 의자에 기대어 앉아 술을 마셨다. 리스 왕자가 손짓하자 시중 한 명이 토르 앞에 커다란 사슴고기와 술잔을 대령했다.

토르는 멀뚱히 앉아 음식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삶이 서서히 녹아버리는 느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얼 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여전히 머릿속엔 어젯밤의 꿈만 맴돌았다. 연회실에 앉아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악몽 속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토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왕에게 올려지는 술과 술잔을 예의주시하는 것뿐이었다. 시중 한 사람 한 사람을 눈 여겨 봤고 술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왕이 술을 한 모금 넘길 때마다 토르는 움찔했다.

집착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몇 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눈으로 상황을 감지했다.

마침내 한 시중이 남다르게 생긴 술잔을 들고 왕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커다란 술잔은 최고급 금으로 제작됐고 루비와 사파이어로 장식돼 있었다.

꿈속에서 본 술잔이 틀림없었다.

왕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시중을 보고 있자니 두려움에 토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왕과 시중과의 거리가 채 한걸음 남았을 무렵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토르의 모든 자의식이 저 술잔에는 분명 독이 들었다고 외쳐대며 그를 괴롭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거칠게 팔을 저어 사람들을 밀쳐내며 군중 속을 헤쳐나갔다.

이제 막 왕이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올린 순간 토르는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 팔을 뻗어 왕의 술잔을 쳐냈다.

날아간 술잔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돌 바닥을 뒹굴었고 주변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연회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악단들과 광대들이 일제히 얼어 붙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토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왕은 토르를 노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감히 네가!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무례의 대가로 형구를 채우겠다!”

왕은 날카롭게 호통쳤다.

토르는 공포에 질린 채 서있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그 와중에 사냥개 한 마리가 와인이 엎질러진 바닥으로 걸어가 바닥을 핥기 시작했다. 토르가 뭐라 변명을 할 새도 없이 사람들이 그대로 지켜보는 가운데, 모든 시선이 끔찍한 신음을 토하는 사냥개로 향했다.

“저 와인에 독이 든걸 넌 알고 있었어!”

누군가가 소리쳤다.

돌아보니 개리스 왕자가 토르를 비난하듯 손가락을 가리키며 왕에게로 다가갔다.

“저 술잔에 독이 든걸 어떻게 알고 있을 수가 있지? 네가 독을 탄 게 아닌 이상 말이야! 토르가 왕을 독살하려 했어!”

연회장을 메운 군중들이 분노를 토로했다.

“토르를 지하감옥에 가두거라.”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잠시 후 병사들이 다가와 토르의 사지를 붙들고 연회장 밖으로 끌고 갔다. 토르는 항의의 몸부림을 쳤다.

“아니에요!”

죽을힘을 다해 외쳤다.

“잘못 알고 계세요!”

그러나 누구도 토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빨리 연회장 밖으로 끌려나갈 뿐이었다. 토르는 눈 앞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지켜봤다. 눈 앞에서 토르의 삶이 사라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토르를 끌고 연회실 한쪽 벽에 연결된 문을 열고 들어가 이내 연회실로 향하는 문을 닫아버렸다.

조용한 공간이었다. 잠시 후 토르는 어디론가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살펴보니 토르를 나눠 든 병사 여럿이 구불구불한 돌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밑으로 갈수록 주변이 점점 어두워졌고 울부짖는 죄수들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감방의 철문이 열리자 그제서야 토르는 끌려온 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지하감옥이었다.

토르는 거세게 반항하며 몸부림쳤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해하는 거예요!”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다가오는 커다란 체구의 교도관이 보였다. 얼굴은 면도도 안 해 털이 덥수룩 한데다 치아는 누랬다.

교도관은 다짜고짜 토르를 노려봤다.

“그래,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지.”

목소리가 매우 거칠었다.

교도관은 팔을 뒤로 쭉 뻗었다. 그의 주먹이 정면으로 얼굴에 날아온 것을 마지막으로 토르의 눈 앞이 깜깜해졌다.

세상이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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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행군

(마법사의 링 연작소설 제2권)



“음모, 대항책, 미스터리, 용맹한 기사들, 실연의 아픔이 가득한 사랑의 결실, 기만, 배신 등 마법사의 링은 즉각적인 흥행요소를 고루 갖춘 소설이다. 읽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하고 연령에 관계없이 누구나 매료된다. 판타지 소설 애독자라면 영구 소장도서로 추천한다.”

--도서 및 영화 평론, 로버트 메토스.

‘왕들의 행군’은 토르가 어른이 되어 가는 서사시적 고투를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사로의 여정에 오른 토르는 그의 존재와 그가 가진 힘의 본질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성찰을 한다.


감옥에서 탈출한 토르는 맥길 왕을 향한 또 다른 암살 시도에 충격을 금치 못한다. 맥길 왕의 사망 후 왕국은 혼란에 빠진다. 모두가 나서 왕권 장악을 위한 각축전에 뛰어들며 왕궁은 그 어느 때 보다 가족사와 권력투쟁, 야심, 질투, 폭력, 배신이 난무하게 된다. 반드시 맥길 왕의 자식들 중 한 명이 후계를 이어야 하는 상황에서, 모든 힘의 근원인 운명의 검은 또다시 선택된 자를 판가름 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다. 왕의 살해 도구가 밝혀지며 암살의 배후가 점점 드러나는 가운데, 엎친대 덮친 격으로 맥길 왕족은 맥클라우드 왕족의 침입이란 새로운 위협을 직면한다.

토르는 그웬돌린 공주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 토르와 부대원들은 100일간의 훈련을 앞두고 짐을 싸라는 명령을 받는다. 모든 부대원들은100일간의 지옥훈련을 통해 단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반드시 무사히 살아 돌아와야 하며, 이를 위해 왕의 부대는 캐니언 협곡을 넘어 링의 보호막이 없는 와일드에서 탈투비안 바다로 항해한다. 부대원을 한층 성장시키기 위한 지옥훈련 장소는 다름아닌 용이 엄호하는 안개의 섬이다.

왕의 부대는 무사히 귀환 할 수 있을까? 이들의 부재 동안 링 왕국은 무사할 수 있을까? 또한 토르는 과연 자신의 운명 속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까?

‘왕들의 행군’은 정교하게 설정된 배경과 등장인물을 축으로 우정과 사랑, 경쟁자와 구혼자, 전사와 용, 음모와 정치적 권모술수, 성장, 실연, 기만, 야망 그리고 배신을 다루는 장편 서사소설이며 명예와 용기, 숙명과 운명, 마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들의 행군’은 연령과 성별에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영원히 뇌리에 각인될만한 판타지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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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건 라이스 저서

마법사의 링 연작소설

전사로의 원정 (제1권)

왕들의 행군 (제 2권)

용의 숙명 (제 3권)

명예의 눈물 (제4권)

영광의 맹세 (제5권)

용맹의 충전 (제6권)

검의 의식 (제7권)

수여된 무기 (제8권)

주술에 사로잡힌 하늘 (제9권)

방패의 바다 (제10권)

강철 집권 (제11권)

화마에 갇힌 땅 (제 12권)

여왕들의 규칙 (제13권)


생존 3부작 연작소설

아레나 원: 슬레이버서너스(제1권)

아레나 투(제2권)

뱀파이어 저널 연작소설

일변 (제1권)

사랑 (제2권)

배신 (제3권)

운명 (제4권)

욕망 (제5권)

약혼 (제6권)

맹세 (제7권)

발견 (제8권)

부활 (제 9권)

갈망 (제10권)

숙명 (제11권)

모건 라이스 작가소개


모건 라이스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젊은 성인 이야기를 다룬 11권의 연작소설 ‘뱀파이어 저널(미완),’ 연작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2권의 스릴러 종말물 ‘생존 3부작(미완),’ 판타지 연작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 ‘마법사의 반지(미완)’ 13권을 집필했다.

모건 작가의 소설은 오디오 북과 인쇄 본으로 출판됐고, 독일어,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일본어, 중국어, 스웨덴어, 네덜란드어, 터키어, 헝가리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로 번역됐다. (이 외 언어 번역본 출판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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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ş həddi:
16+
Litresdə buraxılış tarixi:
10 oktyabr 2019
Həcm:
164 səh. 7 illustrasiyalar
ISBN:
9781632911124
Müəllif hüququ sahibi:
Lukeman Literary Management Ltd
Yükləmə format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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